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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때] '70년대 최대 스캔들' 정인숙 피살사건

과거 '3월 17일'은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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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 팬 '아미'들이 5·18민주화운동 공부하는 이유
“나 전라남도 광주 baby” “모두 다 눌러라 062-518” 방탄소년단 제이홉, 수록곡 ‘마 시티(Ma City)’에서 ‘5·18’ 언급 국외 아미들, 가사 의미 번역하면서 5·18민주화운동 공부해 방탄소년단과 ‘마 시티(Ma City)’ 가사.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제공. ‘If you listen to ‘Ma City’ by BTS, you will hear J-Hope rapping “Press 062-518, everyone”. 062 is the area code of Gwangju and 518 is referring to Gwangju Uprising happened on May 18.’ (방탄소년단의 노래 ‘마 시티’를 들어보면, (방탄소년단 멤버) 제이홉이 “모두 다 눌러라 062-518”이라고 랩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062’는 광주의 지역 번호이고, ‘518’은 5월18일 발생한 광주민주화운동을 가리킵니다.) 자신을 방탄소년단 팬클럽인 ‘아미(ARMY)’라고 소개하고 있는 한 블로그에 올라온 글이다. 이 글은 방탄소년단의 노래 가사나 관련 기사, 글 등을 영어로 번역해 알려주는 트위터 사용자 ‘아미살롱’(@BTSARMY_Salon)이 지난해 5월 써서 올렸다. 이 사용자는 글에서 “1980년의 봄은 ‘서울의 봄’이라고 불린다. 19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수백 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가 피를 흘렸다. 이 기간 동안 광주 시민들은 전두환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고 5·18민주화운동을 소개했다. 5·18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택시운전사>도 소개했다. 이 트위터의 팔로워는 12만7천명이 넘고, 해당 글을 게시한 블로그 글 링크를 올린 트위트의 리트위트(RT) 수는 4천이 넘었다. 글이 입소문을 타고 전 세계 방탄소년단 팬들에게 공유되고 있다는 얘기다. 방탄소년단의 노래 가사나 관련 기사·글 등을 영어로 번역해서 알려주는 트위터리안 ‘아미살롱’(@BTSARMY_Salon)이 지난해 5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5·18민주화운동 소개글 갈무리. 방탄소년단을 따라 5·18민주화운동을 공부하는 외국인 아미들이 늘고 있다. 계기는 방탄소년단의 노래 가사다. 2015년 공개된 방탄소년단의 앨범 ‘화양연화 pt.2’에 수록된 노래 ‘마 시티(Ma City)’는 광주 출신 멤버인 제이홉(본명 정호석·25) 등 멤버 3명이 직접 작사한 곡으로, 멤버 각자가 자란 도시를 주제로 담았다. 제이홉은 이 노래에서 “나 전라남도 광주 베이비(baby)” “날 볼라면 시간은 7시 모여 집합 모두 다 눌러라 062-518”이라고 랩을 한다. “7시 모여 집합”이라는 가사는 광주의 지도상 위치가 7시 방향이라는 이유로 극우 성향 사이트 일베가 광주를 비하할 때 쓰는 ‘7시’라는 표현을 저격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방탄소년단의 또 다른 멤버 슈가(본명 민윤기·26)는 데뷔 전 ‘062-518’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마 시티’가 공개된 뒤 이와 같이 ‘7시’와 ‘062-518’라는 숫자 안에 숨겨진 의미에 대해 국외 팬들의 궁금증이 커졌다. 