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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리스트

독일이 낳은 뛰어난 경제학자이며 동시에 비범한 사업가요 열혈 정치가인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자신의 대표작 <정치경제학의 국민적 체계>의 집필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이 책은 1838~1840년 사이에 쓰인 것이다. 그러나 리스트가 보호무역정책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행동에 나선 것은 그보다 20여 년 전인 1818년경이다. 리스트는 여기서 '스미스의 이론'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의 비판은 사실을 스미스와 리카도로 대표되는 영국의 고전학파 경제학의 무역이론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리스트는 자유방임시장에 대한 고전학파의 믿음을 결코 거부하지 않았으며, 단지 보호무역이론을 옹호하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부분만을 수정하려 하였다. 그러면 자유방임시장을 기본적으로 신뢰하면서도 유독 자유무역시장에만은 반대하는 기묘한 자유주의자를 만들어 낸 그의 조국 독일의 실정은 어떠한 것이며 경제학에 민족주의를 도입한 리스트는 어떤 인간인가? 급진적 자유주의자 프리드리히 리스트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 독일 중서부 지방의 뷔르템베르크 왕국 로이트링겐에서 태어났다. 로이트링겐은 신성로마제국이 직할하는 중세의 자유시였으나 1802년 뷔르템베르크 왕국에 합병되어 자유시의 특권을 빼앗긴 도시였다. 리스트가 태어날 무렵 독일은 통일된 민주국가가 아니었다. 그의 조국은 2백63개의 왕국과 61개의 자유도시, 그리고 1천5백여 개의 영주국가로 분열되어 있었다. 나폴레옹은 분열상태의 독일을 손쉽게 점령했다. 전쟁 기간 동안 이 같은 분열상태는 다소간 정리되어 갔다. 그러나 1815년 구성된 독일연방은 아직도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느슨한 연합체에 불과했다. 오스트리아 제국과 프로이센, 바이에른, 작센, 하노버, 뷔르템베르크 등 5개의 왕국, 그리고 중세 이래의 귀족들이 통치하는 29개의 공국이 연방에 가입해 있었다. 독일은 중세 봉건국가의 유산이 강하게 남아있는 후진 농업국가였다. 각 국의 황제와 왕과 귀족들은 중세의 신분제도에 기초한 전제정치를 실시했으며 '융커'라고 하는 낡은 지주계급이 정치 사회 전반을 지배했다. 각 지방의 도시를 중심으로 상공업이 싹트기 시작했지만 인구의 대부분은 농촌에 살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18세기말의 독일 민족은 세 가지 역사적 과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낡은 전제정치로부터 해방되어 시민적 자유와 민주주의를 찾는 일, 상공업의 발전을 통해 중세기 이래의 빈곤에서 벗어나는 일, 그리고 극도의 분열상태를 극복하여 근대적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일이 바로 그 세 가지 역사적 과제였다. 리스트의 아버지는 건실한 피복공으로 넉넉한 살림을 일구었다. 자애로운 어머니는 둘째 아들 프리드리히가 공부도 별로 열심히 하지 않고 아버지의 사업에도 관심이 없어 큰 걱정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열일곱 살이 되자 관리로 출세를 꿈꾸며 행정관청의 서기로 들어감으로써 일단 부모를 안심시켰다. 나폴레옹전쟁이 일어나자 뷔르템베르크는 프랑스 군대에 점령되었다. 비록 점령군이기는 하나 혁명의 이념을 전 유럽에 전파하기 위해 진주한 프랑스 군대를 보면서, 청년 리스트는 자유주의사상과 근대적 관료제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회계와 행정, 정치학과 경제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쌓는 한편 관리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덕분에 빠른 승진을 거듭했다. 전쟁이 끝난 1815년 그는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수도 슈투트가르트 중앙청의 회계관이 되었다. 리스트가 유능한 관리에서 급진적 자유주의 정치가로 변신하는 계기는 1816년에 찾아왔다. 뷔르템베르크 왕 프리드리히 1세가 사망하고 빌헬름 1세가 즉위하면서 시작한 헌법 논쟁이 그것이다. 리스트는 빌헬름 1세의 총애를 받는 개혁 내각 수반에 의해 전격 발탁되어 튀빙겐대학 국가경제학부 교수로 임명되었다. 자유주의적 행정 개혁을 추진할 행정관리의 양성과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러나 자유주의 내각이 무너지고 보수파가 내각을 장악하자 그는 하루아침에 야당의 처지로 밀려났다. 