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도 이런 드라마가 없다. 홈플레이트에서 두 팀의 승패가 엇갈릴 것이라고 예상한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선발투수들의 기싸움이 이어진 가운데 경기 중후반까지 선취점을 뽑았던 넥센이 주도한 가운데 삼성의 0의 행진은 8회말까지 깨질 기미가 안 보였다. 한 점 차의 팽팽한 승부는 결국 9회말 최형우의 극적인 2타점 역전 끝내기 적시타로 한순간에 뒤집혔고 역사에 남을 드라마 한 편이 만들어졌다.
시리즈 전적 2승 2패, 5차전을 잡는 팀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분위기를 가져갈 수 있어 양 팀 모두 선취점을 얻으려는 의지가 강했다. 그래서인지 소사와 밴덴헐크, 두 외국인선발은 한치의 물러섬없이 쾌투를 펼쳤다. 150km가 넘나드는 빠른 공에 양 팀 타선은 침묵을 지켰고 단기전에선 보기 어려운 1-0 승부의 흐름은 지속되었다.
승리한 삼성으로서도, 패배한 넥센으로서도 5차전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경기이다. 삼성이 만약에 5차전을 내줬다면 무기력한 상태에서 6차전을 소화해야하는 부담스런 상황을 맞이했을텐데 뒤늦게나마 갈증이 풀려 걱정을 조금 덜어냈다. 반면 넥센은 실책으로 시작된 위기가 생각하지도 못한 끝내기 패배로 연결되며 불리한 상태에서 6차전에 필승 의지를 다지는 수밖에 없다.
삼성이 1회말 2사 1루에서 최형우의 안타로 2사 1, 3루의 득점권 기회를 만들었지만 이승엽의 좌익수 뜬공으로 득점이 무산됐다. 이후 2회말 박석민과 김상수의 안타로 다시 한 번 찬스를 맞이했지만 이번에는 나바로의 뜬공 타구를 유한준이 집중력있게 쫓아가면서 잡아내 또 한 번 잔루만 기록하고 공격 기회를 끝냈다.
잡힐 듯한 분위기, 3회말에도 1사 1루 최형우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그런데 이전 이닝에서 좋은 수비를 보여줬던 유한준이 얄궂게도 강한 타구를 다이빙캐치로 포구하며 안타와 1루 주자의 진루를 막았다. 분명 삼성 타자들의 의욕이 넘쳤던 건 사실이지만 넥센 수비진도 침착하게 집중력을 발휘해 선취점을 내주지 않았다.
여기에 상대 선발 소사의 호투에 막혀 이렇다 할 찬스를 만들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넥센은 6회초 박헌도가 선두타자 안타로 출루, 박동원의 희생번트로 1사 2루의 득점권 찬스를 잡았고 서건창의 우전 안타에 2루 주자 박헌도가 홈을 밟아 선취득점을 뽑아냈다. 한 점이었지만 0의 균형이 깨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그런 삼성에게도 찬스가 왔다. 7회초 수비에서 로티노의 병살타가 나오면서부터 뭔가 묘한 분위기가 흘렀고 7회말 1사에서 대타 진갑용이 소사를 상대로 안타를 뽑아내더니 나바로의 볼넷으로 2사 1, 2루 역전 주자까지 출루를 시켰다. 아쉽게도 박한이의 타구가 좌익수 글러브를 향해 잔루를 쌓았지만 넥센 계투진을 공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보였다.
마침내 8회말, 선두타자 채태인의 안타를 시작으로 최형우의 볼넷, 이승엽의 몸에 맞는 공으로 세 타자 연속 출루를 성공해 소사의 바통을 이어받은 조상우를 흔들어놨고 넥센 염경엽 감독은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카드인 손승락을 꺼내들어야만 했다. 투구수가 많아지면 9회말에 부담이 될 수 있었지만 당장 무사 만루의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은 없었다.
무사 만루에서 손승락을 기다린 첫 타자는 박석민. 안 그래도 침묵중이었는데 이번에도 힘없이 타구를 보내 유격수 뜬공으로 물러났다. 1사 만루 박해민의 타석은 1루 땅볼 뒤 3루 주자 포스 아웃으로 아웃카운트만 하나가 더 채워졌고 2사 만루 이흥련마저 2루수 땅볼을 쳐내 8회말 단 1득점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 점 차의 리드는 9회말로 넘어왔다. 첫 타자 김상수가 강정호의 호수비에 막혀 아웃으로 물러났는데 1사에서 나바로의 평범한 땅볼 타구를 강정호의 포구 실수로 송구하지 못하면서 출루가 이뤄졌다. 1사 1루, 박한이가 헛스윙 삼진을 당했지만 채태인이 그냥 당하지 않고 손승락의 빠른 공을 잡아당겨 1, 2루간을 가르는 안타를 만들었다.
