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하고 졸렸다. 창 밖으로 보이는 햇살은 평소보다 포근하게 느껴졌고, 모래 언덕을 지나는 낙타의 행렬은 졸음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졸음을 몰아내려고 에스프레소를 단숨에 마셔도 보고 스트레칭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의식의 끈을 놓치려는 바로 그때, 카운터에 비스듬이 기대어 서서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제럴드씨, 현상과 기호에 대해 아십니까?"
"네?"
깜짝 놀란 제럴드는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남자의 손에 들린 유리잔이 햇빛에 반짝였고, 각진 얼음이 잘그락 소리를 내며 유리벽에 부딪혔다. 남자는 고개를 살짝 돌려 제럴드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물었다.
"현상과 기호요."
"현상과 기호?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그는 다시 말없이 유리잔에 든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창 밖을 주시했다. 제럴드는 남자가 말한 현상과 기호란 단어를 생각해 보았지만 이내 생각하기를 그만 두었다. 다시 졸음이 밀려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제가 현상과 기호에 대해 물었었죠?"
한동안 말이 없던 남자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유리잔에 얼음만 덩그러니 남았을 무렵이었다. 남자는 등을 돌려 제럴드를 마주하고는 티슈를 뽑아 가지런히 카운터에 펼쳤고, 얼음 하나를 유리잔에서 꺼내어 그 티슈 위에 올렸다. 이런 그의 행동이 조금 의아했지만 제럴드는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여길 잘 보세요.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죠. 이걸 현상이라 합니다."
남자는 손 끝으로 얼음을 가리켰다. 그리고 곧장 메모지를 한 장 뽑고는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라는 글자를 적었다.
"그리고 이것은 현상을 한글이란 기호로 표현한 것입니다. 어때요? 대충 이해하시겠어요?"
제럴드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현상을 나타내는 기호가 여러 가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를 ‘H2O(s) ->H2O(l)’로 나타낼 수도 있죠. 여기서 혼동이 생깁니다. 만약, 제럴드씨가 한글은 알고 있지만 화학식은 모른다고 가정해보죠. 그리고 제가 얼음이 녹아 물이 된다는 현상을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라고 말하지 않고, ‘H2O(s) ->H2O(l)’라고 말을 한다면 제럴드씨는 제가 무슨 말을 한건지 알 수 있을까요?"
"아뇨. 알 수 없죠."
"그렇다면 제럴드씨는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는 현상을 모르는 걸까요?"
"그건 아니죠. 화학식이란 기호를 모르는 것일 뿐, 현상 자체를 모른다고는 할 수 없죠."
"맞아요. 하지만 최근들어 사람들은 현상보다는 기호를 우선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이 그것이죠. 잘 생각해보세요.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그 두근거림, 벅참, 애틋함 등에 중점을 두지 않아요. 오직 기호에 중점을 두죠."
그는 얼음이 녹은 물로 목을 축였다.
"물론 모든 기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참을 수 없는 것은 사랑의 본질을 갉아 먹는 기호들이에요. '사랑합니다.' 이 다섯 글자로 사랑을 전하는 것보다 몇 백만원하는 명품백으로 사랑을 전하는 것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이 현실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에요. 참으로......"
그 말을 끝으로 남자의 시선은 다시 창 밖으로 향했다. 제럴드 역시 남자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몇 분 전만해도 맑았던 날씨는 온데간데 보이지 않았다. 낙타의 긴 행렬은 사리지고 검은 먹구름이 모래 언덕을 지나고 있었다. 침묵은 제법 오랜 시간 계속 되었다......
"한바탕 쏟아지겠네요."
침묵을 깬 남자는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고는 카페를 떠났다. 그의 낮은 목소리는 긴 여운을 남기며 한동안 카페를 맴돌았고, 제럴드는 또 다시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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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 잔. 현상과 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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