보수파는 신분제도에 기초를 둔 헌법안을 제시했다. 그러자 리스트는 자유주의자들의 견해를 집약한 입헌군주제 헌법안을 제시하고 투쟁을 게시했다. 리스트의 초안은 신앙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무기 휴대권, 직업 선택과 외국 여행의 자유, 영업의 자유와 독점 금지까지 요구하는 급진적인 헌법안이었다. 리스트는 뷔르템부르크 왕국 행정관리들의 전횡과 부패를 혐오했다. 그들이 국민 위에 군림하면서 협잡과 횡포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리스트 자신이 관리들의 횡포로 인해 크나큰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을 위한 군대 징집을 위해 서둘러 결혼을 한 리스트의 형이 징집 면제를 신청하자 담당 관리가 뇌물을 요구했다. 이 요구를 거부하자 그 관리는 까다로운 서류를 떼어 오라고 강요했던 모양이다. 리스트의 형은 그 서류를 받기 위해 슈투트가르트로 말을 타고 갔다. 징집일이 불과 하루 남은 탓으로 너무 서둘러 말을 달린 그는 그만 말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물론 이 일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리스트는 낡은 행정체계와 관리들의 권력 남용을 제거해야만 한다는 굳은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리스트는 <슈바벤 민중의 벗>이라는 신문을 만들어 입헌군주제 헌법의 정당성을 널리 알리려고 노력했다. 뷔르템베르크의 열띤 헌법 논쟁은 독일 전역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불온한 사상의 소유자로 낙인찍혔고 신문은 검열에 걸려 자유롭게 발행할 수 없는 처지에 빠졌다.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행정에 대한 그의 비판을 보면 귀족과 지주들이 화를 낸 것이 당연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공평한 관찰자라면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내부 사정을 보고 우리 조국의 입법과 행 정이 국가의 골수를 갉아먹고 시민적 자유를 박탈하는 근본적인 결함에 빠져 있음 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국민으로부터 동떨어져 있고 또 내각이 장악하고 있는 관료 체제는 국민의 요구와 시민의 생활상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쓸데없는 형식에만 얽매 여 국가행정의 독점만을 주장하며, 시민의 활동을 국가에 유해한 것으로 생각하여 반대하고, 관료적 형식과 계층적 편견을 국가의 최고 지혜라고 찬양하며, 혈연관계나 공통된 이해관계, 동일한 교육과 동일한 편견의 유대를 통해서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어디를 가더라도 위로는 관리로부터 아래로는 사환에 이르기까지 영화와 사치 이외 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 반면 보잘 것 없는 성과, 산업의 정체, 임금의 하락, 세금과 징세인과 경매인에 대한 불만, 불공정한 공무원에 대한 신랄한 불평, 밀고, 관리들의 권력 남용 모두 입법은 공명정대함과 건전성을 잃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세 수입 증대로 통상이 곤란해지고 공업을 방해하고 차별을 조장하고 소송은 비용만 많이 들어 아무 도움이 안 되고 과세는 불공평한, 바꾸어 말하자면 완전히 무계획적인 국가경제체제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행정의 간단하고도 진실한 축도인 것이다. 리스트는 단순한 급진 자유주의자로 머물지 않았다. 1819년 프랑크푸르트에서 결성된 '독일상공연맹'의 법률 고문으로 취임하면서 그는 혁명적 민족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냈다. 독일 각지의 상공업자들이 결성한 이 동맹은 관세동맹을 통해 독일 전역을 하나의 시장으로 결합시키는 운동의 시발점이었다. 리스트는 곧이어 로이트링겐시의 의원으로 선출되어 연방의회에 진출하면서 관세동맹의 실현을 위한 정치활동을 정력적으로 전개했다. 리스트가 독일의 상품 거래에 대한 관세를 폐지함으로써 독일 전역을 하나의 시장으로 묶으려 한 것을 보면 그는 확실히 스미스의 제자이다. 독일 전역을 하나의 자유시장으로 만들고 영업활동에 대한 각종의 규제와 간섭을 철폐시키는 것만이 독일의 산업을 진흥시키고 국부를 증진하는 길이었다. 리스트의 생각은 그가 독일상공인동맹의 전권위원으로서 지지자들의 서명을 받아 연방의회에 제출한 일련의 탄원서에 잘 나타나 있다. 