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do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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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료후 한달 피곤한 첫 예비군 훈련을 무사히 마쳤다. 나도 밖에서는 평범한 대학생일 뿐이었지만, 머리를 짧게 자르고 7주 동안의 해병대 훈련을 받고, 빨간명찰을 달고나니 군인으로서의 자아가 조금씩 형성됨을 느끼고 있다. 외적인 면에서는 살도 찌고 몸집이 불어나는 등 2년 후 있을 야구를 바라볼 때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 공부에는 끝이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즉 우리는 우리는 부족, 결핍이 항상 넘쳐나는 존재라는 것임을 반증한다. 왜냐하면 간단한 지식의 부재에 기인한 순수한 탐구욕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추상적인 관념, 정보를 스스로 떠올리기도 하고, 받아들이면서 결국 n시 n분 n초의 나는 n+1시 n+1분 n+1초의 나와는 같아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내가 말하는 자아는 이런 것들을 사유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이전의 나와 달라진다는 걸 말하고 싶은게 아니라 , 관념적 자아의 변화는 시시각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위에서 밝혔듯 나는 2014년 12월 29일부터 해병대 훈련을 받았고, 2015년 2월12일에 수료를 했으며, 지금 2015년 3월 14일에는 그 뒤 정확히 한 달하고도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 동안 나는 ‘해병’의 자아를 얻어 기존의 나와는 분명히 다르게 되었다. 또한 2015년 3월13일에는 오랜만에 만나 뵌 사촌형 내외에게서 술을 얻어먹고 큰 도로에서 혼자 택시가 내 뒤에서 경적을 울릴 때까지 걸으면서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이 쯤이면 2015년 2월12일의 나와도 분명히 다를 것이다. #2 Cōgitō ergo sum 모든 사물을 의심했던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가 더 마음에 든다. 왜냐하면 나 자신은 아까와 같은 끊임없는 생각을 거듭하면서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기도하고, 더 나쁜 쪽으로 떨어지기도 하지만, 결국 ‘생각’이라는 존재의 전제는 ‘나의 존재. 혹은 존재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내가 없으면 생각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 ‘나의 존재’는 ‘생각’이 없다면 변화할 수 없다. 정말 신기한 관계다. ‘나의 존재’와 ‘생각’은. ‘생각’은 ‘나의 존재’에 대해 종속성을 띄고 있으면서도 ‘나의 존재’가 원하는 바가 자신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상호보완적인 성격 역시 띌 수 있다. 내 식견이 좁아서 위와 같이 종속성과 상호보완성을 띄고 있는 관계가 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오늘 택시도 잘 왕래하지 않는 거리를 혼자 걸어오면서 생각해낸 이 관계가 가장 멋있고 마음에 든다.-. 지금 이 글을 적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변화하였다. 생각이라는 녀석 덕분에. 그래서 나는 ‘끊임없는 생각’을 원한다.- #3 공상 사람이 태어나면서 0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해보자. 범죄자는 -10정도로 좌표를 정해보고 대통령이나 아니면 사회에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들을 +10 좌표에 둔다면 과연 무엇이 애초에 0에 서있던 이 사람들을 음으로 가게 만들고, 또 양으로 가게 만들었는가? 또한 그 좌표계가 1차원이 아니라 3차원, 4차원, 심지어 무한대의 차원으로 확장된다면 어떤가? 간단하게 X좌표를 사회적 지위, Y좌표를 도덕적 지위, Z좌표를 경제적 지위로 놓고 생각해보자. Z좌표에서 최상위권에 있는 사람들은 0의 위치에 있던, 아직 온전한 자아가 형성되지 않은 어린 시절과 비교해볼 때 결과적으로는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적어도 한 번은 해보았을 것이다. Y좌표에 서 최하위권에 있는 사람들은 똑같이 이런 생각을 적어도 한 번은 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저 새끼를 죽일 수 있을까?’ -다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해서도 짚어봐야 하니 논제이탈이 되지 않는 선에서 정리하도록 하겠다- 와 같은 잔인한 생각들. 