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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의 걷는 독서 2.3

우리는 지나치게 다른 무언가가 되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으로 충분하다 - 박노해 Sudan, 2008. 사진 박노해 https://www.facebook.com/parkno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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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나 자신이면 충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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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에서 [랑종]까지 - 신은 대체 뭘 하고 있길래
- 세상이 이 모양인 것과 비대칭 오컬트에 관해 ※ 영화 <곡성>과 <랑종>의 내용이 일부 드러납니다. :) ------- 1. “가까운 가족이 죽지 않아야 할 상황인데 죽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어떤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과거 나홍진 감독은 영화 <곡성>(2016)을 만든 동기에 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요컨대 ‘왜 착한 사람이 불행한 일을 겪어야 하는가?’에 대한 추론 또는 상상. 2. 흔히들 한탄한다. 신은 대체 뭘 하고 있길래 선한 사람들의 억울함이 반복되냐고. <곡성>은 이 불가해를 이해하고자 비이성의 경로를 택한 영화다. 방법은 소거법. 첫 번째 세부 질문 ‘신은 있는가? 없는가’에서는 부재(不在)를 지우고 존재(存在)를 남긴다. 그렇게 이 영화에는 초월자가 ‘있’게 된다. 아무렴. 3. 두 번째 질문은 ‘그렇다면 신은 영향력을 행사했는가? 혹은 놀았는가’ 정도 되겠다. 다시 말하지만 나홍진은 지금 한 손엔 카메라, 다른 한 손엔 부적 비슷한 걸 쥐고 있다. 비이성이라는 어질어질 외길. 그렇게 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소거되고 ‘영향력을 충분히 행사했다’가 남는다. 4. 이제 신이 ①존재하고 ②액션도 취했는데 ‘세상은 왜 이 모양인가? 왜 착한 종구 가족이 몰살돼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필연이다. 이 지점에서, 선택 가능한 답지는 하나밖에 없지 않나요, 라며 나홍진이 고개를 홱 180도 돌려 관객을 본다.(물론 실제가 아니고 영화의 태도에 관한 은유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 신은, 그 신이 아니었습니다. 낄낄낄, 와타시와 와타시다, 나는 나다. <곡성>에서 넘버원 초월자의 정체는 ③재앙을 빚는 악(惡)이었던 것. ‘귀신’ 신(神)은 결코 직무를 유기한 적이 없다. 애석하게도. 5. 1선발 초월자라면 당연히 거룩하고 선하리라는 믿음은 <곡성>에서 구겨졌다. 그리고 5년, <랑종>(2021)이 그 세계관을 장착한 채 또 다른 극한으로 내달린다. 이번에도 초월적인 무언가는 모두가 멸망할 때까지 폭주한다.(나홍진의 날인) 게다가 한두 놈이 아닌 듯하다. 6. 이 귀‘신’들을 <엑소시스트>나 <컨저링> 같은 정통 오컬트 속 대립 구도, 이를테면 적그리스도로서의 대항마 계보 안에 넣기는 어렵다. 그들처럼 선(善)이 구축한 팽팽한 질서를 따고 들어와 균열을 내는 등의 목적성을 띠지 않으니까. 왜? 안 그래도 되므로. 미안하지만 <랑종>에는 그런 노력을 기울이게 만들 법한 절대 선, 시스템의 창조자, 친인류적 초월자 등 그게 무엇이든 비슷한 것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무당인 님도 끝내 털어놓지 않았나. 신내림을 받았지만 진짜로 신을 느낀 적은 없었다고. 7. <곡성>과 달리 <랑종>은 현혹되지 말기를 바라는 선한 성질의 기운마저 제거했다.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무당 몸을 빌린 수호신이든, 공포에 벌벌 떠는 인간들에게 가호를 내려줄 이는 없다. 좋은 초월자는 꼭꼭 숨었거나 모든 초월자는 나쁘거나. <곡성>이 신의 가면을 벗겨 그 악의(惡意)로 가득한 얼굴을 봤다면, <랑종>은 악의의 운동능력에 대한 ‘기록’인 셈이다. 괜히 모큐멘터리 형식을 취한 게 아니다. 8. 악의 증폭과 선이라 믿어진 것들의 부재. 억울함과 억울함이 쌓이고 쌓여 짓뭉개졌을 인간의 비극사, 까지 안 가도 포털 뉴스 사회면을 하루만 들여다보자. 현실 세계를 오컬트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랑종>의 이 궤멸적 신화보다 어울리는 콘텐츠가 있겠나 싶다. 9. 악마한테 이기든 지든, 선악 대칭 구조를 가진 주류 오컬트는 창조자나 창조자가 빛은 질서의 선의와 안전성을 여전히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반면 <더 위치>, <곡성>, <유전>, <랑종> 등 특정 힘에 압도되는 비대칭 호러들이 있다. 현혹되지 말자. 이 계보의 영화들은 지금 악에 들뜬 상태가 아니라, ‘악’밖에 남지 않은 실재를 도식화하고 있다. 이를테면 ‘구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0. 이 모든 영화적 상상은 불우하고 불공평한 세계를 납득하기 위한, 차라리 가장 합리적인 접근일지도 모르겠다. 비이성의 중심에서 외치는 이성. 그렇게 원형으로서의 신은 죽었다. 다만 그럴수록 더욱 절통한 어떤 현실들. 다시, 신이시여. ⓒ erazerh ※ 이 글은 ‘브런치’에도 올라갑니다.
