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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 장군과 탄금대 전투

임진왜란 발발 직후 부산을 함락하며 기세 등등한 왜군은 당시 조선 조정의 예상과는 다르게 승승장구 북진을 하며 한양으로 급속히 올라온다. 놀란 조선 조정은 당시 가장 인정 받던 신립을 장수로세워 왜군의 북진을 막게 하는데... 과연 신립은 누구고 그가 펼친 탄금대 전투는 무엇일까? 위의 URL을 참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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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년 전 송나라의 거리를 함께 걸어요 ! ( 초스압 )
송나라 북송 시절 장택단이라는 사람이 송의 수도였던 개봉을 그린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라는 작품. 아주 유명한 작품인데 그냥 봐도 긴 편인데, 세세하게 보면 당시 개봉의 풍경과 생활상을 너무나도 오밀조밀하게 잘 그려두었습니다. 그래서 고화질 짤로 확대해서 보면 참 재미나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그림인데... 늘어놓은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과 무언가 설법을 하는 도사를 모여서 보는 사람들 가마 모는 사람들과 낙타에 짐을 채워서 가는 사람들 아래서는 사람 한명이 옮기다가 실수로 떨어뜨리고 옆에서 그걸 흚겨 보는 장면. 강가에서 펼쳐지는 무대와 뒤쪽을 통해 '백스테이지' 에 물건을 전달하는 사람 가게에 앉아있는 여자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남자 술집에 사람들 들어가고, 왼쪽 아래서는 근처에서 뭘 파는 사람이 다리 꼬고 앉아 있고, 술집에는 창이 보이는 2층 자리가 있고, 이 창가 쪽의 '베란다' 에 경치를 즐길 수 있는 매화나무 같은걸 깔아두었습니다. 큼지막한 돌다리로 사람들 지나가고, 그 돌다리 좌우로 노점상들이 줄지어 늘어진 광경. 그리고 수로를 통해 물자를 보급하는 배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강가 근처에서 소를 타고, 염소와 함께 짐 위에 오리를 싣고 태평하게 가는 사람. 옆에서 키우면서 바로바로 고기도 잡습니다. 강이 보이는 전경 근처의 식당에 앉아 있는 사람들. 턱을 괴고 기대서 구경하는 사람도 있고, 옆에서 뭘 들고가는 하얀속 옷 입은 사람은 음식 가져다주는 점소이 쯤 되는듯? 오른쪽엔 물가 쪽의 언저리에 앉아 있는 어린아이와 어머니의 모습. 적당히 구경거리로 싸움박질 같은걸 하는걸 사람들이 구경하는 모습 여기는 그냥 진짜 길거리 싸움이 나서 난리가 났습니다. 한쪽에서는 높으신 분이 참가해서 군대를 사열시키고 무예 경연 같은걸 하고 있어서 다들 구경 나온 모습 여기서는 신발 장수에게 신발 사려고 한번 시착해보고 있습니다. 한쪽에선 빨래해서 걸어놓고 한 쪽에선 생활에 쓸 물을 길어갑니다. 길 가다 조정 관리들끼리 만나서 서로 잘 가시라고 인사하는 모습 한쪽에서는 낚시도 하는데 미리 넣어둔 그물을 걷는 모습도 보입니다. 느릿느릿하게 가는 마차 뒤쪽에 애 한명이 앉아 있자 소독차 따라가는 애들마냥 좋다고 따라오는 아이들 두 사람이 들어서 가는 인력거가 있는데 택시 정류장 느낌인지 일 없는 인력거가 나란히 있고 그걸 모는 듯한 사람들도 일이 없으니 앉아 있습니다. 아래쪽엔 수레 타고 가는 여자가 있고, 그 뒤에 기르는 멍멍이를 묶어서 계속 따라오게 하네요. 이 송나라 시대 개봉 거리의 모습에 대해서는 동경몽화록이라는 책이 있고, 여기에 이 청명상하도가 있어서 정말 그림처럼 디테일하게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후대에서 옛 시대 의복이라던지 생활상을 재현해서 그릴때 엄청난 참고를 했고... 가끔 심심할떄는 이거 고화질로 해놓고 확대해서 하나하나씩 보기만 해도 재미나더군요. 출처ㅣ에펨코리아
