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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정기술] 개발도상국을 위한 태양열정수기, '엘리오도메스티코'

안녕하세요! 1도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는 1do입니다. 오늘 알려드릴 적정기술은 태양열을 이용한 착한 정수기 '엘리오도메스티코(Eliodomestico)입니다!! 가마솥처럼 생긴 제품은 바닷가에 사는 제3세계 사람들이 태양열을 이용하여 바닷물을 마실 수 있는 물로 바꾸어 주는 정수로 만드는 제품입니다:) 태양열을 이용하여 증류시켜서 깨끗한 물만 남기는 원리 인데요! 약 8시간쯤 두면 깨끗한 물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다른 정수기에 비해 약 3배 이상의 효율성을 내고, 구조도 단순 하고, 특별한 에너지가 필요하지도 않고, 제작도 개발도상국에서도 쉽다고 하고, 또한 약 5만원 돈으로 하루 5L의 물을 정수 할 수 있다고 하니.. 참으로 착한 제품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쓰는 물 어떤 이에게는 너무나 부족한 물 작은 아이디어, 작은 기술이 세상을 바꾸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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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자의 선처호소 편지 집어던진 미국판사
지난 2018년, 미국 미시간주 법원. “멸시당한 여자의 분노는 따라갈 수 없습니다. 내가 한 모든 일을 잘못으로 몰아갔습니다” 성범죄 혐의로 법정에 선 피고인이 쓴 해당 내용의 편지를 읽던 판사는 편지를 휙 내던졌다. 이날 법정에 선 피고인은 선수들에게 치료를 빙자해서 성폭력을 저지른 미국 체조 대표팀 주치의였다. 판사는 주치의를 향해 일갈했다. “아직도 당신이 한 짓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이 편지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난 의사인 당신에게 내 반려견 치료도 맡기지 않을 것입니다.” 판사가 주치의에게 선고한 처벌은징역 175년 “당신에게 175년, 2,100개월 형을 선고합니다. 방금 당신의 사형 집행 영장에도 서명했습니다. 당신에게 이런 벌을 내리는 것은 판사로서 제 영예이자, 권한입니다. 당신은 다시는 감옥 밖으로 걸어서 나갈 자격이 없습니다.” 선고가 끝나자 법정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판사는 판결을 내리며 이같은 말을 남겼다. “오늘 판결은 내가 내리지만, 두 번째 판결은 신이 내릴 것입니다.” + 어린 체조선수 등 10~30대 여성들을 상대로 장기간 상습 성폭행·성추행한 혐의를 받는 미국 체조대표팀 주치의 '래리 나사르' 30여년에 걸쳐 자신의 치료실에서 체조·수영·축구·배구 선수 등 10~30대 여성 156명을 성추행거나 성폭행한 천하의 ㄱㅆㄹㄱ같은 놈 손정우 사건 담당 판사 정신차려라... 판사님 내한 소취...
타다를 응원해주세요
제가 응원을 요청드리는건 아니고요~ 아래와 같은 문자를 받았습니다. 씨알이 먹힐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적극적으로 지지서명했습니다. 택시사업자들의 서비스개선과 반성에 대한 경각은 없고 기득권세력에 밀려 신사업서비스만 죽이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타다를 지지하는 것보다는 택시사업자들과 택시운전수들이 너무 꼴보기 싫습니다. ㆍ 승차거부가 없어진 줄 알죠? 싸가지없는 택시들은 예약등 켜놓고 거부하다가 외국인같은 승객만 골라서 태웁니다. ㆍ택시차량에는 깜빡이(방향지시등)이 안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차로변경이건 정차건 깜빡이키는 택시를 찾기 어렵습니다 ㆍ끼어들기위반, 신호위반 등등 위험한 짓거리는 다 합니다. 도로위의 무법자들은 빨리 분리수거해야하는데 너~무 많습니다. 면허수를 줄여야 할 것 같습니다. ㆍ얼마전에도 아내(외국인)의 친지분들이 서울에 여행오셨다가 택시요금 바가지를 썼습니다. 물론 타다도 똑같이 저럴 수 있겠지만, 적어도 바가지ㆍ승차거부는 줄어들겠죠 [Web발신] 타다금지법은 누구를 위한 법일까요? 총선을 4개월여 앞두고, 타다금지법이 국토위 전체 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이 법안을 추진한 누군가에게 타다는 가치가 없는 서비스일 것입니다. 하지만 타다의 모든 이용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타다는 피곤한 직장인들에게, 등원/등교하는 아이를 가진 부모에게, 부모님을 모시고 이동하는 아들딸에게, 반려동물과 병원을 찾는 애견/애묘인에게, 장애인과 65세 이상의 교통약자에게, ‘이동의 기본’이라는 당연한 권리를 잊고 살았던 우리 모두의 일상에 의미있는 서비스입니다. 간단한 지지성명으로, 타다로 이동하는 수많은 이용자들이 있음을 알려주세요. *성명 참여하기: http://bit.ly/supportTADA 타다를 이용해주시는 150만 이용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타다 팀 드림 *수신거부 : 타다 앱 [설정 > 마케팅 정보 수신 동의] *본 문자는 12/10 기준 마케팅 정보 수신 동의자 대상으로 발송되었습니다