한 나라 안에서 수많은 공장이 문을 닫거나 간신히 유지되었고, 또 정기시와 시장에는 외국 상품이 범람하고 상인들은 대부분 활동 불능상태에 빠졌으니 그 피해가 최악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이 이상 더 상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독일 내에서 38종의 관세와 통과세는 국내 상품의 유통을 마비시켜, 인체에 비유하자면 사지를 결박하여 피가 통하지 않는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함부르크에서 오스트리아로, 또 베를린에서 스위스로 장사를 나가려면 열 종류의 과세와 열 종류의 통과세 관련 법규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되고 또 통과운송세를 열 번씩이나 지불해야 한다. 우리들의 국도는 관세라는 빗장에 의해 차단당하고 우리의 하천은 항해세와 수로세 때문에 운항 불능상태에 빠졌다. 스미스와 리카도의 조국에서는 자연스럽게 발전해 가는 자유방임시장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 문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리스트의 조국은 극심한 정치적 분열상태 때문에 자유방임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없어서 문제가 일어났다. 리스트가 연방의회에서 자유시장이라는 '자연적 자유의 질서'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는 연방의회에서 뿐만 아니라 각종의 간행물을 통해서도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나 국내 관세의 폐지로 정부의 수입 감소를 초래할 것을 걱정한 낡은 지배계급은 리스트의 호소를 묵살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위험한 선동정치가'라는 딱지를 붙여 주었고, 상공인동맹을 '혁명적 결사'로 취급했으며, 그와 동맹의 활동을 '선동적 책동'으로 간주했다. 불온한 사상을 소지한 혐의로 요시찰인 명부에 올라 있던 리스트는 마침내는 "로이트링겐 선거인의 지지를 사칭하여 연방의회에 선동적인 청원서를 낸 혐의"로 의회에서 제명되었고 10개월의 금고형까지 선고받았다. 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공업력의 발달은 세계 지배의 지름길 모든 선지자가 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조국을 위해 봉사하려다 조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그는 프랑스로 건너갔지만 조국을 잊지 못해 다시 돌아왔다. 독일 정부는 그를 구금했다가 미국으로 가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고서야 이 선동정치가를 풀어 주었다. 리스트는 1825년 봄 아내와 네 자녀를 데리고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조국 독일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환영을 받았다. 일찍이 미국의 독립을 돕기 위해 지원병으로 미국독립전쟁에 참가했고, 프랑스 대혁명의 지도자이기도 했던 라파예트 장군은 독일에서 추방당한 이 자유주의자를 미국의 지도적인 정치인들에게 소개시켰다. 미국 정부와 자본가들은 리스트의 보호무역론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우세한 영국의 공업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질 때까지 관세를 높여 국내의 공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그의 견해는 그들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보호관세 논쟁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라파예트 장군이 서명한 여권을 지닌 독일의 경제학 교수' 리스트는 저명인사가 되었다. 그는 또한 독일어 주간지 <아들러>의 편집을 맡아 언론인으로서 영향력도 행사했으며, 미국의 7대 대통령 잭슨이 독일 이민자들의 표를 모을 수 있도록 지원했다. 리스트는 미국시민권을 획득했으며 사업가로도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필라델피아 부근의 질 좋은 탄광을 찾아낸데 이어 몇몇 유지들과 슈쿠길 철도운하회사를 창립함으로써 미국 철도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국을 잊을 수 없었던 그는 잭슨 대통령에게 부탁하여 함부르크 주재 미국 영사의 자격으로 귀국했다. 미국 망명길에 오른 지 5년만의 일이었다. 리스트는 조국에 돌아오자마자 자신이 오랫동안 그려 왔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것은 독일의 산업지역을 철도망으로 연결하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가 제안한 철도부설계획이 너무나 방대한 것이고 독일 국내에는 그를 미워하는 반동적 권력자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이 포부는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1834년 마침내 통일된 관세구역을 설정하는 관세동맹이 성립됨으로써 독일 전역이 하나의 시장으로 결합된 사실이었다. 