미국에게 버림받은 민족, 몽족(Hmong)
인도차이나 반도 북부에는 울창한 정글과 더불어 해발 수백미터를 기본으로하는 산악지대가 펼쳐져있다. 험난한 산세가 쳔혜의 국경선이 되어 라오스와 베트남을 가로지른다. 이 지역 산 속에는 몽족(Hmong)이라고 하는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중국 남부에 사는 묘족(苗)의 일파로, 인도차이나 반도 산악지대를 따라 퍼져있었다. 라오스와 베트남에서는 몽족들을 moi(야만인)라고 부르며 차별했다. 특히 베트남 왕조들은 이들의 토지를 빼았고 탄압했으며, 몽족들은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힘들게 살아갔다.  19세기 인도차이나를 식민지화한 프랑스는 이들을 '산악인'이라는 뜻의 몽타냐드(Montagnard)로 불렀다. 1960년, 남북으로 나뉜 베트남은 냉전의 대리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은 물론이고 캄보디아와 라오스까지 공산화 될 위험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가본 적 조차 없는 북부 산악지대는 극소수의 특수부대만으로 커버하기엔 너무나도 광대했다.  이에 미국정부는 '현지세력을 포섭하여 이들을 이용해 게릴라전을 펼친다'는 전략을 택했다. (Hamlet Program) 당시도 몽족은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모두에게서 과거 조상들이 그랬던 것과 똑같이 차별 받으며 살고 있었다. 미군은 산악지역 곳곳에 미육군 특수전단(통칭, '그린베레') 대원들을 보냈다. 깊은 오지에 있는 몽족마을을 찾아간 그린베레 대원들이 한 일은 매우 평범했다. 이들은 간단한 진료와 진통제를 주는 의료봉사를 했다. 아이들에게는 C-레이션에 든 사탕과 과자를 주었다. 문명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던 몽족들에게 미군들은 말 그대로 '자비로운 천사'와 다름 없었다.   '어디선가 나타나 병을 고쳐주고 먹을 것을 주는 키 큰 백인들'에 대한 소문은 곧 다른 몽족 마을에도 퍼졌다. 그린베레 대원들은 곧 몽족들에게 형제로 받아들여졌다.  미국정부는 몽족 추장들에게 '자신들을 도와주면 합당한 보상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심지어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몽족들의 나라를 건국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도 했다. 몽족들은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던 자신들을 처음으로 인간대접 해준 미국인들에게 고마워하며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미군들은 해발 940m에 있는 롱창(long Cheng)에 비행장을 건설했다. CIA는 이곳을 게릴라전 전진기지로 썼다. 공항이 완성되자 몽족들을 훈련 시키기 위한 캠프도 세워졌다. 미군은 몽족들에게 학교, 병원, 은행 같은 복지 인프라를 제공했다. 