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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스러운 LF 쏘나타 하이브리드의 연비 테스트 결과

쏘나타 하이브리드 연비 테스트를 진행 했습니다. 하이브리드는 두 개의 연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메이커에서 꼼수를 부리기도 하는데요 가솔린 연료와 함께 배터리의 잔량도 확인하면서 주행하니 정말 당황스러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공인 연비를 획득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말이죠 자동차 전문 매거진 카홀릭 : http://carholic.net/7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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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차들은 기대를 안하고있기에 실망도 별로 되지않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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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공포에 몰아넣은 가물치 ㄷㄷ
10월 초, 미국 조지아주 그위닛 카운티의 한 연못에서 가물치가 발견되자 주민들은 공포에 벌벌 떨고 있습니다. 현재 가물치는 미국의 토종 물고기를 전부 잡아먹으며 생태계에 심각한 위협을 끼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번에 발견된 가물치는 본래 중국 양쯔강에서 서식하는 종으로 '육지 위에서도 며칠간 살아있을 정도'로 엄청난 생존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조지아주의 야생동물자원부는 주민들에게 가물치를 발견할 경우 바로 잡아 죽일 것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야생동물자원부의 맷 토마스 씨는 낚시꾼들에게 협조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우리의 일차 방어선은 낚시꾼들입니다. 가물치들이 다른 곳으로 확산하지 않도록 낚시꾼들과 힘을 합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야생동물자원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가물치를 발견하거나 잡았을 때의 대처법을 발표했으며,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 절대 방생하지 말 것 - 잡자마자 죽이고, 냉동시킬 것 - 가능하면 사진을 찍을 것 - 가물치가 발견된 위치(GPS 좌표)를 기록할 것 - 즉시 해당 지역의 야생동물자원부에 보고할 것 야생동물자원부는 이번 가물치가 특이한 호흡을 통해 육지에서도 며칠 동안 생존하는 물고기임을 강조하며, 일부 언론은 '가물치를 괴물'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가물치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냈습니다. 한편, 야생동물자원부는 양쯔강에 있어야 할 '괴물 가물치'가 어떻게 조지아주까지 흘러들어왔는지 알 수 없다고 발표하며 미국 생태계 보호를 위해 절대 가물치를 호수나 강에 풀어놓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꼬리스토리가 들려주는 동물 이야기! 빙글 님들 저 진짜 하루 12시간 일 하며 꼬리스토리 동물뉴스 홈페이지 오픈했습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축하해쥬데오ㅠㅠㅠ
타이어 회사 굿이어(Goodyear) 탄생 뒷이야기