이로써 독일은 광대한 국내시장이라는 산업화의 기본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정치경제학의 국민적 체계>를 집필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1838년에서 1840년까지 파리에 머물면서 이 책을 집필하는데 몰두했다. <정치경제학의 국민적 체계>는 경제학에 역사와 민족주의를 체계적으로 도입한 최초의, 그리고 훌륭한 저작이다. 그리고 여기서 리스트가 전개한 경제이론은 그가 스미스의 이론에 의심을 품은 동기를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국충정이었다. 리스트는 경제학자이기 이전에 조국의 불안한 미래를 걱정한 우국지사였다. 경제사상의 역사에서 이러한 인물은 매우 희귀하다. 그러면 리스트는 조국의 현실에서 과연 무엇을 걱정하였던가? 광대하고 다양한 자연자원이 매장된 영토를 가진, 그리고 인구가 많고 농업, 공업, 해운업과 국내외 상업을 결합시키고 있는 국민은 단순한 농업국가 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문명화되어 있고 정치적으로 발달되어 있으며 강력하다. 공업은 국내외 상업,해운과 개량된 농업의 기초이며, 따라서 문명과 정치적 세력의 기초이다.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공업력을 독점하여 다른 나라의 경제발전을 억누르는데 성공하여, 그 들이 단지 농산물과 원료만을 생산하든지 필요불가결한 지방공업만을 운영하게 하도 록 억제하는 국민은 반드시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리스트는 공업력을 독점하는 나라가 필연적으로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가능성을 가진 나라로 영국을 지목했다. 물론 이런 경우 독일은 영국의 지배를 받는 2등 국가가 될 것이다. 이리하여 점차 영국을 맹주로 하는 영국계 국가들이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고, 유럽 대륙의 다른 국민들은 미약한 제2급 국민으로서 영국적인 세계 속에 해소되고 말 것이다. 프랑스는 스페인이나 포르투갈과 함께 이 영국적 세계에 최고급 포도주를 공급하면서 자신은 저질 포도주를 마시는 신세가 될 것이다. 프랑스인에게는 기껏해야 화장품 제조 정도가 허용될 것이다. 이 영국적인 세계에서 독일에게 맡겨지는 일은 장난감, 목재, 벽시계, 언어학 서적의 제조나, 때로는 러시아와 아프리카의 황무지에 영국의 상공업 지배권과 언어를 보급하는데 전념하는 지원군의 역할이 고작일 것이다. 아마도 몇 세기가 지나지 않아서, 이 영국적 세계의 사람들은 우리가 아시아의 여러 국 민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들에 대해서 가지는 정도의 존경심만 가지고 독일인이나 프랑스인데 대해 말하게 될 것이다. 참으로 선동적인 문장이다. 독일의 반동적 권력자들이 리스트를 추방한 것은 그의 이러한 능력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리스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너무나 뚜렷하다. 공업생산력에서 뒤진 나라가 앞선 나라와 자유무역을 할 경우 반드시 그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리스트가 고전학파의 무역이론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리스트는 자유무역론을 배격함으로써 스미스의 사상을 제한적으로만 승인했다. 자유방임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거래를 통해 개인의 이기적 욕망 추구를 국부의 증진으로 이끄는 '보이지 않는 손'은 오직 한 나라 안에서만 유효한 것이다. 그러나 리스트가 단순히 자유무역을 반대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비범한 사상가라면 자신의 정책적 견해를 사회 발전의 일반법칙으로 표현하려는 의지와 능력을 갖추고 있는 법이다. 리카도가 곡물법 반대에서 출발하여 비교우위론이라는 일반 이론으로 나아간 것처럼, 리스트는 생산력이론이라는 독특한 이론체계를 정립함으로써 스미스의 '국부론'을 수정하려 했다. 자유무역론은 강대국의 이데올로기 스미스나 리카도는 노동이 부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에 의하면 모든 부는 정신적, 육체적 노동의 산물이며 빈곤은 나태의 결과이다. 그리고 부의 증가는 생산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의 수와 노동의 효율성 또는 생산성에 의해 좌우된다. 