미국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몽족은 당시 어린아이 노인을 포함한 남성의 약 60% 정도가 베트남전에 참가해 북 베트남 후방 지역의 교란과 베트콩의 보급로 차단, 미군 포로 구출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전쟁이 한창일 때 몽족은 약 6만명 가량의 병력을 보유했었다. 몽족 민간인들은 부대에서 미군들의 부대에서 일을 하며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풍족한 생활을 했다. 몽족에게 롱창은 미군이 만들어 준 낙원이었다. 그 밖에서 산악지대 곳곳에는 몽족들로 구성된 전술기지가 퍼져서 북베트남군과 싸우는 훌륭한 요새가 되어주었다. 그린베레들은 몽족이 가진 특성을 눈 여겨 보았다. 이들은 체구가 베트남인들보다 작았으나 고산지대에 살던 덕택에 지구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좋았다. 그리고 베트남인들에게 차별받던 탓에 독기만 남은 악바리 성질이 있었다. 몽족들은 미군 특수부대의 훌륭한 보조병이 되어주었다. 싸우자 하는 의지도 확실했고, 그 어려운 훈련도 군말 없이 잘 따라왔다. 미군들은 몽족 부대를 남베트남군보다 훨씬 신뢰하며 믿을 수 있다고 여겼다. 미군들을 이들을 '야드(Yards)'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자신들을 차별하던 베트남인들에게 복수를 할 기회가 생기자, 몽족들은 아주 원수진듯 맹렬하게 싸웠다. 심지어 포로로 잡은 베트콩 간부가 욕을 하자, 그 자리에서 때려죽였다. 미군 특수부대원들은 이런 몽족의 습성을 어느 정도 묵인 해주었다. 이는 남베트남 정규군과도 마찬가지라서, 서로 총을 쏘지만 않았을 뿐 툭하면 패싸움을 했다. 사이공의 남베트남 정부는 몽족의 자치권을 끝까지 인정해주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1972년, 미국은 베트남이라는 수렁에서 발을 빼고 싶어했다. 그리고 파리 강화협정에 따라 미군은 베트남에서 완전 철수를 결정했다. 항상 비행기로 붐비던 롱창 역시 버려졌다. 미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고, 몽족의 짧은 전성기는 그렇게 끝났다. 1975년, 남베트남은 패망했고 전쟁은 북베트남의 승리로 결말 지어졌다. 그리고 미국의 개를 자처했던 몽족들은 엄청난 탄압을 받게 됐다. 북베트남군은 라오스정부와 협력하여 산악지대로 가는 모든 길목을 차단했다. 몽족들은 살기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숫자와 장비가 더 많은 북베트남을 이길 순 없었다.  유일하게 몽족을 위해 목소리를 내준 것은 그들과 제일 가까이 지냈던 그린베레, SOG 같은 특수부대들이었다. 같이 싸웠던 전우들을 버리기 싫었던 그들은 미국방부에게 몽족들을 도와야한다고 주장했다. 남베트남이 패망한지 열흘이 지난 1975년 5월 11일, 미국이 보낸 최후의 수송기 편대가 롱창에 착륙했다. 미국정부는 몽족 고위인사와 장교 같은 소수의 인원만 망명을 허락했으나 인근에 사는 수많은 몽족 민간인들이 이 동앗줄을 붙잡기 위해 몰려왔다. 약 3천명 가량의 몽족이 비행기에 탈 수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남겨졌다. 북베트남에게 항복한 몽족들의 최후는 처절했다. 남성들은 총살 당했고 아이와 여성들은  재교육을 위해 수용소로 보내졌다. 수만명의 몽족들이 북베트남의 박해를 피해 태국 국경으로 몰려들었다. 태국정부는 몽족난민을 골치거리로 생각했고, 겨우 죽음을 피한 사람들도 난민캠프에서 절망적인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로도 수만명의 몽족난민이 미국, 프랑스, 유럽으로 망명을 신청했다. 