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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

딜리아니는 이탈리아 리보르노에서 유태계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베네치아와 피렌체에서 그림 공부를 하였다. 어머니가 지적이고 교양이 있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모딜리아니가 미술에 소질이 있음을 알았다. 함께 이탈리아 여러 도시를 여행하기도 했다. 미켈리의 미술학교에 다니게도 된다. 1906년 파리로 나와 1909년부터 5년간 브랑쿠시의 권유로 길쭉한 두상 30여점 조각을 하였다. 이 때 결핵이 심해 조각을 그만 둔다. 아프리카 조각의 소박하고 간결한 미를 살렸었다. 이후 세잔과 피카소 등의 영향을 받았고 1913년 파리 몽파르나스로 옮겨 키슬링과 수틴을 사귀었다. 1917년 잔을 모델로 만나 이듬해 딸 잔을 낳았고 1918년 라피트 거리의 베르트 베이유 화랑에서 최초 개인전을 갖고 결핵 치료차 니스에 갔다가 다시 1919년 파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듬해 악화 되어 1920년 1월 25일 눈을 감는다. 장 콕토(1889~1963)도 그의 특징을 잘 파악하여 수필을 남기기도 했다. 문학적 자질과 감수성으로 살았으며 구성의 비대칭성, 긴 선의 인물 구성, 누드와 초상화 작업을 남겨 20세기 미술에 잠깐의 화력을 남기고 긴 일화를 남겼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곡선의 율동감이 크게 나타나고 미묘한 색조와 마티에르의 두터운 변화, 아프리카 미술의 표현 방식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는데 간결한 형태, 비례를 무시한 자유로운 얼굴 표현이 그것이다. 갸름한 얼굴, 긴 목과 푸른 눈 등은 그림의 특징이다. 이 부부의 삶의 방식은 사랑을 넘어 아름다움을 전파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간 것 같다. 디킨슨(1830~1886 여류시인, 독신으로 삶)의 시 ‘나는 아름다움을 위해’라는 시처럼 보인다. 나는 아름다움을 위해 죽었다. 무덤에 겨우 익숙해지자 진리를 위해 죽은 이가 옆방에 눕게 되었다. 그는 내가 망한 이유를 조용히 물었다. “아름다움 때문이오.” 나는 대답했다. “나는 진리 때문이오. 그 둘은 하나이니 우리는 형제요,”하고 그가 말했다. 그래 밤에 만난 친척처럼 우리는 방을 건너 얘기를 나누었다. 이끼가 입까지 올라와 우리 이름을 덮어 버릴 때까지. 이 두 사람은 그림에서 보듯 우울하고 암울한 듯 생활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치열한 정신으로 아름다움을 찾아 그렸다. 그의 그림에는 눈동자가 없다. 그리고 얼굴형도 길고, 코도 길고 목도 길고 엉덩이와 허벅지는 육중하다. 그렇게 된 사람은 없다. 이는 현대미술로 가는 길에 들어서게 된다는 점이다. 표현주의처럼 내면을 그리기 위하여 눈동자는 생략 했고, 간결한 선들은 꿈꾸는 듯 모습을 내재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그래서 사실도 아니고 허구도 아닌 무의식을 나타낸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삶과 죽음처럼 그림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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