콜드 체인, 세상을 바꾼 냉기의 혁명(4)
남들 한 번 가기도 꺼리는 군대를 두 번 가겠다고 자원한 누메로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 첫 영화 <퍼스트 어벤저>를 보신 분들은 기억하실까요? 영화 초반에 비쩍 마른 주인공이 군대에 자원했다가 퇴짜맞는 장면이 있었죠. 1차 대전 발발 즈음엔 젊은이들 사이에서 군에 자원하는 것이 의무이자 일종의 모험 같은 것으로 여겨진 모양입니다. 낯선 유럽 대륙에 가서 군에서 선전한 것처럼 안전하고 안락한 참호에 틀어박혀 적을 노려보며 몇 개월쯤 있다보면 어느새 예정된 주둔 기한이 끝나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다소 과장되긴 했지만 당시 군에 지원한 청년들이 전쟁에 대해 가진 인식은 그런 정도였죠. 그 전쟁이 수년이 넘게 이어지고 전세계 열강이 참전하는 국제전이 될 거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https://youtu.be/JerVrbLldXw <퍼스트 어벤저> 영화 트레일러. 영상 가장 앞부분에 주인공이 군에 지원했다 퇴짜맞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실제에 비하면 신병 지원소가 만화처럼 과장되게 표현되긴 했지만요. 어쨌거나 누메로도 캡틴 아메리카처럼 호기롭게 군에 자원하러 일부러 워싱턴까지 옵니다. 막 설립한 회사 운영이 아직 채 본궤도에 오르기도 전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이 누메로와 프레데릭에겐 전화위복이 됩니다. 워싱턴에서 누메로는 우연히 육군이 가진 고민을 알게 됩니다. 미 육군은 유럽 대륙으로 보낼 장병들을 위해 각종 보급품을 안정적으로 수송해야 했죠. 그 보급품들 가운데는 물론 식료품이나 의약품 따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도중에 상하거나 훼손되지 않고 신선하게 목적지까지 물품을 수송하자면 무엇보다도 향상된 냉동 기술이 꼭 필요했죠. 마침 누메로에겐 그들의 고민을 해소해 줄 기술이미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자, 누메로는 군에 자원하겠다는 계획을 접고 다시 서모컨트롤 사로 돌아옵니다. 프레데릭이 개발한 냉동차 유닛을 군 사양으로 개량해 생산하기 위해서였죠. 완성해 군에 납품한 냉동 장비는 현장에서도 고장 없이 잘 작동했습니다. 미군은 정식으로 서모컨트롤 사 제품을 군 장비로 채택하기에 이르죠. 곧 미군의 식수부터 혈장에 이르기까지 온도에 민감한 모든 품목이 서모컨트롤 사의 냉동 트럭으로 미군이 진출한 모든 전역에 배송됩니다. 유럽과 아프리카, 심지어 태평양 전선에서도 누메로와 프레데릭이 개발한 냉동차가 수송을 맡았죠. 군과 협력하면서 서모컨트롤 사는 비로소 두각을 보였습니다. 프레데릭이 완성한 기술은 단순히 트럭을 개선할 뿐 아니라, 야전병동과 병기창, 심지어 B-29 폭격기의 조종석과 엔진에까지 적용되었죠. 전쟁 동안 서모컨트롤 사가 미군과 계약한 금액은 천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서모컨트롤 사는 더 이상 작은 회사가 아니었죠. 1949년 기준 직원 200명에 매출 400만 달러 이상을 달성한 회사는 냉동 기술 훈련 학교를 자체 설립해 보유했고, 미 대륙과 중동, 유럽까지 진출해 제품을 판매했습니다. 프레데릭은 대전 후 기차, 배, 트럭 등으로 쉽게 옮겨 실을 수 있는 냉장 컨테이너를 개발했고, 동업자 중 하나인 Myron Green은 전국 유통 및 서비스망을 구축해 회사의 기틀을 세웠죠. 때맞춰 1950년대 새로운 산업이 등장해 급속히 성장합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냉동 식품과 슈퍼마켓 산업이죠. 프레데릭은 이 이후로도 다양한 기술을 연구해 특허를 내고 신제품을 출시했습니다. 1955년 버스용 에어컨을 최초 개발했고, 58년에는 기존 가솔린 엔진보다 훨씬 뛰어나 장거리 수송에 적합한 디젤 엔진 냉동차 설비를 만들어냈습니다. 그가 생전 제출한 특허만도 60개가 넘죠. 그 분야도 냉동 설비에만 국한하지 않고, 엑스레이와 엔진, 음향 설비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습니다. 1944년 프레데릭은 미국 최초로 냉동 엔지니어 협회 회원이 된 흑인이었습니다. 누메로는 계속 프레데릭과 다른 동업자들 도움을 받아 회사를 키웠죠. 50년대 중반에 서모컨트롤 사는 사명을 변경, 써모 킹Thermo king coperation 사로 바뀝니다. 현재도 전세계에서 검증된 기술력과 우수한 품질로 트럭용 냉동기뿐 아니라 다양한 냉동 수송 기술이 필요한 분야에 진출해 있는 기업입니다. 써모 킹 사가 1960년에 발표한 NWD 62 모델. 현재 써모 킹 사의 냉동 트레일러 제품들의 기본 틀이 된 모델입니다. 냉동차 이외에도 프레데릭 존스는 화물 열차의 냉동 차량, 군에서 혈장이나 약물 따위를 수송할 수 있는 휴대용 냉장 장치 등도 발표했습니다. 써모 킹 사가 발표한 상품 가운데는 심지어 우유 냉각기나 골프 카트 따위도 있습니다. 자신의 발명이 세상을 바꾸어놓은 것을 본 후, 1961년 2월 프레데릭 존스는 폐암으로 사망합니다. 미네소타는 1977년 그의 공로를 인정해 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죠. 고아로 자라나 흑인이란 이유로 차별받던 그가 마지막엔 어느 누구도 그 공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위인이 된 겁니다. 