이들은 새로운 땅에서도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살았으며, 베트남계하고는 말조차 섞지 않았다. 베트남과 라오스의 정글에는 현재도 수천명의 몽족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수십년간 베트남과 라오스 정부의 탄압을 피해 정글을 떠돌며 현재까지도 비참하게 살고 있다.  인권단체들의 항의에도 베트남과 라오스 정부는 이들이 반군이라며 주기적으로 소탕을 하고 있다, 영화 '그랜토리노'에서 주인공 마을에 사는 아시아인들이 바로 이렇게 망명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몽족 난민들이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 속 커츠대령은 자신을 따르는 산악민족들을 규합하여 정글 속에 작은 왕국을 세웠다. 이 또한 몽족과 그린베레의 관계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다. (출처)
우리나라 산에 나무가 많은 이유.txtjpg
1. 한국은 온돌로 난방을 하는 국가 였음. 2. 온돌 난방은 마른 나무인 장작을 땔감으로 사용해서 나무 소비가 엄청난 난방방식 이었음. 3. 한반도 기후도 나무가 크는데 장애가 됨 4. 한반도는 가을부터 봄까지 건조한 날씨가 계속되어서, 수시로 일어나는 산불에 산이 홀라당 타버리는 일이 계속 생김 5. 한국의 난방 방식은 변함이 없어서 해방 이후에도 지리산과 개마고원같이 사람이 들어가기 힘든 지역을 제외하고는 한반도에 제대로된 숲이 사라져 갔음 6. 6.25전쟁이 터지자 그나마 남아있는 산림도 파괴되어버려 당시 유엔 보고서는 한국의 산림은 복구될 수 없다고 보고하였음 7. 당시 월드뱅크는 개발도상국들에게 나무를 심는 자금을 지원했었음. 8. 하지만, 개도국들은 나무를 심는 자금을 돈으로 주면 삥땅을 처먹어버리고, 돈 대신 묘목으로 주면 대충 심고 관리를 안해 나무가 죽지읺고 뿌리를 내리는 활착율이 10%도 안나오는 상황이었음. 9. 625전쟁으로 산림이 폐허가 된 한국에도 월드뱅크의 지원자금이 나옴. 10. 처음에 한국도 삥땅 의혹을 받았음. 11. 월드뱅크의 식목 지원자금으로 묘목을 사는게 아니라 석탄과 시멘트 탄광을 개발한 것임 12. 월드뱅크가 삥땅이라고 ㅈㄹ했지만, 한국의 설명을 듣고는 납득을 해버림. 13. 장작으로 난방을 하고 나무로 집을 짓는 한국에 나무를 심기만 해서는 제대로 크지도 못하고 땔감이나 기둥이 된다.나무대신 땔감과 건출자재를 대신할 수 있는 대안을 먼저 제공해 줘야 한다는 논리 였음. 14. 탄광들이 가동되기 시작하자 , 연탄이 보급되기 시작했고, 목재 가옥은 시멘트 양옥으로 대체되기 시작함. 15. 두번째 한 일은 화전민을 없애는 것이었음. 16. 그나마 나무들이 있는 깊은 숲속에는 화전민들이 일부러 불을 질러 나무를 태워 없애고, 그 자리에 농사를 지어 먹고살고 있었음. 17. 화전민들을 산 밑으로 이주시킴. 18. 화전민들에게도 있는 한국인들의 높은 교육열을 자극하고, 먹고 살 일거리를 마련해 줌. 19. 어린 자식들까지 교육도 안시키고 화전민으로 키울거냐는 말이 화전민들에게 먹힘. 20. 화전민 정착촌을 근사한 양옥으로 지어주고, 그 곳에 학교를 만들어 줌. 21. 화전민 여자는 국가가 운영하는 묘목 키우는 농장에 일군으로 고용했고, 남자는 벌을 치는 양봉을 할 수 있게 지원했으며, 산에 있고 싶으면 산을 지키는 산지기로 채용해주고 임금을 줌. 22. 도시에 살고싶다는 화전민이 있으면, 환경미화원으로 고용해서 먹고 살 거리를 마련해주며 화전민을 줄여나감. 23. 당시 숲이 많은 강원도에만 3만명의 화전민이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을 이렇게 정리함. 24. 이렇게 사전정비를 한 후 나무를 심기 시작함. 25. 