리스트는 이것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도대체 노동과 나태의 원인은 무엇이며 생산적인 노동과 효율적인 노동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는 '부의 원인'과 '부 그 자체'는 다르기 때문에 富 그 자체보다는 부를 창조하는 힘, 즉 생산력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리스트는 고전학파가 부와 부의 원인을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잘못을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국민의 부는 교환가치의 소유가 아니라 생산력의 소유에 있다. 그것은 마치 어부의 부가 물고기의 소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얻으려는 욕망을 지속적으로 충족시켜 줄 능력과 수단에 달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학파(영국 고전학파-필자 주)에 의하면 돼지를 사육하는 자는 생산적인데 인간을 교육하는 자는 비생산적이다. 팔기 위하여 피리를 만드는 자는 생산적이고, 가장 위대한 명인까지도-연주를 시장에 반출할 수 없기 때문에-비생산적이다 뉴튼 같은 사람은 당나귀나 말 보다도 덜 생산적이다. 이러한 비판은 일리가 있으나 다소 지나칠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는 그릇된 것이기도 하다. 스미스 역시 교환가치를 낳지는 않지만 인간에게는 유용한 노동이 있음을 인정한 바 있다. 하지만 리스트가 이토록 과격한 비판을 한 데에는 또 그만한 사유가 있다. 그는 당시 독일이 영국에 비해 물질적 부에서 훨씬 뒤져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조만간 영국을 따라잡을 만한 잠재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독일은 세기마다 흑사병이나 기근, 또는 내외의 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곤 했지만 항상 그 생산력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그리하여 독일은 어느 정도 행복한 생활에 도달했다. 그러나 부강했지만 폭군과 사제들이 권력을 좌지우지했던 스페인은 국내에 완전한 평화를 유지하면서도 가난하고 비참한 처지로 전락했다. 국민은 그 생산력을 각 개인의 정신적, 육체적 힘으로부터, 또는 그 사회적, 시민적, 정치적 상태와 제도로부터, 또는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천연자원으로부터, 그리고 그 수중에 있는 자재와 과거의 정신적, 육체적 노력의 물질적 산물(물질적인 농,공,상상업 자본)로부터 끌어내는 것이다. 리스트는 스미스가 특히 '사회적, 시민적, 정치적 생산력'의 중요성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했다고 비판했다. 독일 민족의 우수성에 크나 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던 이 우국지사의 심정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의 조국이 "수중에 있는 자재와 과거의 노력의 물질적 산물", 즉 자본과 기술이 부족한 탓으로 일시적으로 영국에 뒤져 있지만 "그 사회적, 시민적, 정치적 상태와 제도"를 개선하기만 하면 반드시 영국을 따라 잡을 수 있다는 것이 그가 강조한 핵심인 것이다. 리스트가 자유주의적 정치개혁과 관세동맹의 결성을 위해, 그리고 독일의 철도 부설과 상공업의 진흥을 위해 투옥과 추방을 마다않고 투쟁한 것은 바로 이러한 확신에 힘입은 것이었다. 물론 리스트 자신은 이것을 결코 숨기지 않았다. 외국에 예속되지 않은 농업을 보유하고 있으며, 도덕적 소질과 국토의 성질로 보아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그 나라의 공업력을 증식시킬 자격을 충분히 갖춘 국민은, 처음에는 비싸게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공업력밖에 보유하지 못한 탓으로 일시적으로는 많은 가치를 희생시킬 것이다. 그러나 장차 그 국민은 그 영토 안에서 대규모의 분업을 도입하고 농업과 공업 사이의 활발한 교환을 항상적으로 보장함으로써 생산력을 현저하게 증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인 복지의 영속적이고도 급진적인 성장을 의미한다. 이것이 무역보호제도를 변호하기 위해 우리들이 지배적 이론(고전학파의 자유무역론-필자 주)에 반대하는 핵심 이유이다. 리스트의 보호무역론은 이미 산업화를 달성한 경제강국과 이제 막 산업화를 시작하려는 후진국 사이의 무역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등 후발 자본주의국가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예외 없이 보호무역정책을 실시했다. 