한편 사장인 조셉 누메로는 평생을 함께 한 파트너가 사망한 후, 회사를 웨스팅하우스 일렉트릭 사에 팝니다. 1963년까지 그는 계속 사장으로 자리를 지킨 후, 동업자였던 마이론 그린Myron Green에게 넘기고 스스로는 명예 회장으로 물러납니다. 회사는 60년대 극심한 파업을 여러 차례 겪지만 흔들리지 않았죠. 하지만 66년, 써모킹 사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참사를 겪게 됩니다. 때는 1966년 3월. 회사는 우수 딜러와 직원들을 뽑아 포상 여행을 보내 주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출발해 하와이 호놀룰루, 일본 하네다를 거쳐 홍콩 카이탁 공항으로 향하는 영국해외항공 소속 911편 비행기에 75명의 임직원이 몸을 싣죠. 회사는 이들에게 17일간의 동양 여행 패키지를 제공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여행 도중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버립니다. 호놀룰루에서 도쿄 하네다로 향하던 중, 비행기는 기상 악화로 후쿠오카 공항으로 회항합니다. 후쿠오카에서 하루 대기한 후, 비행기는 다음날 원래 계획했던 하네다 공항에 착륙하죠. 기상 상황은 좋아서 후지산이 뚜렷이 보일 정도로 맑았다고 합니다. 지상에서 비행 계획을 브리핑한 후,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이륙한 비행기는 예정대로 홍콩을 향해 날아갔죠. 그러다 문득 기장은 기수를 잠시 돌려 후지산 정상으로 향합니다. 물론 비행기 고도는 충분히 높아서 산 정상에 부딪칠 우려는 없었습니다. 탑승객들에게 하늘에서 보는 후지산 정상 풍경이라도 보여주려 했던 걸까요? 하지만 정상 즈음에서 비행기는 난기류를 만나 견디지 못하고 동체가 공중분해되어 버립니다. 날개를 잃은 항공기는 후지산 동쪽 6킬로 떨어진 숲에 뿌연 연기를 내며 추락하죠. 써모킹 임직원 75명을 포함해 당시 탑승객과 승무원 124명은 모두 사망합니다. 사망한 임직원 가운데엔 임원급이 3명, 주요 딜러가 35명이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사망한 임원 가운데엔 부사장 랄프 포터도 있었죠. 또 회사에서 보내주는 포상 여행이었기에, 부부 동반으로 참석한 경우가 총 52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바람에 63명의 아이가 부모를 잃었죠. 써모 킹 사 입장에선 창사 이래 최악의 참사를 경험한 것입니다. BOAC 911편 추락 사고. 피해자 중엔 일본인, 한국인도 소수 있었지만 대부분이 써모 킹 사 임직원과 같이 외국인들이었습니다. 이 사고 이후 난기류에 대한 주의 대응이 강화되었다고 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회사는 이후로도 건재했습니다. 모기업 웨스팅하우스가 어려움을 겪을 때도 그룹 내에서 유일하게 좋은 성적을 내어 알짜 기업 노릇을 톡톡히 해냈죠. 1991년 누메로가 사망할 당시엔 이미 회사는 수백만 달러 규모 사업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2700여 명을 고용하고, 도미니카나 아일랜드, 스페인에도 공장이 있었죠. 1993년엔 일본 시장 거의 절반을 점유했고, 이듬해에는 동유럽, 아시아 지역에서 딜러망이 36%나 신장했습니다. 1991년, 미리 적은대로 조시 부시 대통령이 백악관 로즈 가든에서 조셉 누메로와 프레데릭 존스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프레데릭 존스는 이미 사망한 뒤여서 직접 훈장을 전달받지는 못했지만, 그 미망인이 행사장에서 대신 수령했죠. Medal of Technology & Innovation이 흑인에게 수여된 건 프레데릭 존스가 최초였습니다. 두 사람에게는 냉동 운송 기술을 개발해 선적과 식료품 시장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은 공로가 인정되었죠. Medal of Technology & Innovation. 1985년 레이건 행정부에서 처음 수여한 이래, 역대 대통령들이 산업계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세운 사람들을 선정해 표창했습니다. 듀폰 사나 빌 게이츠, 3M 등도 같은 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아마도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이러한 영광을 누릴지는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하나는 대공황으로 완전히 파산하고 학점이 모자라 법대 졸업을 하지 못한 청년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만의 경주용 차를 가지고 대회에 나가길 바랐던 극장 영사기사였죠. 그들에겐 기회가 있었고, 기회를 붙잡을 능력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오늘날 우리가 편의점과 마트에서, 혹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그들이 남긴 유산으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 건, 1930년대 누메로와 프레데릭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고 손을 맞잡은 그 때 덕이란 생각이 듭니다.
