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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름종이

이상한 계절이군요. 더운 한낮이 왔다가, 쌀쌀한 저녁이 이어지고, 이튿날엔 비가 옵니다. 어떤 전조도 없었던 비는 점점 굵어지고 길을 강으로 만들 정도로 세차집니다. 나는 몇일째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문한 책이 오고, 화분의 개운죽이 물을 비우고, 예비군훈련 통지서를 전달받았지만, 보고 싶었던 영화표를 예매했지만 아무래도 나는 그냥, 이대로 집안에 머물 거라는 생각입니다. 새로 구입한 카메라의 필터도, 며칠전부터 식혀 놓은 오래된 라벨의 와인도, 친구가 선물한 옛 음반에도 손이 가지 않습니다. 하루 세 끼를 먹고, 사흘마다 청소와 빨래를 하고, 필요한 물건들을 인터넷으로 주문을 넣기도 하면서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지만 나는 지금, 거울에 비친 존재처럼 실제의 나는 아닙니다. 그저 살아있는 흉내를 낼뿐. 그날, 당신의 집 앞에 갔었습니다. 동네를 천천히 걸어 몇 바퀴를 돌았고, 당신이 찬거리를 살 동네의 시장과 마트에도 들러 커피와 사탕을 구입했습니다. 매일처럼 산책한다는 뚝방길도 걸어보았고, 은행과 동사무소에도 갔었습니다. 그뿐인가요, 길목 슈퍼 야외의자에 앉아 가져온 책을 읽으며 오래 기다렸습니다. 다섯 시간 후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닥쳤을 때, 망설이다 끝내 전화를 넣었습니다. 스무번 정도 벨이 울렸고 아무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행이었을까요 불행이었을까요. 벌써 세 번 째, 나는 이제 그만하기로 합니다. 설령 만나본들 딱히 나눌 얘기가 있는것도 아니니까요. 그만. 어리석은 짓입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잠깐 울었습니다. 책을 찢어 눈물을 훔치고는 저녁이 내려앉는 붉은 철로를 오랫동안 바라봤습니다. 가지마다 새 순이 돋고, 아이들이 새 명찰을 달고, 배롱나무가 몸을 뒤틀어 꽃 틔울 준비를 하는, 누구나 긴팔 셔츠 하나만으로 어디든 갈 수 있는 다정한 계절입니다. 고마웠습니다. 모두 잊겠습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통과하지 않은 것처럼 건조하고 창백하게.
4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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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peB 아주 쓸쓸한 일이었지요......
책을 찢어 눈물을 훔치다...
@JJOA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좋게 읽어주신 마음 덕분입니다
글 참 잘 쓰신 듯 뭔지 모를 그 감정들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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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음 달에 실릴 원고를 청탁하기 위해 필진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그중 한 명의 시인은 요즘 가장 핫한 시인 중 한 명인데, 전과 다르게 의사소통에 다소 애를 먹었다. 한 넉 달 전에도 원고 관련으로 통화를 하다가 안부를 물었는데 그가 문득, 우울증으로 병원에 다니고 있다고 했었다. 물론 우울증으로 병원에 다니는 일이 흉도 아닐뿐더러, 그것이 그냥 지나칠 일이라는 건 아니지만 요즘은 주위에도 생각보다 흔하게 있는 일이어서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하물며 시인의 우울이란 놀라울 일도 아니어서, 또 지극히 사무적인 관계에 불과한 내가 특별히 뭔가를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오늘 통화를 해보니 정서가 많이 불안해 보였다. 그 증거를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조심스러워졌다. 현재 밀려있는 원고들이 많아서 조금 미룰 수 있는지, 그리고 곧 시집이 나오는데 시집이 나온 뒤 시집에 실린 시를 발표할 수는 없어서 기간이 겹치지는 않을지, 또 시의 형식이 다소 실험적인데, 편집상 무리는 없는지, 뭐 이런 것들을 조율했는데, 설명이 부족한 것 같으면 재차 설명해주었고, 내가 당장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은 우선은 다시 검토해보자고도 얘기했다. 아주 힘겨운 통화를 마치고, 문득 걱정이 되었다. 꽤 오래전이지만 몇 번인가 모임에서 직접 본 적도 있고, 그때의 모습들은 지금처럼 불안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보여준 모습들은 거의 무관한 나로서도 우려가 되었다. 나 역시 그것을 우울증이라고 해도 좋을지, 단순한 우울감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것들을 오래 겪어본 바로서, 또 당장 지난여름부터 겨울까지만 해도 그런 기분이 극심해져 운동도 하게 된 측면이 있는데, 그때 내가 자주 하던 말과 톤이,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보여지는 느낌들이 그에게서 자꾸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예전 같으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무시해버릴 만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에게서 자꾸만 지난날의 내가 보여서. 거듭 말하지만 함께 시를 쓰는 동료라는 것 말고는 그의 삶에서 거의 무관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함부로 보탤 말도 없다. 함부로 보태서도 안 된다. 무관하고 사무적인 관계로서 그저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원고를 실을 수 있도록 최대한 조율해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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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까지 마감인 시 원고를 하나 넘겼다. 사실 계속 욕심이 생겨서 고치고 또 고치면서 오래 붙들고 있었다. 그러다 어제는 아예 다른 시가 떠올라 내친김에 한 편을 더 써냈다. 사실 나는 잡지에 발표하는 시에는 크게 미련이 없다. 문학상은 대개 잡지에 발표된 시나 출간된 시집, 혹은 투고 원고 중 하나를 선정해 수여하는 방식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나는 아마도 잡지에 발표된 시에 상을 주는 방식의 문학상은 절대 탈 수 없을 거다. 적어도 당분간은. 어차피 잡지는 내 개인 작품집이 아니라서, 일단 발표하고 계속 퇴고를 거듭해 시집에 실으면 된다, 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일부러 대충 써낸다는 것은 아니고, 가능하면 나도 좋은 시를 발표하고 싶지만 내 시작 방법이 워낙 고치고 고치는 게 익숙하다 보니, 마감에 쫓기게 돼서 그렇다. 잡지를 구독하는 독자들을 우롱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런데 이번에 시를 새로 쓰다 보니, 이제는 최대한 발표 시에도 공을 들여볼까 생각한다. 왜냐면 이전까지는 조금 자신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예전보다는 조금 해볼 만 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하다못해 소설도 시절을 바투 따라가는 판에, 시를 쓰는 사람이 자꾸 시대와 작품의 시차를 너무 벌리는 것은 게으름 탓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시의성을 생각하고 시를 쓰지는 않지만, 또 그것을 크게 지향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그 안에 알게 모르게 당시의 시절이 스며든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조금 용기를 내고, 또 생각을 바꿔 조금 더 책임감을 가지고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