이 때문에 2016년 한 아미는 자신의 블로그에 영어로 이 노래 가사를 번역하면서 내용을 설명하고 “일베는 5·18민주화운동이 북한군과의 공모로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근거를 보여주는 건 거부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광주를 ‘7시’라고 부르며 5·18이 북한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글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이후 복역했지만 나중에 한국 대통령이 됐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는 설명도 나온다. 해당 글을 본 외국인 아미들은 “가사의 의미를 알려줘서 고맙다”, “광주의 역사가 이렇게 슬픈 줄 몰랐다”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러 가야겠다” 등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5·18 묘역을 직접 찾은 아미들도 있다. 지난달 28일 ‘2019 광주 FINA 세계수영선수권대회 성공기원-SBS 슈퍼콘서트’에서 방탄소년단의 공연을 보러 온 외국인 아미들이 방탄소년단 노래를 듣고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 헌화하고 분향했다는 소식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날 묘지를 찾았던 우크라이나인 아미 조토바 아나스타샤(21)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방탄소년단 노래를 통해 5·18민주화운동을 배우게 됐다. 콘서트를 보러 가기 전 시간이 생겨 친구들과 같이 묘역에 방문했다“며 “방탄소년단 노래를 듣지 않았다면 이런 중요한 사건을 알지 못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ㅊㅊ https://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454040 + 딤토 좋은 영향력이다... +직접 찾아간 해외팬들
4인 4색 ‘뉴솔트’가 바라본 제주도 항해 일지
Editor Comment 길거리에서 점차 잊혀져 가는 모든 것을 흑백 필름으로 담는 스트리트 포토그래퍼, 임수민.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그 답지 못했을 때는 침전되다가도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 모습에서 은근한 에너지와 솔직한 면모가 풍긴다.그녀가 경험한 5개월간의 태평양 항해는 끔찍하게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고 전했는데, 이상하게도 상상조차 소름 끼치는 경험 후에 임수민은 그 누구보다도 좋은 선장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배 위에서는 선장의 말이 곧 법이기에 진정 바다 위에서 자유롭고 싶다면 직접 선장이 되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 그렇게 임수민은 스트리트 포토그래퍼에 이어 캡틴 쑤(SOO)로 탈바꿈했다. 오로지 그녀의 배 ‘NEW SALT’ 위에서만큼은. 숙련된 뱃사람, 즉 베테랑 세일러를 일컫는 ‘old salt’의 반의어로 지어진 요트 이름은 상어를 손으로 때려잡은 이야기만 하며 권위를 내세우는 선장이 아닌, 새로운 모험을 발판 삼아 시작하는 타인에게 따뜻한 공간이 되어주겠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같은 바다를 항해했지만, 우리는 모두 다른 파도를 봤다” 하루에도 몇 롤씩 사진을 찍은 후, 이태원 우사단길에 있는 소박한 작업실 부엌에서 필름을 현상하는 생활이 유일한 낙이었던 그녀가 일종의 소셜 다이어트를 위해 모험을 계획했다. 일본에서 요트를 매입해 직접 캡틴이 되겠다고 나서기까지. 서로와의 직접적인 관계가 전무한 분야에서 종사하는 4인이 모여 각자만의 방법으로 가치관을 찾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는 프로젝트가 지난 한 달간 펼쳐졌다. 타이틀은 ‘I AM A NEW SALT’. 내구성은 물론 스타일까지 고루 겸비한 나이키 스포츠 웨어와 함께했다. 크루 각자만의 불타오르는 열정을 품고 무모하다면 무모할 수 있는 제주도 항해기. 임수민은 더 이상 새로운 발명을 하기가 어려워진 오늘날, ‘발견’이란 의미를 다르게 정의하고자 했다. 캡틴 쑤와 크루는 배가 정박해 있는 여수에서 출발해 제주도 윤곽을 돌며 배의 항적으로 뉴솔트만의 제주도를 그렸다. 