... ... <만약 타이어가 없었다면?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 자동차는 볼품없는 마차에 지나지 않았을 겁니다. 자동차 탄생에 필수적이었던 타이어 발명 과정을 살펴봤습니다. 아래는 일본 네이밍 이야기 4회 자동차편의 관련 기사입니다.> 로버트 톰슨-존 던롭 공기압 타이어 발명 스코틀랜드 발명가 로버트 톰슨(Robert William Thomson)이 공기압 타이어를 발명한 건 1845년이다. 자동차 명예의 전당(automotivehalloffame) 자료에 따르면, 가죽으로 둘러싸인 톰슨의 고무튜브는 조악했고 이내 잊혀졌다(but his invention was rather crude–a rubber tube wrapped in leather–and was soon forgotten) 그로부터 공기압 타이어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다시 나오기 까지는 43년이 걸렸다. 우연한 순간에 발명이 이루어졌다. 자동차 명예의 전당은 “1887년 스코틀랜드의 수의사 존 던롭 (John Dunlop)은 아홉 살 짜리 아들 조니가 단단한 고무 바퀴가 달린 세발 자전거를 타며 애를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In 1887, John Dunlop, a practicing veterinary surgeon, watched as his nine year old son Johnny struggled with his tricycle mounted with solid rubber wheels)고 했다. 40년 후 ‘굿이어 타이어 앤 러버 컴퍼니’ 설립 공기압 타이어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 무렵 미국에서는 유명한 타이어 회사가 하나 설립됐다. 굿이어 타이어 앤 러버 컴퍼니(Goodyear Tire and Rubber Company)다. 회사 이름에 굿이어(Goodyear)라는 이름이 붙여진 과정은 흥미롭다. 인터리스팅 엔지니어링 닷컴(Interesting Engineering.com)이라는 글로벌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가황의 아버지 찰스 굿이어’(Charles Goodyear: The Father of Vulcanization)라는 코너가 있다. 영어 불카니제이션(Vulcanization)은 고무에 황을 넣어 강도와 탄성을 증가시키는 가황(加黃)을 말한다. 이 단어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불의 신’ 불칸(Vulcan)에서 따왔다. 그럼, 가황의 아버지 찰스 굿이어는 누굴까. 미국인 발명가 찰스 굿이어(Charles Goodyear:1800~1860)의 본업은 철물점 운영이었다. 그는 30대 이후에 여러 제품에 고무를 사용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의 놀라운 고무 실험이 시작된 건 1834년이다.(His groundbreaking work on rubber would begin with his experimentation in 1834) 우연한 실험에서 더 단단하고 강도 높은 고무 발견 인터리스팅 엔지니어링 닷컴은 “그 5년 후 1839년 우연히 가황의 과정을 발견하게 되었다”(5 years later he would accidentally discover the process known as vulcanization)고 했다. 어느 날 찰스 굿이어는 인도 고무와 황을 섞는 실험을 하다가 실수로 혼합물을 뜨거운 스토브 위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 혼합물이 녹기는커녕 더 강도 높고 단단한 물질이 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견고한 타이어 탄생 순간이었다. 인터리스팅 엔지니어링 닷컴은 “대단한 발견에도 불구하고 찰스 굿이어는 1844년까지 가황고무 특허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했다”(Despite the significance of his discovery, Goodyear would struggle to patent vulcanized rubber until 1844)고 설명했다. 