식민지 종속국의 처지에 있다가 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한 공업화를 이룩한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나라의 산업자본가들이 높은 관세와 수입제한조치의 보호 아래 수많은 특권을 누리면서 자국의 노동자를 착취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자본을 축적한 것을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유치산업 보호를 위한 관세장벽'은 후진국 정부로서는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무역정책이었다. 우국지사 리스트에게 국내의 특정계급에게는 부를, 그리고 다른 계급에게는 고통을 안겨 주는 보호관세의 문제점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값이 비싸고 품질 낮은 국산 공산품을 사용해야 하는 소비 대중의 고통은 머지않아 국민 전체의 생산력 증대에 의해 보상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에게는 오직 집단으로서의 국민, 역사적 운명공동체인 '국민국가'만이 중요했다. 이것은 당시 독일의 상황에서는 절실하게 필요한 사상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공업력 발전이라는 리스트의 간절한 소망이 일단 이룩되자 그의 사상은 무자비한 독재체제를 정당화하고 약소민족에 대한 지배와 수탈을 합리화하는 국가주의적, 국수주의적 독극물로 변용되었다. 이러한 사태는 시대상황의 변화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는 리스트 자신의 책임이기도 하다. 국가의 번영 없이는 개인의 행복도 없다. 리스트의 경제사상을 영국 고전학파의 사상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른바 '국민주의'이다. 리스트는 고전학파가 경제활동의 단위로서 개인만을 중시하면서, 개인을 곧바로 보편적인 인류 사회로 연결시키는 잘못을 범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견해는 분명 타당한 것이다. 스미스나 리카도는 자유방임시장을 '자연적 자유의 질서'라고 불렀는데, 이는 시장의 원리가 모든 나라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라는 인식을 반영했다. 그러나 리스트는 매우 강력하고 효과적인 반론을 전개했다. 개인과 인류 사이에는 국민이 존재하며 그 국민은 독자적인 언어와 학문과 예술, 고유한 역사와 전통, 특유한 풍속, 관습, 법률, 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존재, 독립, 진보, 영속에 대한 요구와 구획된 영토를 보유하고 있다. 그것은 정신과 이익의 무수한 유대를 통해 독자적으로 존립하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어 서로간의 법률을 승인하고, 동시에 현재로서는 아직 자연적 자유를 향유하면서 전체를 구성하는 다른 사회와 대립하며, 따라서 현재의 세계정세에서는 오직 자신의 힘과 방책에 의해서만 자립과 독립을 주장할 수 있는 그러한 사회이다. 인류의 문명은 여러 국민의 문명과 발전을 매개로 할 때에만 생각할 수 있고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의 정치적 분열과 국내 거래를 제약하는 각종 관세의 존재를 개탄한 리스트가 국제무역에서만은 높은 관세장벽을 주장한 것은 일견 모순되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인류 사회의 일원으로서 오직 자신의 이기적 욕구 충족만을 추구하는" 원자화된 개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개인은 보편적인 인류 사회의 일원이기 이전에 한 나라의 국민이다. 경제적 이익이 그의 삶을 지배하는 유일한 욕구가 아니며, 추상적인 인류 사회가 그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는 국민국가의 일원으로서 자기가 속한 나라의 고유한 관습과 문화와 법률과 정치사회적 제도 속에서 살아가며 그것에 의해 자기의 안전과 복지를 보장받을 수 있다. 만일 그가 속한 국민국가가 빈곤과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지거나 다른 국민국가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면 그는 결코 지속적인 안전과 복지를 누릴 수 없다. 리스트가 관세동맹을 추진한 것은 장차 독일 민족이 하나의 국민국가로 통합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국내 거래의 자유화는 국민국가 독일의 국부를 증진시키는 길이다. 