그녀에게 하나뿐인 연인이자 동료, 선배에 이르는 세일러 채(CHAE)와 의기투합해 진행된 프로젝트는 항해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담당한 그와 크루 케어 및 기획적인 면을 전담한 캡틴 쑤가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며 더 험하고 고독한 내면의 항로를 스스로 개척해나가기 위한 모험이다. 한 달간의 여정 중 1구간에서 동행한 뉴솔트 크루는 모델 겸 유튜버 마테와 DJ 클로젯이다. 캡틴 쑤 1인칭 시점으로 전하는 4인 4색 ‘뉴솔트’ 제주도 항해 일지를 아래에서 간접 체험해보자. NEW SALT | 스트리트 포토그래퍼, 세일러 나는 ‘길이 있어도 없어도 갈 길을 가는 캡틴 쑤’다. | 보트워커, 세일러 나는 ‘삶이라는 배의 키를 쥔 선장’이다. | 모델, 유튜버 마테 나는 ‘<매트릭스>의 모피어스’다. | DJ 클로젯 나는 ‘히트곡이 되고 싶은 인트로 트랙’이다. 배 작업부터 출항 직전까지 |5월 6일 아침 10시 우리는 여수에서 제주도 김녕 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도두 사수항으로 향할 예정이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출발하는 날 아침까지도 나와 채는 출항 준비로 정신없었다. 새로운 크루들이 도착하기 이틀 전에 엔진이 고장 나는 바람에 여수 이순신 마리나에서 유명한 ‘신사장님’의 도움을 받아 배의 심장을 새로 이식하다 싶이 대공사를 치렀다. 혹여나 문제가 있을까봐 지금도 마지막 점검을 위해 이곳저곳 살펴보고 계신다. 항해를 하는 도중에 우리는 지도도 봐야 하고 해경과 연락도 닿아야 해서 캡틴들은 제외였지만, 크루들은 유심 카드를 제출하도록 했다. 여수와 제주도 사이에는 섬들도 많아서 LTE가 잘 터지기 때문에 이러한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찾는 여정’에 집중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이쯤 되니 준비가 되지 않더라도 출발을 해야만 했다. 완비를 위해 욕심을 부리다간 아예 출항을 못하는 수가 있기에. 서로를 격려하며 이제는 정말로 배에서 밧줄만 푸르면 떠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오자마자 노동을 하게 된 두 크루들과 함께 이제까지 질질 끌며 여기저기 짐을 날랐던 슬리퍼를 모두 수거해서 창고에 넣고, 우리 넷은 여수 땅을 떠났다. 여수 →김녕항 |5월 6일 오후 2시 바다다. 물론 뒤에 보이는 수많은 통발들을 피하느라 긴장을 놓칠 수 없었지만, 아직 육지와 너무도 가까워 소리치면 다 들릴 것 같았지만 그래도 드디어 출항이다. 크루들은 흔들리는 배에 설렜고, 프로젝트를 준비하느라 각자의 위치에서 고생했던 우리 두 캡틴은 감격스러웠다. 어딘가로 두둥실 떠나버리는 이 자유가 감사했다. 재영은 바다와 바람의 소리를 녹음하고 일기를 쓰고, 마테는 영상으로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본인을 기록했다. 자신의 방식으로 바다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크루들을 보며 우리도 전에는 보지 못했던 바다를 느꼈고, 그래서 행복했다.그렇게 바다를 한참 즐기고 낮잠도 자다보니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항해 도중 먹으면 눈물 나게 맛있는 양파, 참치, 마요네즈 주먹밥을 만들기 위해 부엌으로 내려갔지만 하필 그때 예보에도 없던 바람이 세게 불기 시작해 그때부터 멀미와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바람이 한 방향에서 세게 불면 돛이 힘을 받아서 배가 기운 채 움직인다. 그래서 배 안에서 걸어 다니는 건 물론 가만히 앉아 있기조차 힘이 든다. 그렇게 나와 마테, 클로젯은 캡틴 채를 밖에 홀로 두고 배 안 구석구석에서 쓰러져 제발 멀미가 사라지기를 소망하며 쏟아지는 잠의 늪에 빠져버렸다. |5월 6일 오후 11시 여전한 멀미. 태평양에 이어 대한 해협을 건넜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양파와 바람에 졌다. 졸려서 잔다기보다 멀미에 괴로워서 눈이 감겼고 마치 몸이 철로 둔갑된 것처럼 무거웠다. 