#부와성공의인사이트_유대인탈무드명언
노벨상이 수여되기 시작한 1901년부터 2021년까지 노벨상 수상자 943명 중 유대인은 210명으로 22%를 차지한다. 그뿐만 아니라 인류사에 큰 획을 그은 전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인사 중 다수가 유대인이다. 할리우드를 만들어 미국의 영화산업을 주도하고,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의 일간지를 만든 것도 이들이다. 유대인은 어떻게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었을까? 그 답은 바로 『탈무드』에 있다. 탈무드란 ‘위대한 연구’라는 뜻으로 5,000년간에 걸쳐 유대인을 지탱해 온 생활 규범이다.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등 유대인의 지적 재산과 정신적 자양이 모두 여기에 담겨 있다. 탈무드가 전하는 이와 같은 통찰을 배울 수 있다면, 우리도 부와 성공에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유대인의 지혜를 담고 있는 탈무드와 전 세계 상위 1% 유대인 위인들의 명언 770개를 담고 있다. 유대인 탈무드의 가르침은 우리의 인생에 새로운 통찰을 선물함과 동시에, “5천 년 동안 그들은 어떻게 부와 성공을 얻었는지” 우리에게 답을 줄 것이다. #어리석음보다_혼자가_낮다 나보다 나을 것이 없고 내게 알맞은 벗이 없거든 차라리 혼자 선한 생활을 하라. 어리석은 사람의 길동무가 되지 말라. If there is nothing better than me and I do not have a suitable friend, I would rather live a good life alone. Don’t be a fool’s companion #속지_않고_현명하게_세상을_사는_방법 물고기가 잡히는 것은 낚시꾼이나 낚싯대 때문이 아니다. 미끼로 달려있는 벌레 때문이다. It is not because of anglers or fishing rods that fish are caught. It’s because of the bug attached as bait. 지금까지 유대인 5천년 지혜의 원천 파워에 대한 통찰을 주는 리텍콘텐츠의 부와 성공의 인사이트, 유대인 탈무드 명언이었습니다. --- ★ 화제의 베스트 도서 ★ 5천 년 동안 그들은 어떻게 부와 성공을 얻었나 『부와 성공의 인사이트, 유대인 탈무드 명언』 책 상세보기: https://ritec.modoo.at/?link=4csyga9t
낙타와 관련된 tmi
낙타는 성질이 매우 더러워서 가축화하기까지 정말 긴 세월이 걸렸고 현대에도 목축하기 까다로운 동물이다 성경의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게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은 사실 없다. 아람어 원전 성경에서 나오는 밧줄(gamta)을 낙타(gamla)로 오역한 것이다. 즉 원문은 '굵은 밧줄이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뜻이다. 낙타는 더울 때 위장을 꺼내서 열을 식힌다 혀가 아니고 위장이다. 혀는 따로 있다. 위도 사실 여러 개인데 식도와 연결된 첫 번째 위를 꺼내어 열을 식힌다. 그림 속의 4번이다. 낙타는 10분 동안 100리터의 물을 마실 수 있다. 낙타의 혹은 순수 지방질이며 의외로 누린내는 없다고 한다. 모로코 같은 중동 지방에서는 낙타혹에 곡식을 넣고 볶아서 영양밥으로 해먹는다고 한다. 사진은 낙타혹 쿠스쿠스고 사실 즐겨 먹는 음식은 아니고 우리네 보양식 정도의 지위라고 한다. 낙타는 자기 새끼가 죽은 곳을 기억하고 찾아간다고 한다. 실제로 칭기즈칸이 죽어서 매장하고 현장에서 낙타새끼를 죽여서 제관들이 후에 어미낙타가 가는대로 따라가는 방식으로 능을 찾았다고. 낙타의 조상은 약 3천만년 전 북미에서 왔다. 파라카멜루스로, 건조하고 추운 툰드라 지대에 적응하기 위해 복슬복슬한 털로 뒤덮여 있고 물탱크 역할로 혹이 발달했다고 한다 낙타의 성기는 매우 작은데 몽골 설화에 따르면 부처가 낙타에게 크고 거대한 혹을 두 개나 붙여준 대신에 작은 불알을 준 거라고 설명한다. 지구촌갤러리 반듀링론님 펌
내려놓음 끝에 행복이 있다