콜드 체인, 세상을 바꾼 냉기의 혁명(3)
프레데릭 존스에게도 다른 위대한 발명가들처럼 영감이 불현듯 찾아온 순간이 있었습니다. 어느 여름날 밤, 호숫가에 차를 세워두고 잠시 운전석에 앉아 시간을 보낼 때였습니다. 창문을 열자 선선한 밤바람이 차 안으로 불어들어왔죠.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열린 창문으로 불청객도 들어왔거든요. 모기가 들어와 윙윙거리자, 프레데릭은 짜증이 나서 창을 닫아 버렸습니다. 그러자 차 안은 금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더워졌죠. 창을 열자니 또 모기가 들어올 것같고, 그렇다고 창을 계속 닫고 있자니 더워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이 때에 프레데릭에게 한 영감이 찾아옵니다. 바로 차량용 에어컨을 만들어 팔자는 생각이었죠. 그는 자기 상사이자 파트너인 누메로를 찾아가 자기 아이디어를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걸 만드는 회사는 어디에도 없으니, 분명 성공할 거라고요. 누메로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놀랍게도 누메로는 프레데릭의 아이디어에 대해 시큰둥하게 굴었습니다. 어째서 누메로가 새 아이디어를 받아들이지 않았는지는 모릅니다. 더군다나 당시 회사는 새로운 사업 분야를 찾아야 할 처지였는데도 말이죠. 누메로의 회사에서 개발한 극장용 음향 시스템 설비는 미 중서부 전역에서 팔려 나갔습니다. 곧 선발주자인 웨스팅하우스와 RCA가 그 존재를 의식하게 되죠. 치열한 경쟁과 소송전이 거듭되었습니다. 상대는 미 전역에 먼저 진출한 대기업들이죠. 누메로의 회사가 저렴한 가격과 품질로 승부를 거는 데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누메로에겐 대안이 필요했죠. 프레데릭의 아이디어가 묻히나 싶자, 곧 다른 방향에서 기회가 돌아옵니다. 1983년, 누메로는 골프 친구들과 경기를 하며 친목을 다지고 있었습니다. 개중 한 친구가 우연히 누메로가 듣는 앞에서 불평을 늘어놓죠. '요전번에 시카고에서 닭고기를 잔뜩 사들였는데 말야, 트럭이 길에서 퍼지는 바람에 고기가 다 상해버렸다고.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당시 운송용 냉각 시스템은 초보적이었고 취약했습니다. 트럭의 진동 때문에 민감한 장비는 쉽게 고장났고, 그나마도 차체와 독립된 동력원이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죠. 때문에 육류나 상하기 쉬운 상품을 육지에서 수송하는 데는 한계가 따랐습니다. 누메로는 친구 말을 듣고 농담조로 이렇게 말하죠. '혹시 그 문제, 전문가가 해결 못 하면 까짓거 내가 해 버리지.' 누메로에겐 농담이었지만 친구에겐 아니었습니다. 이제 누메로가 기댈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죠. 자신이 운영하는 영사 기기 회사에서 수석 엔지니어를 맡은 프레데릭 존스가 아니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기껏 제안한 차량용 에어컨 아이디어를 걷어찬 고용주가, 뒤늦게 와서는 세상에 없는 차량용 냉각 설비를 발명해 내라고 합니다. 프레데릭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이 프로젝트를 맡았을까요? 그의 생각이야 어쨌건, 프레데릭은 자신이 맡은 일을 충실히 해냅니다. 1938년 최초의 육상 운반용 냉동장치 모델 A의 특허를 발표하죠. 1938년 발표된 모델 A는 냉각용 핵심 부품이 차체 하단에 설치되었습니다. 이것이 도로 사정에 따라 손상을 입는다는 사실을 알자, 프레데릭은 해당 유닛을 트레일러 상부로 옮깁니다. 무게가 2200파운드나 나갔던 초기 모델도 나중에는 950파운드까지 경량화하죠. 비록 우연히 이뤄진 개발이었지만, 누메로는 이 냉동 트레일러가 곧 자기 미래라고 판단을 내린 모양입니다. 그는 곧 자신이 운영하던 극장 설비 회사 Ultraphone과 보유하고 있던 음향 설비 특허, 티켓 발권 기계 특허를 RCA에 팔아치워 정리해 버립니다. 여기에 자신의 생명보험을 담보로 1만 달러를 빌려 자금을 융통하죠. 이 돈을 가지고 누메로는 몇몇 동업자와 함께 써모컨트롤 컴패니Thermo control company를 설립합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프레데릭이 개발한 냉동 트레일러에 올인한 거죠. 