주변을 보니 끙끙 앓는 소리를 낼 겨를도 없이 괴로워하는 크루들이 보였고, 밖에서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든든한 캡틴 채가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을 담겠다며 고프로를 손에 쥐고 잠에 든 나는 문득 크루들이 밖에 나가 캡틴 채와 대화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5월 6일 새벽 1시 여느 선장이 눈을 감고 배에 누워 있을 때 배가 1도라도 방향이 기우면 그것을 감지할 수 있다고 말한 걸 엿들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쳇, 허세하곤”이라 비웃었는데, 8시간째 멀미로 탈진했던 내가 갑자기 변화를 느꼈다. 바람에 의해 팽팽하던 돛이 갑자기 바람이 없이 펄럭이는 느낌, 배가 급하게 한 바퀴를 도는 듯한 느낌에 번뜩 눈이 떠졌고, 아무런 비명도 외침도 없는 것에 섬뜩한 기분이 들어 밖으로 우당탕 뛰쳐나갔다. 밖을 보니 어둠 속에서 캡틴 채가 오토파일럿에서 키를 뽑아 수동으로 운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표정이 태평하고 움직임이 흔들림 없어서 나는 내가 착각을 했나 싶기도 잠시, 캡틴 채 뒤의 광경을 보고 심장이 멎을 뻔했다. 63빌딩을 옆으로 뉜 듯한 크기의 거대한 화물선이 갑판 위의 사람과 하이파이브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거리에서 뉴솔트 배와 우두커니 맞닿아있었다. 아무런 소리가 안 나왔다. 아찔했고, 얼마나 위험한 순간을 지금 우리가 모면한 것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화물선이 멀리 떠나고 파도가 안정적이게 된 다음에야 캡틴 채가 덤덤히 말했다. “화물선 불이 꺼져있어서 육지인 줄 알고 있었는데 가까워서야 움직이는 배인 걸 알고 급하게 피했어”. 얼마나 놀랬을까. 그 후부터는 나도 멀미고 추위고 다 달아나버려서 캡틴 채와 함께 불침번을 서며 제주도까지 함께 했다. 침착함. 그것이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5월 7일 새벽 4시 다행히도 김녕항에는 배를 세울 자리가 있었다. 육지의 마리나들은 모두 꽉 차 있어서 들어가도 세울 곳이 없어 큰일인데, 우리는 무탈하게 새들이 짹짹거리며 아침을 알리는 시간에 조심스럽게 제주도에 입항했다. 그날 아침은 간단하게 요리해서 먹고, 가족들에게 생존신고를 한 후 본격적인 제주도 탐방에 나섰다. 각자의 내면으로 떠난 제주도 |5월 7일 오후 3시 인터넷 연결이 안 되는 두 크루와 맛집 탐방을 원채 하지 않는 캡틴 둘은 제주도 한켠을 무작정 걸었다. 그렇게 아무 생각도 없이 걷다가 슈퍼가 보이면 필요한 음식을 사고, 그러다가 편의점이 보이면 아이스크림을 먹고, 또 그렇게 걷다 보니 다시 김녕항으로 돌아왔다. 새삼스럽게 다 같이 현무암 돌담을 보며 “아 맞다 우리 제주도로 왔지”라고 하며 함께 웃을 정도로 내가 어디에 있는지 보다는 ‘지금의 나는 어떤 마음인지’를 생각하며 걸었다. 각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거친 바다를 함께 건너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정적 속에도 자연스럽게 곁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김녕항 → 도두 사수항 |5월 8일 오후 1시 오늘은 어제와 달리 순항이었다. 바람이 일정했고, 그렇게 우리는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도두 사수항으로 들어갈 채비를 마쳤다. 도두사수항은 짓다가 중단된 마리나였는데, 수심이 얕아 바다 밑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우리 배도 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행히 가까스로 배의 밑이 바닥을 닿지 않았고, 오히려 우리는 굉장히 프라이빗한 우리들만의 마리나가 생긴 격이었다. 배를 정박하고 우리는 유유자적 바다에서 하지 못한 수영과 태닝을 하고 그동안 밀린 일기를 쓰며 즐겼다. |5월 9일 마지막 날 프로젝트의 마지막 날이다. 각자가 아쉬웠던 점을 끝내 기록하기 위해 도두 사수항 근처를 탐방했다. 뉴솔트 크루들 항해의 마지막을 보고 있자니 나는 갑자기 내가 태평양 항해가 끝날 무렵의 나 자신이 기억났다. 태평양을 떠나기 전에 ‘사람’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고 했지만, 그때 태평양 한복판에서조차도 함께 배를 탄 사람들로부터 힘들었기에 문제는 장소가 아니라 나의 마음이라고 깨달았었다. 이번 항해를 시작하기 전에도 나는 마테와 클로젯에게 각각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가?”