1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
(2008년 재보궐선거) 승자독식제 선거법은 단 1표 차이라 할지라도 이긴 사람은 당선, 진 사람은 그냥 아무것도 없이 낙선이라는 잔인한 결과를 부른다 강원 고성군수 1표 차 당선도 이렇게 두고두고 회자되는데, 과연 대통령 선거에서 1표 차이로 지면 그 여파가 어떨까? (1876년 미국 정·부통령 선거 공화당 포스터, 왼쪽 대통령 후보 러더퍼드 B. 헤이스 오른쪽 부통령 후보 윌리엄 A. 휠러) 그런데 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다 사실 똑똑한 싱붕이들은 알고 있듯이 미국 대통령 선거는 선거인단을 선출하는 간접선거이기 때문에 한 표 차이로 떨어졌다는 것이 50,000,001표 vs 49,999,999표로 떨어졌다는 뜻은 아니지만, 370명에 달하는 선거인단 중 단 1명을 덜 확보해서 대통령이 되지 못 한 것도 충분히 충격적인 결과긴 하다 (1938년 발행된 우표, 왼쪽부터 에이브러햄 링컨, 앤드루 존슨, 율리시스 S. 그랜트) 1854년 반노예제 휘그당원들을 중심으로 창당된 공화당은 1860년 대통령 선거부터 1872년 대통령 선거까지 대통령 선거 4연승(1860 링컨, 1864 링컨-존슨, 1868 그랜트, 1872 그랜트)을 기록했다 남북전쟁의 영웅인 그랜트 대통령은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이고 청렴했으며 카리스마와 인품으로 전후 복구를 이끈 대통령이었으나 정치력과 인맥이 부족했다 (선거에서 자기를 찍을 수 있는 줄 몰라서 두 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모두 야당 후보를 찍기도 했다) 그래서 친척과 지인들을 측근으로 기용했는데, 순진한 그랜트 대통령의 신뢰를 등에 업은 측근들이 온갖 비리를 일으키며 그랜트 행정부는 부패로 얼룩졌다 (새뮤얼 J. 틸던) 민주당은 그재앙 심판 여론에 힘입어 남북전쟁 이후 16년 만에 하원 탈환에 성공했고, 부패 킬러로 소문난 뉴욕 주지사 새뮤얼 J. 틸던을 압도적인 지지로 1876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며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을 드높였다. 민주당의 아버지인 앤드루 잭슨 이후 가장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할 정도 한편 공화당에서는 그랜트 대통령의 개인적 인기가 여전했기 때문에 그랜트 대통령의 3선 도전에 대한 여론이 있었으나 연방 하원에서 3선 출마 반대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등 조지 워싱턴 대통령 이래 전례없는 3선 출마 반대에 대한 여론에 밀려 그랜트 대통령은 출마를 포기한다 그리하여 前 연방 하원 의장 제임스 G. 블레인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됐으나, 7차에 걸친 투표 끝에 청렴하기로 유명한 오하이오 주지사 러더퍼드 B. 헤이스가 역전승을 거두고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다 (러더퍼드 B. 헤이스) 남북전쟁 반역자당의 이미지를 안고도 4년 전 대통령 선거에서 선전하고, 중간선거에서 승리한 민주당은 이번에야말로 정권 탈환을 노리고 있었고, 1876년 대통령 선거 본선 투표 결과 428만 표 vs 403만 표로 전체 득표수에서 앞서나가게 된다 이로 인해 민주당의 새뮤얼 틸던은 선거인단 전체 369명 중 184명을 확보하며 단 1명만 더 확보하면 과반으로 승리를 확정지을 수 있었고 공화당의 러더퍼드 헤이스는 166명을 확보하여 18명을 뒤처지고 있었지만 아직 개표가 끝나지 않은 사우스캐롤라이나(7명), 플로리다(4명), 루이지애나(8명)의 선거인단 총원이 19명이어서 만약 이 3개 주에서 모두 이기면 1표 차이로 역전승을 할 수 있었고 반대로 3개 주 중 한 곳에서라도 지면 패배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재개표, 검표를 진행해도 이 3개 주의 결과가 계속 오차범위 안에서 다르게 나오고 취임식이 다가오는데도 결론이 나지 않자 양당은 자기들에게 유리한 논리를 펼치며 승리를 주장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헤이스가 승리한 오리건에서는 오리건 공화당이 지명한 선거인단 중 한 명이 공무원(우체국장)으로 밝혀져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야 했는데, 교체 권한을 가진 오리건 주지사는 민주당 소속이었기 때문에 이로 인한 논란도 있었다 결국 선거특위가 설치되어 문제 해결에 나섰고 민주당, 공화당 각 7명씩 위원을 맡고 위원장에 무소속 데이비드 데이비스 연방 대법관이 취임하게 되었다 (데이비드 데이비스) 데이비드 데이비스 대법관은 "데이비스 본인도 그가 어떤 후보를 선호하는지 알지 못 한다"고 할 정도로 중립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위원장에 위촉될 수 있었는데, 민주당은 데이비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그를 일리노이 상원의원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데이비스가 민주당의 상원의원직을 받아들이는 대신 특위에서 빠지기로 했고, 공석이 된 위원장 자리는 남은 대법관이 모두 공화당원인데다 상원 다수당이 공화당이었기 때문에 공화당원인 조셉 P. 브래들리가 들어가게 되며 특위는 공화당 8명, 민주당 7명이 된다 (1876년 대통령 선거 결과) 선거특위는 당연하게도 사우스캐롤라이나, 플로리다, 루이지애나에서 공화당의 승리를 선언했고, 문제의 오리건 주 선거인단 1명은 오리건 주지사가 아닌 오리건 공화당 위원장이 교체하게 하며 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공화당의 러더퍼드 B. 헤이스가 185 vs 184로 대역전승을 거두게 되었다 당연히 민주당을 지지한 남부는 폭발하여 폭동 일보 직전까지 가게 되자 양당은 '남부 군정 종료, 민주당원에게 일정한 수의 각료 배정, 남부인의 연방 공직 임명 허용, 러더퍼드 헤이스 대통령의 재선 출마 포기'를 내용으로 하는 타협(1877년 타협)을 통해 선거특위의 결론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모든 일이 끝난 건 대통령 취임식 이틀 전이었다 사실 민주당 입장에서 다 이긴 선거를 협잡질로 빼앗긴 느낌일 순 있겠으나, 공화당도 할 말이 있는 것이 새뮤얼 틸던의 높은 득표율은 남부에서 백인들이흑인들의 투표를 폭력을 통해 방해한 결과(흑인들은 그랜트 대통령 시기 투표권을 얻었다)이며 흑인들이 정당하게 표를 행사했을 경우 공화당의 러더퍼드 헤이스가 득표수, 선거인단 양면에서 논란없이 승리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기 때문 (그로버 클리블랜드) 결국 민주당은 이번에도 정권교체에 실패했으며, 러더퍼드 헤이스 대통령은 약속대로 재선에 출마하지 않았으나 4년 후 188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공화당의 제임스 A. 가필드가 당선된다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은 임기 중 총격을 당해 투병 끝에 사망하고, 체스터 A. 아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며 민주당은 체스터 아서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가는 4년 뒤에야 그로버 클리블랜드의 당선으로 정권교체에 성공하는데 민주당의 마지막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이 퇴임한 1861년 이후 무려 24년 만에 선거로 선출된 민주당 대통령이 나온 것이었다 지구촌갤러리 여하님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