결국 자신이 어떤 자아를 갖추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되는지는 본인이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느냐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나는 이렇게 X좌표, Y좌표, 그리고 Z좌표에, 혹은 그 이상의 좌표들에 각 지위의 정도를 매겨 생각해보면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성격을 어느 정도는 정확하게 그 공간 상에 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느 한 지점에서 다른 한 지점까지 선을 한 획 그으면 그 선 안에는 무한대의 점들이 집합하였듯, 사람들의 성격 역시 그렇게 무한하고도 미지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선들이 수없이 많이 생성되어 있는 걸 생각하면 한 층 더 풍성하게 사람의 성격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엄청나게 돈이 많지만 전과가 여러 번 있으면서도 사회적 지위는 높은 사람들은 X좌표에서 높게, Y좌표에서는 낮게, Z좌표에서는 높게 나타날 것이다. 또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그 좌표에 위치하게 되면서, (즉 그 ‘정도’의 지위에 이르게 되면서,) ‘그들 본인의 존재’가 이 좌표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그와 관련된 생각을 했는지, 혹은 적게 했는지 판단할 수 있다. 한편 사람의 성격이 ‘나의 존재’가 처해있는 여러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동할 수 있기 때문에 좌표 이동이 꽤 유동적이라 해 둔다. #4. 유물론VS관념론. 나는? #1과 #2는 3월 14일 오후 11시쯤에 피씨방에서 작성한 글이다. 아버지가 늦게 까지 귀가하지 않는다고 다음 날 나를 나무라셨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한테 그래도 피씨방에서 게임은 안하고 글을 쓰다가 왔다고 그러니까 미친놈이라고 하시면서 무슨 주제를 가지고 썼냐고 하시니 #1과 #2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내가 생각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이 유물론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내 말을 잘 듣고 판단하신 것인지는 모르겠다. 왜나 하면 나는 ‘나의 존재, 혹은 존재성’이 있기 때문에 내가 ‘생각’이라는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생각이라는 것은 ‘나의 존재’에 종속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물질을 제1차적 근본적인 실체로 생각하고, 마음이나 정신과 같은 관념적인 존재를 부차적으로 파생적으로 보았다는 점에서는 유물론과는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라는 내 표현을 들으셨을 때 내가 유물론적 사고를 하고 있다고 판단하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이 ‘나의 존재’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 역시 유물론의 입장인가? 한편 관념론이란 이론적이든 실천적이든 관념적 대상을 실재적 혹은 물질적 대상보다 우위에 위치한다고 보고 있다. 두 입장 모두 실재와 관념 사이의 우위만 논하였을 뿐 어느 한 쪽도 하위 대상의 존재를 부정하진 않았으며, 각 담론에서 주장하는 하위 대상이 상위 대상에 대해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관념론에서는 관념이 실체에 앞선다, 유물론에서는 그 반대로 이해) 물론 철저히 내 사고의 범위 속에서 이뤄진 주관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에 대한 기존 학자들의 언급 여부는 말하기를 거절한다. …?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내가 했던 생각이 잡생각은 아니었다는 안도감과 내가 생각했던 게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누군가가 했던 생각이라는 사실에 약간의 씁쓸함도 느끼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기존에 있던 담론들은 분명 뛰어난 것임에 틀림없지만 내가 생각한 것도 어쩌면 만일 그들이 ‘하위 대상이 상위 대상에 대해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면,-누가 이거 좀 말해줘! 씨발!- 꽤 괜찮은 발견이라 말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나만 생각한 줄 알았던 발견을 누가, 어떻게 표현하였는지 또 얼마나 자세히 설명하였는지 배우면 된다. 아마 그것을 내가 배울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데! 그리고 성장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진정 #1, #2의 나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고, 또 앞으로도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 . . . 지금도, ‘철학’이라 쓰여있는 선을 상상해보면 나는 양의 방향으로 ‘생각’이라는 수레를 타고 움직이고 있다. 물론 ‘INSANE’이라 쓰여있는 선에도 그러고 있을 것이지만!
Judo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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