하고 물었었다. 마테는 ‘본인의 의도를 가로막는 모든 것’이라고, 클로젯은 ‘소셜 네트워크’라고 했다. 그들도 나처럼 각자가 자유롭고 싶은 것이 사실 배를 타고 도망을 가서 해방된다는 착각이 아니라,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깨달았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을 무찌를 수 있는 단단한 심장을 키웠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응원한다. 프로젝트 시작 전부터 지금까지도. JUST DO IT 캡틴 쑤와 모델 마테가 담은 제주도 항해 일기는 각각의 유튜브 채널에서 곧 다시금 회상될 예정이다. 연장선으로 4명의 크루가 각자의 방식으로 바라본 제주도는 오는 6월 중 전시에서 더욱 자세히 공개된다. <아이즈매거진>이 조명한 4인 4색 ‘뉴솔트’의 항해 여정 <I AM A NEW SALT> 전시는 매거진 인스타그램을 통해 추후 공지될 예정. 뉴솔트 모험은 계속된다. #imanewsalt JUST DO IT! 더 자세한 내용은 <아이즈매거진> 링크에서
전기자동차 실패담
https://www.faz.net/-gya-9mq82?GEPC=s3 예전에 전기 자동차도 독일이 원조라는 글을 썼던 적이 있다(참조 1). 그때는 20세기 초의 독일 전기자동차를 다뤘었는데, 알고보니 독일이 1950년대 중반 정도까지는 전기 자동차를 운영하고 있었다. 물론 대세는 가솔린과 디젤이기는 했는데, 전기 자동차의 문제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우선 큰 마음 먹지 않으면 못 가는 전시회부터 소개한다. 이 전시회 때문에 동 특집 기사가 나왔다. 제목: elektro / mobil 전기 / 교통 장소: 독일 프랑크푸르트 통신박물관(Museum für Kommunikation Frankfurt) 기간: 2019년 3월 21일 - 10월 13일 웹사이트: https://www.mfk-frankfurt.de/ausstellung-elektro-mobil/ 20세기 직전에 만들어진 전기 자동차는 1899년에 이미 시간당 105km를 찍었었다. 당시 자동차 시장은 전기 모터와 증기기관, 가솔린의 3파전이었고, 미국에서는 대략 40%가 전기 자동차였다고 한다. 운용하기 더 쉽고 더 조용하면서 더 깔끔해서였다. 그래서 전기 자동차는 시내, 내연기관 자동차는 시외, 증기기관은 철도, 이렇게 나누는 편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 전기 자동차의 약점은 오늘날과 같았다. 가동 거리와 배터리 문제 말이다. 게다가 포드가 저렴한 내연기관 자동차를 대량생산해버려서 게임은 끝났다. 다만 나치 정권은 생각이 좀 달랐다. 제국체신부(Reichspost)에서 우편 운송 차량을 전기 자동차로 한 것이다. 그래서 체신부의 우편 운송용 전기 자동차는 1930년대 말, 3천 대 수준까지 늘어난다. 나치가 전기 자동차를 추진했던 다른 이유도 있었다. 안보였다. 내연기관은 석유가 아니면 안 되지만, 전기 자동차의 경우, 독일 내에서 생산이 가능한 석탄으로도 전력을 뽑아낼 수 있었다. 즉, 독일 내에서 전기 자동차를 추진한다는 의미는 오늘날, 중동의 석유와 러시아의 가스에 덜 의존하기 위해서라는 논리도 나올 수 있다. 비록 1955년 운송보조법(Verkehrsfinanzgesetz)을 통과시키면서 전기 자동차의 세제해택을 없애버린(참조 2) 독일이었지만, 오일 쇼크를 지나고 환경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존 업체와 전문가들의 저항이 강력했고, 당시 연구 예산은 그냥 낭비되고 말았다. 독일이 어째서 그 후로 전기 자동차의 기회를 날러버렸는지는 참조 1 기사에 나와 있다. ---------- 참조 1. 전기 자동차는 원래 독일이 원조(2017년 8월 20일): https://www.vingle.net/posts/2193105 2. https://www.gesetze-im-internet.de/verkfing/BJNR001669955.html
제3제국을 묘사한 예기치 못한 출판물