공무원들을 활용했음. 26. 당시에도 공무원들은 해당 지역 출신들이 읍사무소, 면사무소를 장악하고 있어 묘목을 주고 나무를 심으라고 하면 민관이 한통속이 되어 제대로 정부 지시가 작동이 안되었음. 27. 교차 검사가 신의 한수 였음. 28. 경상도 공무원은 전라도로, 전라도 공무원은 경상도로 보내는등 타 지역으로 보내서 교차 검사를 하게 함. 29. 여기에 공무원들간에 경쟁을 붙임. 30. 묘목이 심어서 죽지않고 제대로 자라나는 활착율이 높은 지역의 공무원들에게는 특진과 성과급을 줬고, 낮은 지역의 공무원들은 성과평가를 까버림. 30. 자기가 속한 지자체가 성과평가를 잘 받기 위해서는 타지역 점수를 까내려야 함. 어설프게 술한잔 접대받고 타지역 점수를 잘 주면 자기 조직 평가가 망가지기때문에 공무원들이 눈에 불을 킴. 31. 이렇게 깐깐하게 검사를 하다보니, 활착율 100%라는 숫자가 나옴. 32. 월드뱅크는 활착율 100%라는 숫자를 믿지 않았음. 개도국들 평균 활착율이 10%도 안나오는데, 묘목 하나도 안죽이고 100% 다 키운다는 활착율은 사기라고 평가함. 33. 그런데 활착율 100%는 사실이었음. 34. 묘목을 공급할때 이동 과정이나 심는 과정에서 묘목이 죽는것을 감안해서 110%를 보통 공급했음. 35. 곰무원들은 110%의 묘목을 받으면 100%를 일단 지정된 장소에 심고, 남은 10%를 다른 곳에 심어서 키움. 36. 타지역 공무원들이 활착율을 점검하러 오는 시기가 되면, 나무를 심은곳에 다시 가서 말라죽거나 비실비실하는 나무가 있으면 딴곳에 짱박아 심은 나무로 교체를 해버림. 37. 해픙과 돌산으로 나무가 자랄수 없는곳으로 간주받던 포항시까지 녹화사업이 완료될 정도였음. 38. 포항 영일구의 경우 흙도 없이 암반층만 노출된 상태로 풀도 자라기 힘든 지역임. 이 가파른 암반층에 허리에 줄을 묶고 인부들이 올라가서 도랑을 파고 물을 부어 퇴적암반이 풍화되게 한 뒤 거름을 섞어 나무를 심고 가물면 물을 길어다 주고 매년 비료를 주는 생고생 끝에 산림이 복원됨 39. 당시 아카시나무 같은 외래종을 심어서 욕을 먹었으나, 아까시나무는 수명이 짧은 나무라 산림환경이 조성된후 자연적으로 죽으며 떡갈나무등 활엽수로 대체되고 있는 중임 40. 당시 녹화사업은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산림이 자연스럽게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기 위한 과정의 성격으로 당시의 척박한 토질환경에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음 41. 60년대에 메마른 토양에서 잘 자라는 큰 키나무는 리기다소나무, 사방오리, 아카시나무 정도밖에 없었고, 아카시나무의 경우 뿌리혹박테리아의 질소고정으로 척박한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나무였음 42. 외래종을 심어 생태계 교란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외래종들이 나이를 먹어가며 말라죽고 자생 활엽수림에게 자리를 내주면서 자연스럽게 산림 복원이 이뤄지게 됨 43. 최초 계획도 1차는 아카시나무등 생명력이 강한 픔종, 2차는 소나무등 중형목, 3차는 경제성이 좋은 대형종으로 10년씩 3차로 미리 게획된 초장기 프로젝트 였음 44. 하지만 정치적인 일로 인해 2차까지만 진행되었음 45. 여튼 1982년 유엔 식량농업기구는 한국은 2차 세계대전이후 산림녹화에 성공한 유일한 나라 라고 보고서를 발간함 한줄요약. 1970년대까지 한국 산에는 나무들이 거의 없었음. 100억 그루 이상 묘목을 심어 40년을 키워 울창한 한국 산이 됨. ㅊㅊ 더쿠 모야 대박신기함 ㅋㅋㅋ 교차검사 대박 머리 개 좋은듯 ㅇㅇ 역시 극한의 효율 민족 아니겠음?