거기서는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신뢰해도 좋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거인과 난쟁이, 정상인과 불구자, 문명인과 반문명인, 미개인이 공존하는 불균형 상태"에 있다. 거인과 난쟁이 사이의 자유무역은 난쟁이를 영원히 거인에게 예속시키는 수단이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손'은 지배와 예속이라는 불평등한 질서를 조성한다. 만약 모든 국가가 정상적인 힘을 가지고 하나의 '세계연합'을 결성하여 인류가 모두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결합할 수 있다면, 그 때에는 국민국가 사이의 자유무역이 모두에게 이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리스트는 만민주의의 탈을 쓴 고전학파의 자유무역 이론을 국제사회의 거인, 곧 영국의 이익에 봉사하는 강대국의 이데올로기로 간주했다. 그는 만민주의를 먼 미래의 이상으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역사주의를 가져다 놓았다. 그가 국민주의 경제학을 정립한 것은 "미개의 국민국가를 문명화하고 국민국가를 강대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리스트의 국민주의는 그 역사적 정당성에 못지않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위험성은 "내가 만약 영국인이었다면 아담 스미스 이론의 근본원리를 의심하는 일은 아마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리스트의 고백 속에 처음부터 내포되어 있었다. 그는 국민주의 경제학을 통해 독일 국민을 영국과 대등한 '정상적인 국민'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는데, 그의 '정상적인 국민'은 이런 것이다. 정상적인 국민은 공통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각종 자원이 풍부하고 광대하며 잘 가꾸어진 영토와 많은 인구를 보유한다. 농업․공업․상업과 해양업이 균등하게 발전해 있다. 예술이나 과학, 교육 시설이나 보통 교육은 물질적 생산력과 동등한 수준에 있다. 헌법, 법률과 제도는 그 국민에게 고도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하며, 신앙심과 윤리와 행복을 촉진하다. 한 마디로 시민의 복지를 목적으로 한다. 또한 자립과 독립을 유지하고 외국 무역을 보호하는데 충분한 육․해군을 보유한다. 그 국민은 후진국 국민의 문화에 영향을 주어 자국의 과잉인구와 정신적, 물질적 자본으로 식민지를 건설하고 새로운 국민을 생성하는 힘을 갖추고 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자면 이는 확실히 지나친 주장이다. 리스트는 독일의 부국강병을 달성하기 위해서 강자에게는 보호관세로 대항하고 약자는 식민지로 지배하라는 권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정도에서 멈추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유럽의 세계 지배를 자연법칙의 산물인 것처럼 옹호했다. 국제적, 국민적 분업에 관해서, 지구상에서 자연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는 가장 양호하고 풍부한 생활필수품을 생산하는데 가장 적합한 토지와 육체적, 정신적 긴장에 가장 적합한 기후를 가진 온대의 나라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들 나라는 공업력이 특히 발달하고 그에 따라 국민의 정신적, 사회적 발달과 정치적 세력이 최고 단계에 도달할 뿐만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 뒤떨어진 국민들을 자기의 요구에 맞출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온대의 나라들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국민적분업을 최고 단계까지 완성시켜 국제적 분열을 이용하여 부유해지는데 적합하다. 리스트가 죽은 지 한 세기가 지난 1930년대의 히틀러 정권은 대대적인 '리스트 부흥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리스트는 자기 나라의 역사는 중시하였지만, 다른 나라의 역사까지 중시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영국의 지배를 우려하여 자유무역이론에 반대했지만 그것은 다분히 독일이 그러한 지위를 누리지 못하는데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결코 전세계 국민의 평등한 발전을 갈망했기 때문은 아니었던 것이다. 비극적이지만 차라리 행복한 종말 <정치경제학의 국민적 체계>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것이 리스트에게 정치적 승리를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만년의 리스트는 주로 독일에서 지냈지만 독일연방의 보수적인 정객과 권력자들로부터 여전히 적대시되었다. 