https://www.faz.net/-in2-9mo4g 엘리자베트 뵈데커(Elisabeth Boedeker)라는 사서이자 여성운동 역사가가 있다. 1893년에 태어나 1980년에 사망한 인물로서 그녀의 저서 중에, "25 Jahre Frauenstudium in Deutschland. Verzeichnis der Doktorarbeiten von Frauen 1908 - 1933 / 독일 여성 학문 25년, 여성 박사논문 목록(1908-1933)"이 있다. 1935년에 나온 책이다. 하필이면 왜 1933년에서 끊었을까? 독일과 1933년을 아신다면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실 것이다. 1933년 3월 총선을 통해 나치가 집권했기 때문이다. (전례가 없지 않지만) 독일 대학교에서 여학생 입학이 일반적으로 허용된 것은 1908년부터였다. 그래서 입학 허용 이전인 1902년 남녀 대학생 비율 36,000명 vs. 70명이었던 것이 1931년부터는 115,000명 vs. 22,000명으로 대폭 늘어난다. 그러니까 1908년부터 25주년 기념이기 때문에 1933년에서 끊었다는 이유도 있기는 하다. 뵈데커의 책에는 총 5,949편의 논문이 실려 있으며, 의학(참조 1)을 제외한 모든 학문을 망라하고 있다. 이중에 눈여겨 볼 전공은 다름 아닌 미술사학이었다. 히틀러가 제일 먼저 추진한 정책 중 하나가 바로 "퇴폐예술(Entartete Kunst)" 추방이었기 때문이다. 이 퇴폐예술은 다름 아닌, 모더니즘을 가리켰고, 그때문에 바우하우스는 나치가 집권하자마자 폐교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참조 2). 따라서 이 책에 있는 미술사학 논문의 저자들(여성 박사들)은 모두 1933년까지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일하던 이들이었고, 대부분 1933년에 쫓겨난다. 1. Margaret (Grete) Ring(1887 베를린 - 1952 취리히): 그녀의 어머니는 다름 아닌 막스 리베르만의 처제. 네덜란드 회화를 전공했으며 영국으로 이주했지만 영국 갤러리도 1940년 독일 공군에게 폭격을 당했... 2. Lotte Eisner(1896 베를린 - 1983 파리): 그리스 화병 그림을 전공했으며, 독일 영화 비평으로 유명했지만... 3. Agnes Waldstein: 1929년 Folkwang-Museum zu Essen 최초의 카탈로그를 작성했다. 그런데 그 카탈로그 제목이 "Moderne Kunst/모던 아트"... 4. Annie Mainz, Elisabeth Henschel-Simon: 각각 함부르크, 베를린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다가 쫓겨난 다음, 아예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다. 5. Lilli Fischel(1891 브룩샬 - 1978 카를스루에): "14세기 라인강 중류 지역의 조각"으로 박사 논문을 받았다. 그녀는 카를스루에 주립미술관 관장 역할을 맡으면서 모더니즘 화가들(대표적으로 반 고흐와 인상파) 전시를 추진했었고, 그때문에 쫓겨난다. (게다가 아버지가 유대인!) 6. Hanna Stirnemann(1899 바이스엔펠스 - 1996 베를린): 중세 독일 후기고딕 스타일로 박사를 받았으며, 나이 서른에 독일 최초의 정식 여자 관장이 됐다(예나 시립미술관/Jenaer Stadtmuseum). 그러나 6년뒤 관장 자리에서 축출되고, 해방 후에는 동독에서 다시 한 번 축출... 소위 "퇴폐 예술" 때문에 나치 정권 때문에 박해를 받았던 예술 관련자들은 매우 많다. 그래서 별도의 책(참조 3)이 있을 정도인데, 2010년에 나온 이 책보다는 당시 생상한 기록으로 남긴 뵈데커의 책이 더 가치가 있다는 말이 바로 이 기사다. 유대인 혹은 유대계라서, 게다가 모더니즘 전문가라서 쫓겨난 그녀들의 일대기는 박사로 승승장구하다가 몰락하는 여성 지식인들에 대한 서사이기도 하다. 기사의 표현처럼, 제3제국을 묘사한 예기치 못한 출판물이기도 하다. -------------- 참조 1. 의학의 경우 1908년 입학이 허용되자마자 공식적으로 5천 명이 졸업했었다(여자 의사의 수요는 계속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학위를 안 줬을 뿐이지). 그래서 논문이 워낙/이미 많은지라 제외. 2. 바우하우스 100년(2019년 1월 8일): https://www.vingle.net/posts/2553277 3. Biographischen Handbuch deutschsprachiger Kunsthistoriker im Exil / 유배당한 독일 미술사학자들 약사(略史): https://www.amazon.de/dp/3598113390/ref=cm_sw_r_tw_dp_U_x_rqp2CbWQP0MJP 4. 참고로 짤방 그림은 Thomas Theodor Heine (1867-1948)의 만평이다. "수험생, 환자에 대해 뭘 알아보시겠습니까?" "실크 속치마를 입고 있군요."