하지만 초기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못했습니다. 이전에도 냉동 트레일러 기술이 여럿 소개된 바 있지만, 사용자들이 원하는 대로 작동한 경우가 아직 없었던 거죠. 누메로는 고민 끝에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냅니다. 육류 포장 체인인 Amour 사와 접촉한 그가 담판을 짓습니다. '저희와 거래하시죠. 처음 트럭 두 대는 아무 비용 청구 없이 설치해 드리겠습니다. 혹시나 우리 장비가 고장나면 그로 인한 모든 손실도 보상해 드리죠. 어떻습니까?' 상대방 입장에선 손해보는 것이 없는 거래였습니다. 상대편 사장은 누메로의 제안을 받아들이죠. 얼마 지나지 않아, Amour 사는 트럭 8대를 추가 구매합니다. 누메로와 프레데릭의 상품이 비로소 시장에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겨우 첫 시작을 끊었지만, 회사 경영은 여전히 순탄치 못했습니다. 거기에 곧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죠. 이때 회사 사장인 누메로는 진지하게 자원 입대를 고민했습니다. 이미 한 번 군대를 다녀왔는데도 말입니다. 마치 그 결심이 허풍이 아니란 듯, 누메로는 지원을 하러 워싱턴 DC로 훌쩍 떠납니다. 그가 모든 것을 걸어 이제 막 반석을 닦아놓은 회사는 다시금 표류할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벤츠의 나라도 벤츠도, 미국 테슬라 편에 서다
독일에서 코로나로 인해 자동차 판매가 감소하자 자동차 구매 보조금을 지원하려고 했는데, 내연기관 자동차의 구매 지원금은 완전히 폐지하고 전기차 구매 보조금을 대폭 올리기로 결정했다는 내용. 현재 독일 대표 자동차회사의 전기차 및 자율주행차기술 수준은 테슬라의 것에 비해서 최소 5 ~ 6년이 뒤쳐져 있다는 평가가 있다. 그리고 독일에서 지난 한 해 가장 많이 팔린 전기차 브랜드는 미국의 테슬라였고, 두 번째는 프랑스 르노였다고 한다. (BMW 3위, 벤츠 11위) 독일에서 이렇게 의사 결정을 했다면 유럽 전역도 마찬가지 결정이 내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유로에서는 독일이 의사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므로) 그리고 조만간 도심으로 내연 기관차의 진입 자체를 막는 일도 생겨날 수 있다. 참고: https://www.vingle.net/posts/3016934 추가적으로 기사의 제목이 '벤츠의 나라, 미국 테슬라 편에 서다'인데 벤츠는 자율주행 방향성을 테슬라 편에서서(5단계의 완전 자율주행이 아닌 테슬라가 개발하고 있는 2단계부터 고도화하는 방향) 개발하기로 한 것 같다. 테슬라와 초기 자율주행을 개발하던 엔비디아랑 손잡고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자율주행 기능을 구현할 것이라고 한다. (근데, 출시 예상년도가 2024년이다... 테슬라가 얼마나 앞서가는지 다시한번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그래서 지금 테슬라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고 있고, 전세계 자동차 업체 중 시총 1위를 차지하고 있는게 아닐까? ㅎㅎ https://n.news.naver.com/article/055/0000825500
[스토리뉴스 더#] 길 위의 공포유발자들…‘선 세게 넘었습니다만’
“횡단보도 신호등에 파란불이 들어와도 곧바로 후다닥 건너지 말고 좌우로 자동차가 오는지 살피세요.” 교통안전에 관해 보호자나 교육기관이 어린이한테 건넬 법한 조언이다. 그런데 여기에 반드시 추가해야 할 게 있다. 두 번 세 번 강조하고 밑줄을 몇 번 쳐도 모자랄. 바로 “오토바이를 주시할 것.” 실제로 어제도 오늘도 아주 많은 오토바이들이 보행자 신호가 켜진 횡단보도 위를 ‘부다다다’ 내달린다. 자신의 신호를 어기고는 행인 사이를 냅다 가로지르는가 하면, 반대편에서 맹렬한 기세로 달려와 보행자를 스치듯 지나쳐서는 방향을 휙 틀어 인도(人道)로 질주하기 일쑤다. 남다른 동선. 장기나 바둑판이었다면 ‘유려한 행마’ 같은 소리를 들었을 법하지만, 이곳은 길 위다. 사람이, 생명들이 오가는 공공의 장소라는 말이다. 시민 안전을 위협한다는 건, 다시 말해 모조리 불법이라는 이야기다. 우선 오토바이가 정지신호를 무시한 채 쌩하고 지나가는 짓은 당연히 위법, 여기에 보행자 옆에서 횡단보도를 함께 달리는 행위도 법규 위반이다. 