그는 몇몇 신문과 잡지의 편집인으로서 대규모의 철도 건설과 보호무역의 실현을 위해 애썼지만 성과는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는 완전한 정치적 명예 회복을 기대했지만 그마저 쉽지가 않았다. 보호무역론자 리스트는 하나의 큰 당파의 중심인물로서 적지 않은 정치적 세력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아무런 공적 지위나 정부와의 관계도 가지지 못한 야인에 불과했다. 영국과의 자유무역으로 피해를 입고 있던 상공업자들은 리스트를 찬양했다. 뷔르템베르크의 국왕도 자기 나라 출신의 이 유명한 학자를 친히 불러 철도문제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그러나 리스트에게 그의 포부를 실현할 수 있을 만한 권한 있는 지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리스트는 프로이센과 벨기에 사이의 또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사이의 무역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몇 번의 긴 여행을 했다. 그 나라의 권력자들은 역시 리스트의 견해를 경청하기는 했으나 책임 있는 자리에 기용하지는 않았다. 1846년 영국 의회는 곡물법을 폐지하고 곡물 수입의 자유화를 선언했다. 리스트는 또 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는 독일산업의 몰락을 회피하기 위한 방책으로 독일과 영국의 정치적 동맹을 구상했다. 물론 동맹의 조건은 영국이 독일의 공업 발전을 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리스트는 대영제국과 독일연방의 동맹에 대한 건의서를 양국 정부에 보내고 직접 런던으로 건너갔다. 적국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런던의 정치인들을 설득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리스트는 참담한 실패만을 맛보고 런던을 떠나야 했다.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건강은 급속하게 악화되었다. 이 열혈 자유주의자요 민족주의자인 우국지사도 계속되는 정치적 좌절과 병마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참담한 비애와 허무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846년 11월 리스트는 건강을 돌보기 위해 휴양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쿠프시타인의 작은 여관에서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며칠간을 여관방에 틀어박혀 지내다가 친구인 콜브 박사 앞으로 편지를 썼다. 나는 절망에 빠졌소, 주여! 저의 가족을 보살펴 주소서. 저의 가족에게 베풀어주신 당신의 자비와 친구들의 친절에 대해 주께서 보상하실 것입니다. 여관을 나선 리스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경찰은 오랜 수색 끝에 숲 속에서 피스톨을 손에 쥔 채 쓰러져 있는 시신을 발견했다. 그 후의 사태 전개를 제대로 예측했더라면 리스트는 그렇게 서둘러 자신의 생을 마감할 필요가 없었을지 모른다. 독일에서는 낡은 토지 귀족들의 전제정치의 폐해와 산업화의 결과로 생겨난 계급투쟁 때문에 리스트가 죽은 직후부터 혁명적 정세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프로이센 왕국의 강력한 군대를 중심으로 한 독일의 낡은 권력은 이러한 위기를 무력으로 해결한 뒤 1870년대에 이르러 강력한 독일국가인 '독일제국'을 건설했다. 그리고 그 이후 리스트의 조국은 단기간에 급속한 공업화를 이루는 한편 뒤늦게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어 마침내는 세계 지배를 향한 행진을 시작했다. 독일 국민은 리스트가 말한 '정상적 국민'이 되었고 '부강한 국민국가'로 결합되었다. 그러나 그가 예언했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은 보장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치시대에 이어 등장한 가혹한 국가주의적 독재정권에 의해 억압과 유혈과 죽음이 흘러넘치는 전쟁터로 내몰렸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리스트가 권총으로 자기 머리를 쏘아 삶을 서둘러 마무리한 것이 꼭 비극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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