특허 공방전뿐만 아니라 찰스 굿이어는 엄청난 부채와 감옥 수감, 자녀들의 잇단 죽음이 겹치면서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런 그는 1860년 7월 19일 무일푼으로 죽었다. 실제로 많은 빚을 남겼다. 찰스 굿이어 기리는 뜻에서 회사 이름 지어 하지만 가황법을 발견, 고무 산업 개척의 길을 연 찰스 굿이어의 업적은 헛되지 않았다. 그의 사망 40년 후인 1898년, 미국 발명가이자 기업인인 프랭크 세이벌링(Frank Seiberling: 1859~1955)은 굿이어 타이어 앤 러버 컴퍼니(Goodyear Tire and Rubber Company)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인터리스팅 엔지니어링 닷컴은 “창업자 프랭크 세이벌링은 찰스 굿이어를 기리는 뜻에서 회사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했다. 이 매체는 “이름이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찰스 굿이어 자신도 그 가족도 수십억 달러 규모의 이 회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Apart from his namesake neither Charles himself or his family have any connection with this multi-billion dollar company)고 덧붙였다. <에디터 이재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528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닛산은 닛폰산교(日本産業)의 약칭
... <사진= 얼굴 사진은 닛산 창업주 아유카와 요시스케(鮎川義介)> ... 닛산 자동차는 도요타, 혼다차와 다르게 창업자의 이름을 따지 않았다. 지금의 브랜드명 닛산은 ‘닛폰산교’(日本産業)라는 회사의 약칭이다. 아유카와 요시스케(鮎川義介)는 누구? 닛산(日産)자동차는 1933년 12월 도바타주물(戶畑鑄物)을 이끌던 아유카와 요시스케(鮎川義介:1880~1967)라는 이가 설립했다. 이때의 이름은 ‘자동차제조주식회사’이다. 1934년 6월, 통칭 닛산으로 불리는 닛폰산교(日本産業)의 전액 출자를 받아 회사 이름을 닛산자동차주식회사로 바꿨다. 아유카와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도쿄 제국대학 공과 대학을 나온 그는 신분을 속이고 직공으로 일했다. 야마구치 현 야마구치시에서 태어난 그의 집안은 평범하지 않다. 그의 외할머니가 유력 정치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1836-1915, 조선 주재 공사 역임)의 누나다. 아유카와는 1910년 이노우에의 지원을 받아 도바타주물(현 히타치 금속)을 설립했다. 아유카와는 1928년 ‘구하라 광업’이라는 회사를 인수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닛폰산교’라는 지주회사를 만들었다. 아유카와는 닛폰산교를 중심으로 일본광업, 히타치제작소, 일본수산, 닛산자동차를 거느렸다. 신흥 재벌 닛산콘체른(Konzern)이었다. 닛산콘체른의 중심인 닛폰산교는 1937년 만주국으로 이주해서 만주중공업개발로 이름을 바꾸고, 일본과 만주에 걸쳐 콘체른을 형성하려 했다. 당시 아유카와를 만주를 불러들인 이는 현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1896~1987, 56-57대 총리)였다. 일본 상공성의 유능한 관료였던 기시는 만주국의 산업차장으로 발탁돼 1936년 부임했다. 패전으로 닛산콘체른 해체...닛산자동차 독립 당시 만주에서 일했던 기시 노부스케, 아유카와 요시스케, 남만주철도(만철) 사장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세 사람을 ‘만주의 3스케’로 부른다. 아유카와의 닛산콘체른 야망은 태평양 전쟁 패전으로 좌절됐다. 전후 연합국에 의해 콘체른이 해체되면서 닛산자동차가 독립했다. 이후 닛산은 1966년 스포츠카를 만들던 프린스자동차와 합병하면서 기술력을 한층 더 높였다. ‘판매의 도요타, 기술의 닛산’이라는 말은 이런 이유 때문에 나왔다. 1966년 닛산은 써니...