하이힐의 역사
http://www.slate.fr/story/175827/mode-talons-hauts-histoire-pouvoir-genres 하이힐이 원래 남자들이 신었던 것임은 대체로 알고 계실 텐데, 남자들의 악세사리(!)였던 하이힐이 어째서 이제는 여자의 전유물인가에 대해서는 잘 모를 것이다. 타이밍과 운, 권력의 이동 등이 모두 결합되어서 그렇게 되었다…가 정답인데, 주말 특집을 통해 알아보도록 합시다. 이렇다 할 만한 하이힐을 처음 소개한 것은 페르시아가 맞긴 맞고(당시 형태의 하이힐은 오늘날의 카우보이 부츠와 유사하다), 15-6세기 베네치아와 스페인의 초핀/쇼핀/Chopine/Pianella도 어떻게 보면 하이힐의 한 형태라 할 수 있을 텐데(참조 1), 역시 역사 안에서 이를 유행시킨 것은 프랑스 절대왕정이었다. 태양왕 루이 14세 얘기다. 그의 키는 1m63cm였는데 (17세기 기준에서는 작은 키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서도…) 높은 곳의 공기를 마셔야 더 권위가 있다고 느끼던 그였다. 그래서 국왕은 언제나 하이힐을 신고 다녔다. 게다가 아마 크리스티앙 루부탱(Christian Louboutin)의 빨간 밑창 하이힐(참조 2)과 같은 제품도 생각나실 텐데 이게 전설이 있다. 루이 14세의 남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립이다. 여러모로 형보다 나아보인(!) 그를 형인 국왕은 언제나 지근거리에 두고 싶어해서(아마 쿠데타를 막기 위해?) 필립은 늘상 파리에 있었다. 파리에서 뭐 할 것이 있을까, 이른바 파티왕(!)이 됐던 필립은 그당시 패션 리더였다. 그런데 하루는 파리의 마장동(…)이랄 수 있을 샤틀레 옆, 도축장 근처에서 파리 카니발이 열렸다. 때는 1662년, 한참을 놀다 보니 그의 하이힐 밑창은 새빨갛게 도색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빨간 밑창 하이힐의 기원. 그러나 프랑스 혁명 이후인 19세기부터는 귀족 남자들도 “일”을 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미국 혁명도 잊으면 안 된다. 당시 미국은 Martin Van Buren 대통령의 사치스러운 생활 스타일(말그대로 금수저/Gold Spoon라 불렸다)을 비난하는 분위기가 있었으며, 남자들이 가발이나 보석류, 하이힐 등 비실용적인 패션을 포기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지만 “남자들”만이다. 바로 Great Male Renunciation이라는 개념이다. 이때부터 남자들 의상은 결국 양복 스타일로 통일된다(가격이 싸졌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BBC는 여자들의 하이힐 착용을 19세기 포르노 업자들로 거론하고 있는데(참조 3), 이 기사는 좀 다르다. 19세기, 장식적인 옷 착용의 역할이 남자에서 그의 부인과 딸들로 바뀐 것이다. 어차피 그런 옷을 입을 가정이라면, 그 집안의 여자들은 노동에 종사하지 않았으며, 입고 벗기 힘들고 움직이기도 쉽지 않은 그런 옷들은 바로 “귀함”을 의미했었다. 이때부터 하이힐은 이제 여자들의 전유물이 된다. 게다가 하이힐을 신으면 루이 14세처럼 위에서 아래로 남자들을 내려다볼 수 있다. 물론 지금은 여자들도 일을 하기 때문에 여자용 구두 굽 높이도 낮아졌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들이 하이힐에 대해 대단히 복잡한 시선을 갖고 있는 점도 이해가 간다. 루이 14세 때나 지금이나 하이힐의 주는 상징이 있기 때문이다. 기사에 나오는 재미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이브 생 로렁에서 하이힐을 하나 사갖고 가서, 이틀만에 굽이 부러져 AS를 요청한 고객에게 했다는 말이다. «Mais enfin, madame, ces chaussures ne sont pas faites pour marcher!.» / “하지만 손님, 이 구두는 걸어다니라고 만든 것이 아닙니다!” -------------- 1. 원산지는 아마 오토만 제국인 것으로 추정된다. 플랫폼 슈의 한 종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21 chaussures à la semelle rouge de Louboutin: http://www.laboiteverte.fr/21-chaussures-a-la-semelle-rouge-de-louboutin/ 3. Why did men stop wearing high heels?(2013년 1월 25일): https://www.bbc.com/news/magazine-21151350
감자튀김의 세계적인 다양성