도로교통법 제27조 제1항에 따르면 이륜자동차, 즉 오토바이는 불가피하게 횡단보도 위를 지나갈 때는 시동을 끄고 내려서 ‘끌고’ 가야 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횡단보도 위를 내달리는 모든 운전자들한테는 범칙금 4만 원에 벌점 10점이 부과돼야 하는 것. 가장 위협적인 인도 질주는 말할 것도 없다. 다니면 안 되는 길 위를 달렸으므로 또한 범칙금 4만 원에 벌점 10점 ‘땅땅’.(도로교통법 제13조 제1항) 특히 인도에서는 사람을 다치게 하면 12대 중과실 ‘보도침범사고’에 속해 교통사고처리특례법에 따라 5년 이하 금고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하루도 안 거르고 만나는 일상적 풍경이 이렇듯 모조리 위험천만한 불법이었던 셈. 자동차들 사이로 요리조리 빠져나와 정지선 저 너머에 안착한 부지런함 역시 아니나 다를까. 정지선 위반, 4만 원짜리다. ‘위험’과 ‘일상’이 한데 엉켜 있다는 아이러니. 더 큰 문제는 오토바이들의 위법이 줄기는커녕 되레 늘고 있다는 것이다. 국토교통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 4월말 기준 교통사고 사망자는 전년 동기 대비 8.4% 감소한 반면, 오토바이 운전자는 131명에서 148명으로 사망자가 13% 증가했다. 정부 당국은 이에 대해 “코로나19 상황으로 배달음식 주문 등이 증가, 오토바이 통행량 자체가 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최근 몇 년 전부터 동네 식당들에 더해 식음료업계 전반, 유통가에 오토바이가 주 운송수단인 플랫폼 시스템은 빠르게 스며들었다. 취업난-재취업난에 시달려온 수많은 20~40대 등이 이 시스템으로 흡수됐음은 물론이다. 한국고용정보원의 추산에 따르면 이들을 포함한 국내 플랫폼 노동자는 50만 명 내외. 코로나19로 배달 건수가 최대치에 달한 지금은 인원이 훨씬 증가했으리라. 단 어디까지 개인사업자 신분, 고용 안정이나 최저임금을 보장받지는 못한다. 그래서 소소한 건당 배달료로 풀칠이라도 하려면 가능한 한 ‘빨리’ 움직여서 ‘많이’ 배달해야 한다, 규정을 일일이 지키면서 다니기 어렵다, 고 그들은 주장한다. 물론 타인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한, ‘참’이 될 수 없는 명제다. 생계를 위해 오토바이에 올라탔고, 한정된 시간 안에 더 바삐 움직여야 하고. 여기에 ‘오토바이니까’, ‘다들 이 정도는 어기니까’ 따위의 느슨한 인식들과 단속 부재가 겹겹이 쌓인 형국, 운전 종사자 및 지켜봐야 할 자들의 마음가짐과 행동거지가 모조리 어떤 ‘선’을 넘어버린 셈이다. 시민 모두의 안전과 운전자 생명이 달린 만큼 대책이 시급하다. 국토교통부를 비롯한 당국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 5월부터는 버스·택시 기사, 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된 1,000명 규모의 ‘이륜차 공익제보단’을 운영하며 신고 활동을 대폭 강화했다. 공공기관과 배달업계, 민간전문가와 머리를 맞대고자 최근에는 ‘이륜차 고통안전 협의회’도 구성했다. 중개업자가 오토바이 운전자에 대해 안전관리 책임을 다하도록 하고, 종사자 보호를 위해 불공정거래 행위 금지·안전장비 대여 등이 규정된 표준계약서도 마련해 배포한다는 계획. 또 도로교통공단과 교통안전공단, 배달앱 업체 간 논의를 거쳐 운전자 교육 콘텐츠와 교육방법 등도 구체화하겠다고 밝혔다. 오토바이를 모는 이들 스스로의 인식 전환이 가장 중요한 만큼 적절한 조치. 단, 교육이수자에 대한 실질적 우대방안은 물론 (세금 투입 교육들의 운명이 늘 그렇듯) 허울뿐인 상부 보고용 ‘짝퉁’ 교육이 되지 않도록 할 지속적인 감시 체계 또한 요구된다. 아울러 인식이 바뀌어도 정작 급하면 몸에 밴 습관이 나오기 십상. 사전 차단과 감시도 좋지만 근본적으로 처벌 수위를 높여 그 가능성을 최대한 줄일 필요가 있겠다. 운전자에 더해 중개업자를 포함한 플랫폼 체계 전반에 책임을 묻는. 터치 한 번이면 끼니 해결이 가능한 시대지만, 그게 시민 다수의 안전을 위협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한 이는 ‘불편한 편리’일 수밖에 없다. 간편함을 즐기되 위험과는 이별하기, 플랫폼 시대에 탑승한 우리의 과제다. 글·구성 : 이성인 기자 silee@ 그래픽 : 홍연택 기자 ythong@ <ⓒ 온라인 경제미디어 뉴스웨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콜드 체인, 세상을 바꾼 냉기의 혁명 (2)
