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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 무문관, 나와 마주 서는 48개의 질문

http://blog.naver.com/sniperhu/220058099698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빙그레'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위해 의대에 진학했다. 남들은 명문대 의대생라고 그를 부러워했지만, 정작 스스로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 한구석에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텅 빈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 빈칸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오랫동안 방황하며 고민하던 그는 결국 답을 알아낸다. 빈칸을 채울 수 있는 건, 아버지의 꿈이 아니라 자신의 꿈이란걸... 그의 꿈은 '음악가'다. 그는 아버지 몰래 학교를 휴학한 후,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음악동아리에 가입하기도 하고, 대학가요제에 출전하기도 하면서 조금씩 빈칸을 채워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빙그레'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되는 마음에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아버지의 꿈을 외면했다는 죄책감에 아버지를 마주할 용기가 선뜻 나지 않았다. 쉽사리 병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동안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자식이 서울에서 제일 좋은 의대를 다닌다."라고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듣게 됐다. 그 순간 그는 의대 공부를 계속해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었다.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그는 공부를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꿈을 포기하고 그는 의사가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빙그레가 의사가 되는 게 당연한 거다. 의사가 되는 걸 포기하고, 음악가가 된다면 그야말로 비상식적인 일이다. 미래가 보장돼 있는데, 사서 고생하는 건 미친 짓이 아닌가? 게다가 가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의사를 포기하는 건, 가족을 배신하는 일과 같다. 그러니 당연히 의사가 되는 게 상식적인 일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비상식적으로 행동하길 바랐다.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길 바랐다. 빈칸을 채우지 못 하고 아버지의 기대에 따라 의사가 된 그는 행복했을까? 행복했을지 아닐지는 잘 모르겠지만, 후회는 적잖이 했을 듯 하다. (아니면 자기합리화를 엄청 했든가.) 이런 이야기는 드라마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주위를 둘러보면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남들 다 가니까 덩달아 대학교에 들어가는 사람,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하는 사람, 남들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사는 사람,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포기한 사람 등. 이런 이야기는 셀 수 없이 많다. ​ 왜 사람들은 자신의 뜻대로 살지 못 할까? 타인의 평가에 일희일비하고,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가면'을 쓰고, 타인에게 굽신거리고, 타인의 가치관에 맞추면서 살아갈까? 이유는 단순하다. '상식'의 틀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상식이란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공통의 지식'을 뜻한다. 그러니 상식적인 사람이란,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공통의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다시 말해 자신만의 삶을 살지 못 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사는 사람을 말한다. 이들은 남들과 비슷하게 살기 위해서, 남들의 눈치를 보며 산다. 남과 다른 자신만의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상식을 넘어서야 한다. 하지만 이미 '상식의 노예'가 되버렸는데, 어떻게 벗어난단 말인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화두(話頭)'를 풀어보면 된다. 화두란,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결코 해결할 길이 없는 딜레마나 역설고 가득 차 있는 물음을 말한다. 그러니까, '잠옷을 입고 실내에 있을 수도 없고 실외로 나갈 수도 없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는가?'와 같이 상식적으로는 풀 수 없는 물음이 바로 화두다. ​이런 화두들이 한 두개도 아니고 48개나 들어있는 책이 있다. 강신주 박사의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이다. 강신주 박사가 선불교 철학과 서양철학을 이용해서, '무문관(無門關, 1228년)'에 나오는 48개 화두를 풀이한 책이다. 책의 제목부터가 굉장한 화두다. 무문관이라니? ​무문관(無門關)은 문이 없는 관문을 뜻한다. 이게 말이 되는가? 관문이라는 말 자체가, 특정한 하나의 문을 말한다. 그러므로 무문관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관문이다. 대체 이 관문을 어떻게 통과하란 말인가? 이곳은 '문'을 찾으려는 상식적인 사람은 절대 통과할 수 없다. 무문관은 상식을 넘어서는 방법으로만 통과할 수 있다.​ 상식을 넘어선다는 것은 자신만의 삶을 영위하는 것, 오직 나이기에 살아 낼 수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무문관은 타인에게 구속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만 통과할 수 있다.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에는 48개의 화두를 푸는 사람들의 이야기, 다시 말해 48개의 무문관을 통과하는 스님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이 무문관을 통과하는 모습을 보면 기가 막힌다. 어린 동자승의 손가락을 자르는 스님, 살계를 어기고 고양이를 칼로 베는 스님, 부처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똥 막대기'라고 말하는 스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이라고 말하는 스님, 스승에게 귓방맹이를 날리는 스님 등. 상식적으로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 투성이다.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유일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자비로우며,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다. 나도 그들처럼 살고 싶다. 그간 나는 타인이 만들어 놓은 문을 통과하며 살았다. 내 의지대로 살았던 적이 별로 없다.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대학에 갔고, 남들만큼 먹고살기 위해 스펙을 쌓았다. 그간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타인이었다. 이제는 타인의 눈치룰 보지 않고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고 싶다. 매달린 절벽에서 내 의지로 손을 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http://blog.naver.com/sniperhu/220058099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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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에서 [랑종]까지 - 신은 대체 뭘 하고 있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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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시간, 템플 스테이
어느덧 2015년도 연말로 달려가고 있는 11월의 중순. 지난 1년을 어떻게 지내왔는지 되돌아보며 생각이 많이지는 시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템플스테이를 소개합니다. 1. 1000년의 역사, 진관사 서울에 위치한 템플스테이 사찰로 고려시대 지어져 10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진관사는 전통을 중시하는 ‘사찰음식’이 유명합니다. 진관사는 다양한 당일 프로그램과 1박2일부터 4박5일까지 산사에 머물 수 있는 [마음의 정원] 휴식·체험 맞춤형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답니다. * 위치: 서울시 은평구 진관길 73 * 문의: 02-388-7999 * 홈페이지: http://jinkwansa.templestay.com/ 2. 뛰놀고 싶은 아이들을 위한 심원사 가야산 동쪽 자락에 위치한 심원사의 템플스테이는 느릿느릿 거북이도 쉬어간다 해 ‘거북이 템플스테이’라 불리기도 하는데요. 특히 미취학 아동부터 고3 학생까지 청소년만 참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어 특별함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1박2일과 2박3일 일정의 두 가지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검정고무신 동심체험’은 쉼 없는 공부에 지친 우리 아이들을 위해 조용히 앉아 묵언하고 명상하는 성인 프로그램과 달리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자연과 함께 합니다. * 위치: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가야산식물원길 17-56 * 문의: 054-931-6887 * 홈페이지: http://simwonsa.templestay.com/ 3. 나부터 가만히 내버려 두자, 금산사 금산사는 1400여 년의 역사와 전통이 살아 있는 사찰입니다. 여러 관계 속에 놓여 있는 ‘나’를 1년에 한 번쯤은 편안하게 놓아주자는 의미에서 ‘나는 쉬고 싶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요. 365일 매일 열려있는 프로그램으로 스님과의 대화와 108배 하기 및 좌선, 숲길 포행(자율)을 체험하며 나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 위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모악15길 1 * 문의: 063-542-0048 * 홈페이지: http://sansa.geumsansa.org/ [I am your Energy 팔로우하고 활기찬 에너지를 받아보세요!] Follow ▶ http://bit.ly/IamyourEnergy_vingle
모든 일이 잘 풀릴 혜민스님 좋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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