https://www.atlasobscura.com/articles/french-fry-dips-around-the-world 감자튀김의 원조가 어느 나라인지는 프랑스와 벨기에 간에 이견이 있기는 한데(참조 1), 벨기에 문헌을 보면 1781년에 이미 “100년도 더 전부터 이렇게 먹었음”이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1600년대에 벨기에가 감튀를 먹을 가능성은 좀... 원조를 거론하기가 무의마할 정도로 감자튀김은 전세계로 퍼졌다. 감자가 워낙 화성을 비롯하여(…) 아무데서나 잘 자라나고 “튀김”이라는 조리법 역시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유서 깊은 요리 방식이니 궁합이 잘 맛다고 할 수 있겠다. 맛도 당연히 좋고 말이다. 다만 현대식으로 튀기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19세기 중반부터라고 한다. 그리고 이 감자튀김이 전세계로 확산됐다. (오죽 했으면 가짜 감자도 등장했을까? 참조 2) 게다가 전세계는 감자튀김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온갖 변형을 시킨 것이다. 즉, 어느 감튀를 먹느냐가 당신을 드러낸다. (나는 마요네즈 소스를 선호한다.) 그래서 감자튀김을 나라별로 나누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한 나라 안에서도 취향이 다양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주말 특집 기사는 감튀를 소스 별로 분류해 봤다. 1. 크림 마요네즈와 관련 소스를 가리킨다. 주로 벨기에와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많이 곁들이며 북유럽 국가들은 이 마요네즈에다가 각종 양념과 피클을 덧붙였다. 게다가 마요네즈가 다 같은 마요네즈가 아니다. 이를테면 커리 마요(벨기에, 네덜란드)가 있고 머스타드가 들어간 마요(독일)이 있다. 파인애플 푸레와 커리 파우더가 들어간 “브라질 소스”도 있다(벨기에 발명품이다, 응?). 물론 벨기에의 감자튀김 판매소는 온갖 소스가 다 있기에 벨기에는 이거다! 하기가 참 그렇다. 2. 케첩 아무래도 미국이 퍼뜨렸을 것이다. 물론 케첩도 세계 각국은 가만 두지 않았다. 커리 양념이 들어간 케첩(독일,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응?)이 있고 바나나 케첩(필리핀)도 있다. 칠리를 넣은 케첩(동남아시아)도 있으며 영국의 brown sauce는… 그것도 케첩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케첩의 숟갈 당 설탕량은 바닐라 아이스크림보다 많다고 한다. 3. 식초(vinegar) 대영제국의 유산, 맥아식초(malt vinegar)를 가리킨다. 감튀만이 아니고 정어리 튀김에도 어울리는데, 당연히 구 영국 식민지 국가들에서도 많이들 곁들어 먹는다. 특히 영어권 캐나다가 대표적인데 캐나다에는 영어권만 있지 않다. 4. 육즙(gravy) 불어권 캐나다도 있다. 퀘벡에서 좋아하는 소스가 바로 육즙 기반이다. 다름 아닌 푸틴(poutine)을 가리키는데, 미국 북동쪽(뉴저지)에도 비슷한 소스를 곁들인 “disco fries”가 있다고 한다. 다만 미국 버전은 푸틴의 치즈를 모짜렐라로 바꿨다고 하는데, 소스에 찍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입히는 것에 가깝다. 그 외 육즙과 칠리치즈, 이태리식 푸틴도 있으며, 감튀에 뿌리기보다는 옆에 다른 접시로 나온다. 추운 곳에서는 아무래도 이렇게 먹어야 하지 않을까. 다만 푸틴은 한 다음 바로 먹어야지, 이튿날 먹으면 안 된다고 한다. 5. 파우다 일본과 인도, 필리핀 등에서 볼 수 있는데, 이미 튀길 때부터 양념을 입히기도 한다. 커리나 고추, 마살라 양념 등이 들어간다. 특히 일본은 김과 콩버터, 깨 등으로 만든 파우더를 감튀랑 봉지 안에 넣고 흔들어서 섞는 것(참조 3)도 있다고 한다. 글쓴이는 파우더를 높게 평가한다. 이미 건조됐기에 감자를 촉촉하게 만들지 않아서이다. 그래서 일본과 인도가 파우더 왕국인 점이 놀랍지 않다. 일본이야 후리카케(振り掛け)와 시치미토가라시(七味唐辛子)가 유명하고, 인도야 덧붙일 게 있을까. 6. 기타등등 위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형태, 얼마든지 있다. 특유의 치즈(сирене)가 들어간 불가리아식 감튀나 Mujdei라는 마늘 소스가 들어간 루마니아식 감튀가 있고, 고기가 들어간(lomo saltado) 페루식 감튀도 있다. 핫도그 조각이 들어간 salchipapas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글쓴이가 평가하기로는 베트남이 제일 특이하다. 감자튀김에 버터와 백설탕이 제공되기 때문이다(참조 4). (감튀+설탕/버터가 일반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 참조 1. 감자튀김의 뿌리(2013년 1월 3일): https://www.facebook.com/minbok/posts/307277192726901 2. 소비예트의 구내식당(2019년 2월 10일): https://www.vingle.net/posts/2568674 3. 후루포테(ふるポテ)를 가리킨다. 4. Fries Around The World(2015년 8월 28일): https://youtu.be/lVIShHPpL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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