도요타는 코롤라 출시 닛산은 1966년 2월 기존 ‘블루버드’를 대체할 신형 대중차 써니(Sunny)를 출시했다. 그해 10월 도요타의 코롤라(Corolla)도 세상에 나왔다. 코롤라는 라틴어로 ‘화관’(花冠)을 뜻한다. 당시 도요타는 라이벌 닛산의 써니를 의식, 코롤라의 배기량을 갑자기 바꾸면서 신형 엔진 코드에 Z자를 새겨 넣었다. Z는 러일전쟁에서 연합 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가 발틱 함대를 격파했을 때 걸었던 깃발을 상징한다. 도요타의 ‘타도 닛산’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자동차공업회(JAMA:Japan Automobile Manufacturers Association)는 도요타와 닛산이 경쟁을 벌이던 1966년 그해를 일본 ‘마이 카’ 시대의 원년(The first year of My Car)이라고 표현한다. 아유카와는 태평양 전쟁 이후 어떻게 됐을까. 그는 닛산그룹 각사의 출자를 받아 ‘중소기업 조성위원회’라는 걸 만들어 중소기업 진흥에 힘썼다. 말년까지 정치인(참의원)으로 살다 1967년 사망했다. <에디터 김재현>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525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지구 미니어처로 살펴보는 문명
NASA의 자료를 바탕으로 Anton Balazh라는 그래픽 아티스트가 만들어낸 형상들이다. 기존 지형도들이 수직적인 높이가 부족해 지형을 알아보기가 힘들어 해발 고도를 몇 배 더 높여서 지형을 체감시켜주는 지도다. 남미 칠레의 척박한 환경을 나타내는 안데스 산맥이 남미 서해안선을 따라 높이 솟아있다. 세계 3대 옥토라고 불릴 정도로 크나큰 농업, 목축 생산을 보여주는 아르헨티나의 팜파스 지대가 펼쳐져 있다. 미국 서부와 멕시코 상부. 왼쪽 산지들 사이에 움푹 들어간 산지가 바로 캘리포니아주다. 그 아래 작은 섬들 네다섯 개와 면해있는 곳이 로스앤젤레스. 북쪽에서 내려오는 산맥이 로키 산맥이고, 가운데 떨어져 있는 산지들이 유명한 옐로우스톤이다. 알래스카의 모습. 아래로 길게 이어진 열도가 바로 알류산 열도. 미국이 애치슨 라인을 설정할 때 알류산으로부터 기준을 잡았고,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는 결과를 낳았다.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의 북유럽 지역. 스칸디나비아 산맥의 척박한 지형과 추운 기후를 통해 바이킹들이 왜 배를 타고 약탈하러 다녔는지 알 수 있다. 프랑스의 국력의 원천이 된 프랑스의 드넓은 평야 지대가 눈에 띄고 '피레네 이남은 아프리카'라는 말을 나폴레옹이 남기게 한 범인인 피레네 산맥은 스페인과 프랑스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실제로 스페인은 유럽 중앙에 얽힌 역사보다는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과 싸우는 역사가 더 길었다. 아래쪽에는 아프리카의 아틀라스 산맥과 스페인 남부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이어지다 끊긴듯이 떨어져 있다. 실제로 저곳은 지중해의 출구 역할을 하는 중요한 요충지이기 때문에, 영국이 점령한 뒤 내어주지 않고 있다. 이탈리아 경제의 중심이 왜 북부인지 알 수 있는 사진. 이탈리아의 아펜니노 산맥이 급격하게 우회하며 알프스 산맥과 이어져 있고,  그 사이의 평지에 밀라노나 베네치아 같은 대도시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다. 오른쪽 상단에 물음표 모양으로 분지를 만들고 있는 산맥은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1차대전, 2차대전을 통해 헝가리의 영토는 줄어들었지만 과거 카르파티아 산맥이 감싸고 있는 저 평원은 온전히 모두 헝가리 왕국의 땅이었다. 소아시아라고 불리기도 하는 유럽 역사에 중요한 장소, 아나톨리아 반도다. 옹기종기 섬들이 모여있는 바다가 에게해이고 그 기준으로 왼쪽이 현재의 그리스이고, 오른쪽의 아나톨리아 반도가 현재의 터키다. 