한 젊은이가 지혜 있는 노인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저는 지금 매우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매 순간 스트레스로 인해 너무나도 힘이 듭니다. 행복해지는 비결을 가르쳐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노인이 젊은이에게 가방을 건네며 말했습니다. “지금은 정원을 가꿔야 하니 기다려 주게나. 그리고 이 가방을 좀 들고 있게.” 가방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크게 무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가방이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깨가 쑤셔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노인은 계속해서 일하고 있어서 젊은이가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어르신, 이 가방을 언제까지 들고 있어야 합니까?” 그러자 노인이 젊은이를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젊은이, 가방이 그렇게 무거웠으면 내려놓으면 되지!” 바로 그 순간 젊은이는 커다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는데,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들고 있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을 괴롭게 하는 것이 있나요? 힘들겠지만 내려놓으면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집니다. 결국 나를 내려놓음은 나를 다시 세우는 길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결심은 바로 ‘내려놓음’입니다. # 오늘의 명언 그릇은 비어 있어야만 무엇을 담을 수가 있다. – 노자 – =Naver "따뜻한 하루"에서 이식해옴..... #내려놓음#삶의무게#인생#삶#명언#영감을주는이야기#교훈#따뜻한하루
믿고 볼 수 있는 다시 나온 한국 여성작가의 책들
한국시의 거장 최승자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어떤 나무들은 ⠀내가 속한 사회, 내 주위의 상황과 인물들이 달라지면 내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 나의 내부와 내면이 달라져야 내가 달라지고, 그 달라진 눈으로 바라볼 때 내가 보는 세계가 달라진다는 거였지. 그러니까 미국 사회가 한국 사회와 다르기 때문에 내가 달라진 게 아니었어.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에서 벗어나 달라지고 싶다는(더이상 죽음을 살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내 안에서 이미 일어났고, 그것의 가시적 사건으로서 미국행이 주어졌다는 얘기지. 그러니까 내가 이미 내면으로부터 변하고 싶다는 욕망, 그 가능성을 믿지 않았더라면 미국에서도 나는 달라지지 않았고 그곳 세상을 다르게 보지도 않았으리라는 거야. 한국 현대문학이 지나칠 수 없는 세계 김숨 국수 ⠀심장이 뛰는 게 고스란히 느껴져요. 개의 심장이 말이에요. 나와 가장 가까운 생명이에요. 폭삭 늙어 죽을 날밖에 기다릴 게 없는 나를 마다하지 않는 생명이요. 불행의 우울함을 다정하게 견인하는 작가 최진영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암흑 속에서 너무 무섭고 외로워 톡톡. 세상을 두드리면 울던 엄마가 웃었다. 그 느낌 하나만 믿고 바깥으로 나왔다. 21세기 고전이 될 이름 황정은 백의 그림자 은교씨는 갈비탕 좋아하나요. 좋아해요. 나는 냉면을 좋아합니다. 그런가요. 또 무엇을 좋아하나요. 이것저것 좋아하는데요. 어떤 것이요. 그냥 이것저것을.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출처
"당신 마음에 안든다면 바꾸세요 당신의 세상이에요."