한국의 미 (in 국립고궁박물관)
'안녕, 모란' 특별 전시만 소개하기엔 상설전시 또한 훌륭하여 따로 게시하게 되었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다방면으로 매력적인 곳이며, 역사를 좋아하거나 배우는 이들에겐 놀이터 그 자체일겁니다. 2층 : 조선 왕조의 상징물과 기록물 위주의 전시 조선의 국왕과 궁궐, 왕실의 생활에 대해 알 수 있는 전시입니다. 왕의 초상화부터 옥쇄, 대표 유물, 방의 내부 및 용포 등 다양하게 볼 수 있습니다. 왕의 글씨도 볼 수 있는데(어필각석), 힘 있고 정갈한 필체에 감탄하였습니다. 여러 왕의 글씨를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격조 높은 왕실의 생활과 문화를 잘 보여주는 궁중 물품'이기에 화려하고 섬세하며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왕과 그 주변인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1층 : 대한제국실과 어차 순종 황제와 황후가 타던 자동차(어차)입니다. 뒤 모니터를 통해 어차의 움직임을 볼 수 있으며, 이 공간에서는 황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대한제국 선포를 전후하여 전면에서 근대화를 위한 일련의 노력이 있었으며, 일본 미국 유럽을 통해 전기 철도 우편 등의 신기술과 문화가 유입되었고 이를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왕실 가족의 사진 및 영상, 각종 가구 및 설명에 대해 보고 들으며 그때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지하 1층 : 조선 왕실의 예술과 의례 그리고 과학 문화의 역사 마지막 상설 전시를 보러 지하로 내려가는데 보인 이 광경에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고종 중건 경복궁(좌)과 일제 강점기의 경복궁(우) 그리고 육조거리 모습을 재현한 모형입니다. 앞에 있는 망원경으로 여기 저기 둘러보는데, 섬세함에 놀라고 그때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궁중 서화실에서는 요지연도, 신선도를 비롯하여 연잎 모양 큰 벼루, 궁궐의 장식 그림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전시실에서 제일 좋았던 건, 사계절에 따라 변하는 궁의 풍경을 담은 영상이었습니다. 의자에 앉아 시원한 에어컨 아래 사계절을 눈에 담으니, 아 정말 좋더군요. 고궁박물관 만세입니다. 왕실 의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는데, 의례를 치를 때는 절차마다 연주되는 음악부터 기물, 음식, 복식에 이르기까지 각종 형식을 제도에 맞춰 행하기 위해 정성을 다하였다고 합니다. 이건 군영의 중앙을 나타내는 청룡기인데, 실제로보니 생각보다 더 커서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조선의 군사 신호 체계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과학 문화 공간에서 앙부일부 시뮬레이션과 큰 돌에 새겨진 천문도도 놀라웠지만, 제일 감탄했던 것은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입니다. 파수호에서 흘러내린 물이 수수호로 들어가 살대가 떠오르면 부력이 지렛대와 쇠구슬에 전해지고, 쇠구슬이 떨어지면서 동판 한쪽을 치면 동력이 전해져 나무로 된 인형 3구가 종과 북 징을 쳐서 시보장치를 움직인다. 나무인형 둘레에는 12신을 배치하여 1시부터 12시의 시각을 알리도록 하였다. 진짜 원리 무엇입니까. 이것이야말로 국뽕에 취하는 거 아닙니까. 와! 저는 자격루를 보며 다시 한번 이곳에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ps.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다는 지식백과 내용에 주먹을 꽉 쥡니다. 애국심이 사라진 지 오래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는 걸 느낄 수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던 에드워드 카의 말에 따르면, 오랜만에 진중한 대화를 나눈 셈입니다. (미래적인, 애국심, 역사...) 빛을 완전히 잃기 전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떨까요? 문을 나설 때 무언가 달라져있음을 느끼실 겁니다. *국립고궁박물관(https://www.gogung.go.kr/) 홈페이지에서 VR을 통해 상설전시를 간접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