사진에서 보이듯이 그리스와 아나톨리아는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는 요충지였고 그렇기 때문에 비잔티움(동로마), 셀주크 튀르크, 오스만 제국 등 수만은 대제국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아나톨리아와 그리스가 이어지는 부분에 있는 도시가 바로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이다. 오른쪽의 사막지대가 기독교의 발상지인 레반트 지역이다. 가운데 아래쪽에는 가장 오래된 문명인 이집트 문명을 키운 원동력. 비옥한 나일강 삼각주가 보인다. 아래쪽 페르시아만을 기준으로 아래쪽은 사우디 아라비아, 위쪽은 이란이다. 이란고원은 과거 페르시아 제국이 융성했던 지역으로 대부분의 땅이 고원지형이다. 아나톨리아/이집트/메소포타미아/이란 등 페르시아는 다양한 문명을 정복하며 최초의 세계제국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한 이란 고원의 위쪽에는 세계 최대의 호수 카스피해가 있다. 카스피해 왼쪽의 직선 산맥은 캅카스 산맥으로 러시아와 서아시아를 구분하는 장벽이 된다. UFC 파이터 하빕의 고향도 캅카스이고,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도 캅카스 출신이다. 인도다. 인도 남부의 넓은 고원은 데칸고원이다. 데칸 고원 위로 펼쳐진 넓디 넓은 평야는 힌두스탄 평원으로, 현재에도 대도시들의 다수가 저기에 있고 과거 인도의 대제국들도 저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힌두스탄 위쪽의 장막처럼 펼쳐진 산맥이 바로 난공불락의 히말라야 산맥이고 그 너머로 펼쳐진 높은 고원은 바로 티베트 고원이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중국와 인도라는 바로 옆에 위치한 거대한 문화권이 섞이지 않고 유지될 수 있게 해주었다. 아래쪽에 테즈메니아 섬이 있고, 그위로 호주 본토에는 동해안을 따라 산지가 펼쳐져 있는데 그 산지를 따라 브리즈번, 맬버른, 캔버라, 시드니 등 호주의 대도시들이 죽 이어진다. 호주의 드넓은 대천정 분지와 사막이 보인다. 실제로 호주 인구인 2400만 명 중 98%가 동서 해안의 대도시에 거주하고, 드넓은 사막에는 단 2%만이 산다. 뉴질랜드다. 남섬의 척박한 산지와 빙하지형이 보인다. 만년설로 뒤덮힌 산지가 서던 알프스 산맥이다. 인도와 중국의 사이에 위치한 인도차이나 반도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미얀마 등 우리가 아는 동남아다. 동쪽 해안선을 따라 쭉뻗은 산맥은 베트남과 라오스를 구분해주는 안남 산맥이고, 서쪽에는 미얀마의 지붕 아라칸 산맥이 뻗어있다. 중국이다. 오른쪽 위의 드넓은 평야가 바로 중원. 수천년 동안 사람들이 살면서 전쟁과 농사 등으로 지력을 다써버리고 기후 변화 등으로 황하강의 농업 생산량은 현재 매우 낙후된 상태지만 당시 황하강 유역의 중원은 고대 중국에서 물량을 사기급으로 뽑아내던 지역이다. 한국과 일본은 대다수가 산지인데, 일본은 도쿄지역에 칸토평야를 가지고 있다. 왼쪽 저멀리 위쪽에 보이는 사막이 황사의 근원지인 고비사막이다. 한반도 위쪽에는 만주벌판이 자리잡고 있는데, 러시아 연해주와 맞닿아 있는 오른쪽의 분지는 삼강평원으로, 오늘날 동북삼성의 최고 곡창지대이다. 출처 에펨코리아 이런거 보면 지형이 국력을 만드는게 사실인 것 같다 과거에 두발로 쳐들어가서 전쟁하던 시대에는 결국 지형, 기후가 승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으니까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은듯
창업 가문은 도요다...회사는 도요타