어떤 분께서 저를 찾아와 "밥, 저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요. 저는 색맹이거든요 회색밖에 보이지 않아요” 라고 하셨죠. 그래서 오늘은 누구나 그림을 그릴수 있다는걸 보여주기 위해 회색톤으로만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당신은 할수 있어요! 당신이 할 수 있다는 걸 난 알아요. 아름다움은 어디에나 있어요. 그림을 그릴 때 어두운 색과 밝은 색,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이 공존해야 해요. 마치 우리의 인생처럼요. 가끔씩 작은 슬픔이 와야 할 때가 있어요. 그래야 언제 좋은 날이 왔는지 알 수 있거든요. 지금의 전 좋은 날을 기다리고 있는거에요. 이 캔버스에서 자유를 찾으세요. 우리는 실수를 하지않아요. 우리는 단지 행복한 사고를 겪을 뿐이에요. 어떠한 것도 해낼 수 있는 비밀은 당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강하게 믿는다면 어떠한 것도 할수있어요. 믿기만 한다면요. 빛을 보기 위해선 어둠이 필요해요. 당신의 세상 속에선, 당신이 하고 싶은 그 어떠한 것도 할 수 있어요. 여러분이 어떠한 방식으로 원하든, 그거대로 딱 좋아요. 당신 마음에 안든다면 - 바꾸세요. 당신의 세상이에요. 자연과 동물을 사랑한 화가, 밥 로스 (Bob Ross) 1942 . 10 . 29 - 1995 . 7 . 4
보노보노 첫화와 마지막화를 통해 살펴보는 철학 이야기 (스압주의)
첫화 어째서일까? (첫화부터 시작되는 보노보노의 궁금증병) 어째서 모두들 집을 갖고 있는걸까? 포로리야.. 어째서 집을 갖고 있는거니? 넌 뭐하러 그런 시시한걸 물어보니 사는게 집이지 뭐겠어 사는게 집이라고~~? 그래~~~~? (집을 갖고 싶어 포로리의 집에서 같이 살려고 하지만 해달의 특성상 높은 나무 위의 집에서는 살수 없는 보노보노) 나도 집을 갖고 싶어.. (집이 될만한 곳을 여러군데 찾아보지만 모두 환경에 맞지 않아 좌절ㅜ) 나도 집을 갖고 싶어요.. (마지막 시도로 멘토 야옹이 형에게 상담요청) 집이라면 벌써 갖고 있잖니. 에에~? 보노보노가 서식하는 바다 앞 야 보노보노. 넌 먹을때 어느곳에서 먹니? 저기쯤~? 잘때는? 저기쯤이었던가~? 그럼 이 바다 전체가 다 니 집이잖니. 이 바다가 전부 내 집~? 그렇구나~ 야옹이형 고마워. 첫화답게 보노보노 세계관의 기본적인 메세지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는 듯 합니다. '집'이라는 개념이 꼭 통나무집이나 동굴처럼 '닫힌' 공간이어야 할 필요는 없죠. 먹고 사는 생활방식에 따라 집은 얼마든지 다른 형태를 보일수 있습니다. 따라서 보노보노 같은 경우는 바다생물이기 때문에 다람쥐나 너구리가 거주하는 방식과는 다른 형태의 집을 가질수 밖에 없는겁니다. 그러니 억지로 남의 삶의 방식을 따라하려는 것(포로리의 집에서 같이 살려고 애쓴다든지)은 집착일 뿐이죠. 집이란 것은 그저 먹고 자는곳일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죠. 다만 개인적 특성에 따라 그 먹고 자는곳이 저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구체화될 뿐입니다. 드넓은 바다 전체가 보노보노의 집이 된다는 것은 언뜻 생각하면 잘 와닿지 않지만, 집이라는 것의 본질을 그저 '먹고 자는곳'으로 단순하게 정의한다면 전혀 문제될게 없는 얘기입니다. 바다는 분명 보노보노가 '먹고 자는곳'이 맞으니까요. 확대적용해서 생각해 봅시다. 성공이란 것은 무엇일까요? tv나 인터넷 등의 대중매체를 통해 타인의 삶의 이야기를 듣는 환경 속에서, 우리는 흔히 돈을 많이 번다든지,많은 사람들한테 존경받는 최고의 스타가 된다든지, 이상형의 여자 또는 남자와 연애한다든지 하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국어사전에 성공이라는 단어를 치면 '목적하는 바를 이룸'이라고 뜻풀이가 되어 있습니다. 아주 간단명료하죠. 물론 돈을 많이 버는것이 인생의 목적인 사람도 있으니까, 그런 사람의 경우는 돈벌이가 곧 성공을 의미하겠지만, 그 외 다른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이 굳이 돈에 집착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경제적으론 좀 배고픈 삶을 살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그 목적을 달성해나가고 있다면 그게 곧 성공일 따름이니까요. 