지난 글에선 냉동선의 등장에 대해 잠깐 다뤘습니다. 그 내용을 잠시 보충할까 합니다. 냉동선이 개발되기 전까지, 호주나 남미 등지 국가들은 염장이나 통조림 등으로 가공해 고기를 수출했습니다. 당연히 그 품질은 만족스럽지 않았죠. 양은 양모를 생산하고 남는 고기는 폐기하기가 다반사였습니다. 장기 보존 기술에 대한 특허만도 200여 건이 넘게 쏟아질 정도로 관심도 높았죠. 1800년대 영국은 산업 혁명과 과학 혁명을 겪으며 인구가 폭증하고, 동시에 식량 생산은 원할하지 못한 형편이었습니다. 1850년 2800만인 인구가 1880년 3500만까지 증가합니다. 이 30여 년간 영국내 육류 가격은 두 배 이상 폭증했죠. 이런 추세에 따라 영국의 식민지인 호주와 뉴질랜드에선 소와 양의 사육이 증가합니다. 1851년 소 6만 8천 두, 양 23만 두를 키우던 게, 1880년 소 70만 두, 양 1300만 두로 급증했을 정도로요. 자연히 육류 수송 문제가 각국에서 큰 고민거리가 된 겁니다. 최초 냉동 선박에서 냉매로 채택된 건 암모니아 가스였습니다. 첫 항해는 순탄치 않았지만, 가능성을 본 사람들은 이제 세계 각지에서 고기와 과일을 배에 실어 날랐죠. 호주에선 스트라스레븐 사가 영국으로 고기를 실어 나릅니다. 다른 회사인 뉴질랜드호주랜드 사는 양고기와 돼지고기 500두를 싣고 98일만에 런던에 도착합니다. 그 결과 싣고 온 상품을 현지보다 두 배 이상 이익을 올렸죠. 수익성 있는 사업엔 자연히 투자가 따라붙기 마련입니다. 마토라 호는 냉기 전달 방식을 개선해 에너지 효율을 높였죠. 1890년대에 이르면 선박도 범선에서 증기선으로 바뀝니다. 1902년에 설립된 유나이티드 후르츠 사는 바나나를 운송했는데요. 바로 지난 글에서 자메이카산 바나나를 미국인들에게 소개했던 선원, 로렌조 베이커가 이 회사의 공동 창립자입니다. 냉동선은 과일과 육류로 전 세계를 연결했지만, 다국적 기업과 독재자의 유착 행태를 낳기도 했습니다. 과테말라 독재자 호르헤 유비코는 유나이티드 후르츠 사 등 외국 기업이 자국 농지를 사들여 농장을 여는 것을 허용했고, 이 때문에 자국민 농부들이 이들 외국 기업의 농장에 고용되어 일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1902년은 또 다른 기념비적인 발명이 있었던 해입니다. 바로 윌리스 캐리어가 에어컨의 원리를 발명한 해죠. 처음엔 인쇄소를 위해 이 기술을 발명했다는 얘기는, 빙글에서 이미 다른 분이 올려 주신 바 있죠. 1906년 공기조절장치 특허로 업계에 인정받은 캐리어는, 1915년 여섯 명의 동업자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캐리어 사를 설립합니다. 이게 지금도 우리가 잘 아는 바로 그 캐리어 사죠. 백화점에 설치된 세계 최초 터보 냉동기(1922년), 극장 내에 에어컨 설치(1925년), 20년대 말 발표한 소형 에어컨에 고층건물 냉방 공조 설비 발명(1939년)에 이르기까지, 캐리어는 정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겼습니다. 캐리어 사가 에어컨 기술로 명성을 떨치고, 유사 기술을 가진 업체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아직 이 글의 주인공은 무대에 오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곧 이 두 사람은 캐리어 못지않게 세상을 바꿔놓을 참이죠. 캐리어가 세계 최초 에어컨을 내놓은 후 한참이 지나 1929년, 조셉 누메로라는 한 청년은 곤경에 처해 있었죠. 상당한 엄친아 기질이 있던 그는, 일찌감치 부동산과 제조업, 금융업 등에 뛰어들어 25세가 되자 잠시 은퇴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은 이미 벌 만큼 벌었으니, 못해본 공부를 해보자는 마음이 불현듯 든 거죠. 미네소타 대에 들어가 법학 공부를 한 끝에, 그는 졸업 시험에는 합격합니다. 하지만 이수 학점이 살짝 부족한 게 발목을 잡죠. 설상가상 1929년 대공황으로 미국 주식 시장이 붕괴하면서 그 역시 파산에 이릅니다. 고민 끝에 그는 졸업을 포기하고 학교를 나옵니다. 다시 사업에 뛰어들려던 그에게 한 친구가 좋은 사업 아이템을 소개해 줍니다. 그가 알려준 건 이제 막 대중에 소개되기 시작한 유성 영화 사업이었죠. 당시 업계 선두인 웨스턴 일렉트릭(호손 공장 운영하던 걔네 맞습니다), 그리고 RCA 두 회사는 비싼 영화 장비를 극장에 파는 대신 이를 빌려주고 임대료를 받는 식으로 사업을 운영했습니다. 누메로는 이들 제품보다 덜 비싸고 품질이 나은 극장 설비를 개발한다면 승산이 있겠다고 여겼죠. 