... <사진= 작은 사진은 도요타의 실질적 창업자인 도요타 기이치로.> ... 도요타(TOYOTA)자동차도 혼다차와 마찬가지로 창업주의 이름을 회사명으로 쓰고 있다. 하지만 도요타차는 사정이 좀 다르다. 창업 초기, 브랜드명이 도요타(TOYOTA:トヨタ)가 아닌 도요다(TOYODA:トヨダ)였다는 걸 알고 있는가? 창업 가문의 성(豊田)은 도요다(トヨダ, とよだ)라고 읽는다. 창업의 토대를 마련한 도요다 사키치(豊田佐吉:とよだ さきち)와 실질적 창업주인 그의 아들 도요다 기이치로(豊田喜一郞:とよだ きいちろう)가 그렇다. 그래서 처음에는 창업 가문의 성을 따서 도요다(トヨダ)라고 했다. 영문명도 TOYODA가 됐다. 창업 당시인 1935년 7월 TOYODA로 상표등록을 했다. 1년 뒤인 1936년 도요타 최초의 양산형 승용차 AA형엔 알파벳 TOYODA 엠블럼이 장착됐다. 하지만 미국 수출을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TOYODA 발음이 문제였다. 창업자 도요다 기이치로는 외국인이 영어 회사명을 발음하기 어렵다고 해서 TOYOTA(トヨタ)로 바꾸도록 지시했다.(아사히신문 특별 취재반 저 ‘도요타시 1번지’) 도요다에서 도요타로 바꾼 이유 도요타 사사(社史)에 따르면, TOYODA(トヨダ)에서 TOYOTA(トヨタ)로 바꾼 다른 이유 3가지가 더 있다. ①‘상업,미술적으로 봐서 촉음을 붙이지 않는 것이 상쾌하고, 말의 음색(소리의 울림)도 좋다(商業美術的に見て、濁点を付けないほうが、さわやかであり、言葉の調子(音の響き)も良い)는 것이다. 또 ②일본어 도요타(トヨタ)의 획수가 8이라 재수가 좋다.(画数が8で縁起が良い)는 점도 작용했다. 끝으로 ③도요다라는 (가문의) 이름에서 멀어지게 돼, 개인 기업에서 사회 존재로의 발전적 의미를 담고 있다.(トヨダ<豊田>という人名から離れることにより、個人的企業から社会的存在への発展の意味を含める)고 한다. 그렇게 자동차는 도요타(トヨタ)가 정식명칭이 됐다. 그럼, 도요타가 진출해 있는 도시 풍전시(豊田市)는 도요타라고 읽을까, 아니면 도요다라고 읽을까. 도요타(トヨタ)로 읽는다. 고로모시가 도요타시로 ‘상전벽해 ’ 도요타차가 훗날 도요타시가 되는 고로모쵸(擧母町, 이후 고로모시)에 공장을 짓고 진출한 것은 1938년이다. 이 지역은 원래 양잠업이 번성했다. 1959년 1월, 고로모시 당국은 도요타차의 회사명을 그대로 시 이름으로 삼았고 도요타 본사의 소재지에 ‘도요타시 도요타쵸 1번지’라는 행정상의 선물까지 안겨줬다. 물론 ‘고로모’라는 이름을 지키자는 의견도 상당수였다고 한다 도요타차의 본거지인 도요타시는 이후 인구가 종전보다 3배 가량 늘어나는 등 크게 발전했다. 양잠업을 하던 그 시골 동네는 이름 그대로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된 것이다. . 도요타차의 뿌리는 자동직기를 만드는 등 ‘발명왕’이라 불린 도요다 사키치(1867~1930)에서 출발한다. 자동직기에서 자동차로 사업 영역을 바꾼 것은 장남인 도요다 기이치로(1894~1952)였다. 도요다 사키치~도요다 아키오로 이어져 기이치로는 1929년 아버지와 개발한 자동직기 특허를 당시 세계 최대였던 영국 직기회사에 10만 파운드(당시의 100만엔)에 팔았다. 이를 자본으로 1933년 도요타자동직기제작소 내에 ‘자동차부’가 만들어졌다. 도요타차의 탄생이다. 회사는 1937년 8월, 현재의 이름인 ‘도요타자동차주식회사’가 되었다. 창업 가문은 도요다 사키치(豊田佐吉), 도요다 기이치로(豊田喜一郞), 도요다 쇼이치로(豊田章一郞)를 거쳐 현 회장 겸 사장인 도요다 아키오(豊田章男)로 이어진다. 참고로 도요타의 주력 차종 렉서스(LEXUS)는 독일어 LUXUS(사치, 일류를 뜻함)에서 만든 조어다. LEXUS는 6개 후보작(차종명) 중에서 2위에 올랐다. 하지만 고급스러움이 느껴지고, L과 X가 들어간 5문자는 발음하기 좋으며, 기억하기 쉽다는 이유로 최종적으로 선택됐다. 1986년 10월의 일이다. (하세가와 요조 저 '렉서스, 도요타의 도전') <에디터 이재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524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창업자 데릴사위가 키운 스즈키 자동차