성공이라는 개념은 누구에게나 '목적을 달성함'이라는 보편적 뜻으로 이해되지만, 그 성공이란 개념이 현실화,구체화된 모습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라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겁니다. (똑같이 '먹고 자는 곳'이라 할지라도 포로리의 집과 보노보노의 집은 그 구체적 모습이 너무나 다른것처럼요.) 그걸 깨닫지 못하면, 저마다의 개성에 맞게 구체화됬을 뿐인 타인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과 혼동하게 되어 남의 삶에 집착하게 되고 그로 인해 고통을 겪게 되는것이죠. 저는 이 글을 쓰면서 문득 보노보노 한국판 오프닝의 가사 중 어느 한구절이 생각나네요. 이 구절로 첫화 리뷰를 간단히 마치겠습니다. '상식이라는걸 누가 정한거야 정말로 진짜~' 마지막화 실컷 재밌게 놀고나니 해가 짐 어째서일까? (또 시작되는 보노보노의 질문병) 어째서,어째서 즐거운일은 끝이나는 걸까아~? 넌 왜 그런걸 또 궁금해 하니.. 보노보노, 잘생각해봐. 예를 들어서 내가 포로리를 때리고 있다고 치자. 맨첨에는 그게 굉장히 즐거워. 하지만 계속 때리고 있으면 차츰차츰 힘도 들고 손이 아파오거든? 즉, 싫증이 난다는거야. 그렇군. 즐거운 일은 싫증이 난다는 거로구나. 그래도 아직 잘 모르겠어. 아빠,어째서 즐거운 일은 끝이나는 걸까요? 멍멍아, 너는 똥싸는게 즐겁니? 응! 매일 즐거운 일이 계속 됬으면 좋겠지? 뭐~? 그럼 난 매일 똥만 싸고 있어야돼~? (낮에도) 응가~ (밤에도) 응가~ 이제 더는 안나와... 그렇게 돼도 안되겠네... 즐거운 일은 어째서 끝나는 거죠~? 잘 들어봐 즐거운 일이란 것은, 맨 처음에는 굉장히 즐겁단다. (아들 패는게 삶의 낛인 패륜 아빠. 너부리가 왜 삐뚤어졌는지 알게 해주는 대목-.-;) 하지만 차츰차츰 손이 아파오고 힘도 들어. 즉, 싫증이 난다는거야. 마지막으로 멘토 야옹이형한테 질문 (첫화와 상당히 유사한 전개죠) 언덕위로 올라가 지는 해를 바라봄 (즐거운 일이 끝나는 시간인 황혼의 무렵) 잘 듣거라 보노보노. 즐거운 일이 끝나버리는 것은, 슬픈일이나 괴로운일을 반드시 끝내기 위해서란 걸 말이야 ..그래도, 즐거운일이 쭉 이어지면 좋을텐데요~ ..그러니? 그러면, 저 햇님은 하늘에 쭉 떠있는 편이 좋겠니? ..그렇게 되면 밤이 안오겠죠. ..그렇겠지? 햇님이 지고, 밤이오고 그리고, 또 햇님이 뜨고, 아침이 오듯이.. 슬픈일이나 괴로운 일을 끝내기 위해서, 즐거운 일도 끝나는 거란다.. 햇님이 뜨고 지고 하듯이, 즐거운 일도 시작되고, 또 끝나는 거란 말이야.. 그렇군요.. 햇님이 지니까, 밤이오고, 밤이오니까, 아침이 되는 거로군요.. 그렇단다.. 슬픈일이나, 괴로운일이 끝나기 위해서 즐거운일이 끝나는 거라고? 하아..역시 모르겠어.. (자연의 섭리와 함께 둥글어가는 인생의 순환이치를 이해하기엔 아직 너무 어린 보노보노) (너부리) 야 보노보노~~뭐하고 있냐~ 아, 너부리야~포로리야~~ 어서 이리와~~ 잘은 모르지만, 오늘도 즐거운 일이 시작되나봐.. 틀림없이 그래..! ;;;;;;;;;; (보노보노 땀소리) (하지만 보노보노가 알수있는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 끝나버린 즐거운일도 언젠가 다시 새로운 오늘로 다가온다는 것..!) ----------------------------------------------------------------------------------------------------- 인간이 여타 동물과 별반 다를게 없는 원시적인 삶에서 벗어나게 된 한가지 계기가 있습니다. 뭉뚱그려 말하면 '사고하는 능력'이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그 사고하는 능력 또한 '자연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시작했죠. 태고적 인류는 먹고사는 문제,즉 생존 자체가 곧 삶의 목적이나 다름없었고, 생존하기 위해선 자연의 원리를 이해해야만 했으니까요. 원시인도 이해할수 있는 자연의 섭리는 바로 '순환'입니다. 해가 뜨고 지고, 또 다시 해가 뜨는것.. 봄,여름,가을,겨울이 지나 다시 봄이 오는것.. 이러한 자연의 순환 이치를 거부하면 인간은 결코 생존할 수 없습니다. (현대사회는 이러한 순환이치에 역행하는 경향이 있죠. 이문재의 '광화문,겨울,불꽃,나무'라는 제목의 시는 이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참고:http://blog.naver.com/kls12?Redirect=Log&logNo=110144421104) 그렇기에 인간의 삶의 구조는 자연의 순환 구조와 상당히 닮아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해는 내일의 해가 다시 뜨기 위해 져야만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 역시 오늘의 즐거운 일은, 내일의 또 다른 즐거운 일이 새로이 시작되기 위해 끝나야만 하는 것이죠. 