2사 1, 3루. 1루에는 발이 느린 채태인을 대신해 김헌곤을 대주자 카드로 투입했다. 어쩌면 최형우의 극적인 안타 이전에는 이 교체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장타가 나올 가능성을 대비해 1루 주자까지 홈으로 불러들이는 시나리오를 계산한 류중일 감독의 현명한 교체였다.
8회부터 마운드에서 힘을 쓴 손승락은 투구수가 20개를 넘어서면서 힘이 떨어졌다.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투피치로만 타자들을 승부하면서 두 구종의 구속 차이를 5~6km 내외로 조절하는 등 적은 구종에도 상대 타자들이 혀를 내둘렀다. 특히 좌타자가 많은 삼성을 상대하기 위한 몸쪽 슬라이더를 주로 구사하며 헛스윙을 이끌었다.
2사 1, 3루에서 타석에 들어선 최형우도 마찬가지였다. 볼카운트 2-2까지 네 개의 공 중 두 개는 바깥쪽으로 일부러 빠지는 공, '보여주기'식 공이었고 초구와 3구째 미트에 빨려들어간 공은 몸쪽 아래 깊숙한 곳으로 형성되었다. 아무리 구속 차이가 적더라도 최형우로선 이미 대기 타석에서 계산을 끝내고 나와 두려울 게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5구째 최형우의 노림수는 몸쪽 아래였다. 직구든 슬라이더든 어차피 타이밍만 비슷하게 따라나가면 정타를 기대해볼 수 있었다. 박동원의 미트를 향한 공은 슬라이더였고 지체없이 최형우는 방망이를 돌렸다. 넥센 1루수 박병호가 잡을 틈도 없이 빠르게 1루 라인을 타고 나간 타구는 외야로 빠져나가 3루 주자 나바로는 물론이고 1루 주자였던 대주자 김헌곤마저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홈을 찍어 경기의 막을 내렸다.
타격감도 워낙 좋았고 3회말에 날린 안타성 타구가 유한준의 호수비로 아쉬움도 가득했는데 한꺼번에 안타 한 개로 풀어냈다. 1루에 나간 채태인 대신 김헌곤이라는 대주자 카드를 꺼내든 류중일 감독의 신의 한 수도 대단했고 '해결사'다운 본능을 제대로 발휘한 최형우의 집중력에도 모든 이들이 넋을 놓고 지켜보았다.
패배한 넥센 선수단은 침울 그 자체였다. 염경엽 감독이 애써 다독여보고 추스렸지만 감출 수 없는 아쉬움에 경기장 밖으로 발을 쉽게 내딜 수 없었다. 역전의 빌미가 된 실책을 범했던 강정호, '투피치'의 한계를 실감한 손승락, '두 번의 멋진 수비'로 넥센팬들을 열광케한 유한준 모두 똑같은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이 날 데일리 MVP로도 선정된 최형우는 "언론 등에서 삼성이 우승하지 못한다는 예상이 많이 흘러나와서 속상했고 섭섭한 면이 많았는데 오늘 그걸 모두 털어낸 것 같다"며 소감을 전했다. 실제로 지난해 한국시리즈에서도 두산의 기적을 예상한 전문가들과 팬들이 적지 않았고 올해에도 넥센의 가을 드라마가 계속 쓰여진다는 예상을 내놓은 야구인들이 많았었다.
역시 경험을 무시할 수 없고 사자군단을 대표하는 최고의 타자다운 안타를 때린 최형우의 말처럼 밖으로 드러난 전력을 비교했을 때 상대팀의 우위를 점칠 수 있더라도 삼성의 가을 DNA만큼 무서운 무기가 없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 한국시리즈 5차전이었다. 홈에서 웃고 울었던 두 팀의 승부, 그리고 길고 길었던 2014 가을야구의 종착지는 6차전이 될 것인가.
[글 = 뚝심의 The Time(blog.naver.com/dbwnstkd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