그렇게 해서 새 회사인 울트라폰 사운드 시스템 사가 설립됩니다. 야심만만한 누메로에게 가장 필요한 건 실력 있는 기술자였죠. 그 무렵, 미네소타의 Hallock이라는 지역에선 한 재능 있는 영사 기사에 대한 소문이 극장가에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독학으로 기술을 익힌 실력 있는 기사였죠. 게다가 창고에 있는 잡동사니만으로 당대 무성 영화 장비를 유성 영화용으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실력자라나요? 소문을 들은 누메로가 대번에 그를 미니에폴리스에 있던 회사로 초청할 만도 합니다. 하지만 소문난 기술자에겐 한가지 지울 수 없는 흠이 있었습니다. 기술자 프레데릭 존스의 아버지는 아일랜드인이었지만, 어머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죠. 1930년대까지도 미국에서 인종 차별은 극심했습니다. 캔터키 코빙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어머니가 일찌감치 가출해 아버지 손에서 7세까지 자랐습니다. 그가 7세가 되던 해, 아버지는 캔터키의 한 사제에게 보내 버렸죠. 2년 후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그에겐 기댈 곳이 없어졌습니다. 프레데릭은 11살 되던 해 사제에게서 도망쳐 신시내티로 갔죠. 원래 재능이 있었는지, 아니면 부지런히 노력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불과 11세에 홀로 도시로 온 아이는 16세가 되자 이미 신시내티 한 자동차 수리점의 십장이 되었죠. 가게 주인은 자동차 경주에 관심이 많았는데, 프레데릭은 고용주를 위해 경주용 자동차를 디자인하고 개발했습니다. 그 자신도 언젠가 자신만의 경주용 차를 갖는 게 꿈이었죠. 하지만 곧 흑인은 자동차 경주에 나갈 수 없단 걸 알고 맙니다. 상심한 나머지 그는 일을 그만두고 다른 여러 수리공 일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갔죠. 미네소타 Hallock의 한 농장에서 그는 30만 에이커 규모 농장 내 모든 장비를 수선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여기서도 그는 더트용 레이싱 카를 만들 기회가 있었죠. 한발 더 나아가 초기형 설상차를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그에겐 자동차에 남다른 열정과 집착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프레데릭은 기계공, 전기공으로 프랑스에서 복무하다 1919년 귀국합니다. 군대에서 익힌 기술에 폭넓은 관심까지 더해져, 그는 이후로도 잡지 등을 참고하며 독학으로 실력을 쌓습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기회가 찾아오게 되죠. 당시 영화관들은 기존에 설치된 무성 영화 장비를 새 유성 영화 설비로 바꾸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때 영사기사로 일하던 프레데릭이 자기가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나섰죠. 가죽 벨트 부품 등 여러 잡동사니를 이용해 그는 정말로 음향과 영상을 동시 상영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해냅니다. 이후 기술 변화에 따라 그때 그때 적절하게 대응해 준 건 덤이었죠. 막 유성 영화 산업에 뛰어든 누메로에겐 프레데릭 존스야말로 반드시 필요한 인재였습니다. 흑인이라서, 당대 만연한 인종 차별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 누메로의 회사에서 프레데릭은 수석 엔지니어 자리를 꿰차죠. 하지만 누메로도 프레데릭도 새 파트너가 평생을 함께할 사이인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 했을 겁니다. 1991년 조지 부시 대통령은 조셉 누메로와 프레데릭 존스에게 National medal of Technology & Inovation을 헌정합니다. 특히 프레데릭 존스는 이 상을 받은 최초의 흑인으로 기록되었죠. 1930년 두 사람의 만남은 그 정도로 중요했습니다. 조셉 누메로와 프레데릭 존스. 오늘날 우리가 사철 신선한 음식을 마트나 슈퍼마켓, 심지어 온라인 쇼핑몰에서 구할 수 있는 건 바로 이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