제가 들었던 철학 관련 교양수업 중, 첫시간에 교수님이 재밌는 얘길 하더군요. 시험으로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라는 문제를 약술형으로 냈는데, 어떤 학생이 그 문제에 대해 어떻게 써야할지 도통 몰라서 '?'라는 단 한글자를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수님은 이 '물음표'야말로 철학의 핵심 키워드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나름의 정답으로 인정했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 학생은 물음표의 본래 의미 그대로 단지 그 문제에 대해 잘 몰라서 그렇게 쓴것 뿐이지만 ^^;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그다지 심오하지도 않은 내용가지고 이게 무슨 철학이냐'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철학의 본질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물음'일 뿐이에요. 다만 그 물음에 대한 답이 저마다 다를 뿐이죠. 누군가는 단순하게, 또 누군가는 매우 심오하게 말이죠. 그 '물음'에 대한 답을 타당한 논증구조로써 체계화시켰을 때 구체적인 학문적 물음으로 형상화 되는겁니다. 화학적으로 비유하자면 '물음'은 철학이라는 물질을 구성하는 일종의 원자인 셈이에요. 다이아몬드와 석탄, 이 두가지 물질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세요? 다이아몬드는 아름답고, 석탄은 왠지 지저분한 느낌이죠? 하지만 이 두 물질은 단일한 탄소원자로만 이루어진, 화학식으로 따지면 완전히 동일한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탄소원자가 어떻게 배열되었느냐 하는 구조식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구조식이 어떻든간에 이 두 물질은 동일한 탄소원자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논증구조가 세련되지 못한 단순한 개똥철학이든, 학문적 체계를 갖춘 고급철학이든 뭐든 간에, 모든 철학은 '물음'을 기본 구성요소로 하고 있습니다. 보노보노는 철학의 가장 원초적 본질이라 할수 있는 이 '물음'을 계속해서 던집니다. 보노보노의 머리 위에 종종 나타나는 '땀'은 바로 이 '물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마지막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노보노는 '틀림없이 그래!'라고 외치지만, 진짜 숨겨진 마지막 대사는 바로 ;;;;;;(땀)입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도 보노보노는 그 순수한 '물음'을 내던지며 자연과 인간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는 이 만화의 핵심 주제인 것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해봅니다. 보노보노는 왜 하필 마지막화에서 '어째서 즐거운 일은 끝나야하지?'라는 의문을 던질까요? 그것은, '보노보노'라는 이 즐겁고도 평화로운 만화영화 역시, 마지막화를 통해 그 이야기가 끝을 맺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감명깊은 만화 또는 드라마를 보다가 그것이 마지막화에 이르러 결말이 나버리면, 어쩐지 아쉬운 느낌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이 시청자의 기본심리입니다. 그것이 해피엔딩이든,베드엔딩이든 상관없이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즐거운 일은 왜 끝나야하지?'라는 질문은, 보노보노뿐만이 아니라 보노보노를 감상하고 있는 시청자 역시 함께 고민해볼 수 있는 물음이죠. '왜 이 재밌는 보노보노가 끝나야만 하는거지?..' 하는.. 그렇기 때문에 보노보노의 마지막화는 그 어떤 만화의 결말보다도 더 아름다우며, 시청자에 대한 배려가 뛰어난 결말입니다. 그 물음에 대해 답을 줬거든요. '또 다른 즐거움의 시작을 위해서'라고. 출처ㅣ루리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