... 스즈키 자동차의 1대 창업주 스즈키 미치로(얼굴 사진). ... 은행원 하다가 오너 집안에 장가들어 마츠다 오사무(松田修)라는 사람이 있었다. 기후현 태생으로 주오대(中央大) 법학과를 졸업한 그는 은행에 첫 발을 들여놓으면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대학 졸업 5년 후인 1958년, 은행원이던 그의 인생에 일대 큰 변화가 찾아왔다. 스즈키 자동차 실질적 창업주 스즈키 슌조(鈴木俊三)의 데릴사위가 된 것이다. 마츠다 오사무는 스즈키 슌조의 장녀와 결혼해 양자가 됐고, 그의 이름은 마츠다 오사무(松田修)에서 스즈키 오사무(鈴木修)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 또 다른 큰 변화가 닥친 것은 1977년 무렵이다. <1977년에 창업자인 스즈키 미치오와 2대 회장인 스즈키 슌조, 3대 회장인 스즈키 지츠지로 등의 경영자가 잇따라 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데릴사위인 내 어깨에 회사의 운명이 지워진 절박한 순간도 있었다.>(스즈키 오사무 저 ‘작아서 더 강한기업 스즈키’(김소운 옮김, 리더스북) 전현직 동시에 쓰러지면서 사장 자리 올라 전임, 현직 CEO가 동시에 쓰러지면서 스즈키 오사무는 순식간에 사장 자리를 맡았다. 입사 20년이 지난 1978년의 일이다. 닛케이비즈(2009년 3월 2일)는 당시 스즈키 오사무의 심정을 이렇게 보도했다. <“아, 내가 사장이야”- 스즈키 오사무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등골이 오싹한 생각에 사로잡혀, 이불에서 벌떡 일어났다. 쉴 때도 사장이라는 무게감이 덮쳤다.> 스즈키 자동차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스즈키 오사무(鈴木修‧87) 회장은 이렇게 큰 변화를 두 번 겪었다. 그는 경차의 대명사인 스즈키를 ‘위대한 중소기업’(偉大な中小企業)으로 키워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스즈키 오사무는 2000년부터 회장을 맡고 있다. 스즈키의 차는 차체만 작을 뿐, 회사는 이제 더 이상 중소기업이 아닌 대기업의 반열에 올라 있다. 스즈키자동차의 슬로건은 ‘작게(小), 적게(少), 가볍게(輕), 짧게(短), 아름답게’(美)이다. 경차는 이익을 남기기가 어렵기 때문에 생산원가 절감이 생명이다. 오사무 회장은 공장 바닥에 나사 하나가 떨어져 있으면 “공장 바닥에 돈이 떨어져 있다”며 한 푼의 돈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즈키의 효자 상품은 알토(Alto:라틴어로 높다는 뜻의 altus에서 따왔다)다. 오사무의 사장 취임 직후인 1979년 첫 출시된 알토는 오랜 기간 인기를 끈 스즈키의 주역이다. 알토는 한국 대우자동차의 티코 모델이기도 하다. 스즈키 집안은 방직기계로 출발 스즈키 자동차는 창업주 이름에서 비롯됐지만, 처음부터 자동차업으로 출발한 것은 아니다. 목화 농부 집안에서 태어난 스즈키 미치오(鈴木道雄:1887~1982)가 스즈키 방직기계(주)를 설립한 건 1920년이다. 그의 아들 스즈키 슌조(鈴木俊三)는 모터가 달린 자전거를 내놓으면서 업종을 변경했다. 1954년 ‘스즈키자동차공업’으로 회사명을 바꾸고 스포츠바이크와 경차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붉은 S자 로고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 1958년부터다. 1990년 10월에는 현재의 스즈키로 사명을 바꿨다. “우물을 파려면 제일 먼저 파야 한다” 스즈키의 역사에서 인도 진출을 빼놓을 순 없다. 오사무 회장은 “우물을 파려면 제일 먼저 파야 한다”며 일본 자동차 메이커 중 가장 먼저 인도 시장에 눈떴다. 그가 사장 4년차이던 1982년(당시 52세), 스즈키는 자동차 기업으로서는 일본에서 꼴찌였다. 그래서 그는 “국내에서 1등하기 어렵다면 해외에서 하자”고 마음 먹었다. 모두가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인도 시장 진출 선언이었다. 인도 정부와 공동으로 합작사‘ 마루티 우도요그’(Maruti Udyog)를 설립, 이후 자회사로 만들었다. 2007년에는 ‘스즈키 마루티 인디아’로 회사명을 변경했다. 마루티는 인도에서는 ‘국민차’로 불린다. 스즈키는 한때 인도 시장 점유율 70%를 웃돌기도 했지만, 현재는 50%대를 유지하고 있다. <에디터 김재현>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527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