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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역

눈을 감았다 뜨면 인생은 늘 차 위에서 덜컹거렸다.
속편한 여행광이라 불려졌지만 내게 떠나는 일은 떠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장 괴로운 순간 모두의 손을 탁 놓는 참혹한 선택이었다. 내게는 한번도 후일을 마련하고 가방을 쌓게 되는 시절이 주어지지 않았다. 목까지 차오르던 불안과 고통이 결국 키를 넘겼을 때, 살고자 하여 또는 삶을 저버릴 수 없어 등돌리고 새로 길찾는 일이 내게는 여행이었다. 매번 여행은 그래서 안도였고 또다른 불안이었으며 먹먹한 후회였다. 얼마나 바래왔던가. 이번엔 제발 자리잡기를, 지루할 정도로 오래 붙박히기를, 거기서 생이 그만 수렴되기를. 푸른 봄의 짧은 한 철도 끝나 농담으로라도 자신이 더이상 어리다고는 말할 수 없게 되어서야 삶이 내게 어떤 형태로 주어졌는지 그려볼 수 있게 된 것도 같다. 정착은 늘 헛되고 헛되며, 다시 또 헛된 몽상이란 것을, 나는 본래 뼈마디에서부터 그렇게 새겨져 있었다는 것을, 내게 맞는 의자란 결국 바퀴 위의 것임을 비로소 인정해도 좋지 않을까. 그러므로 내가 품어야 할 고민이란 자신을 어디에 놓을까가 아니라 어디에서 흔들리도록 할 것인가가 아니었을까. 마지막 한점까지 다 놓아버리는 일이 내 가장 편안해 질 수 있는 방법, 허용된 유일한 도로가 아니었을지.
정말 그럴지. 말하자면 몇 년마다 벌어지곤 하던 내 拒逆이란 실제로는 가장 극적인 순응의 다른 표출은 아니었을까.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먼 거리를 매일같이 오가면서, 비포장의 도로 위를 종종 튀어오르는 낡은 버스의 좌석에서, 왕복의 차창 옆을 번갈아 메꿔주는 깊은 물빛을 오래 바라보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반복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정말로 순응일지, 아니면 거역일지를. 아무런 대비도 없이 나는 내 바라는 바를 위하여 성큼성큼 시간의 검은 아가리로 걸어 들어갈 지를. 그리하여 난 결국 덜 불행해지게 될 지, 불행을 불행하다 않게 될 지를. 거스르는 일. 어긋나는 일. 도로 가는 일. 반복을 끝내는 일. 내 인생의 마지막 巨役.
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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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12 저야 제 글을 써가는 것 뿐인데 잘 읽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평안과 건강을 기원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가끔씩...넷상에서도 맑은 영혼을 만나곤합니다 드물지만...기쁜 일이지요...글 잘읽고 갑니다 좋은 나날들 보내시길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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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스터들과 가톨릭 신자들의 성지,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서울에서의 세 번째 집은 이 근처에 있었어요. 손기정 체육공원에서도 가깝고, 아현시장에서도 멀지 않고, 서울역도 지척인, 주소지에 이름 붙여진 길 이름만 봐도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만 같은 곳이었죠. 그 동네에 박물관이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 개관하면 가 봐야지 생각만 한 것이 일년여. 얼마 전에야 겨우 만날 수 있었네요. 어쩔 수 없는 집순이, 헤어날 수 없는 게으름... 후. 오랜만에 찾은 동네가 어찌 그리 낯선지, 더구나 지척인데도 자주 가지 않던 이 길은 더 생경하더군요. 박물관 가는 길의 도심 속 기찻길 서소문 밖 네거리 광장은 조선시대 공식 사형 집행지였어요. 시장으로 통하던 성문 밖에 생겨난 주막 거리 광장이었기에 본보기로 사형 집행을 하기 딱인 곳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곳에 들어서게 된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서소문 밖 네거리 역사 유적지에 담긴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잘 구현해 낸 데다가 꼭 신자들이 아니어도 누구나 와서 쉬어갈 수 있게끔 대중적으로 잘 구성된 공간이기도 해요. 전시관 내부는 상설 전시와 기획 전시로 나뉘어져 있고, 상설 전시에서는 조선 후기의 사상사를 옅볼 수 있어요. 상설 전시관은 이렇게, 종교적인 색체를 현대식으로 잘 담아낸 디자인을 택했고요. 뭔가 성스러우면서 밀레니엄 st. 이 곳에는 역사적 의미가 깃든 사료들 뿐 아니라 이런 조각 작품, 설치 작품들도 곳곳에 전시되어 있어요. 동선을 따르다 보면 위안을 주는 공간, 순교자들의 무덤인 콘솔레이션 홀을 만나게 되는데요. 이 곳에서는 미디어아트로 둘러싸인 위안을 만날 수 있어요. 계절을 담아낸 그림이 흐르고, 레퀴엠이 흘러 나오죠. 홀의 정 가운데는 순교하신 성인 다섯 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마주오는 빛을 따라 고개를 돌리면 하늘이 뻥 뚫린 공간을 만나게 되는데요. 이 곳이 바로 힙스터들의 성지, 인스타에 올릴 인생샷을 찍기 위해 잘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찾는 하늘 광장입니다. 야외 전시가 펼쳐진 옆으로 삼각대를 든 커플들이, 모델처럼 잘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줄을 서서 옷 매무새를 다듬고 있는데요. 물론 이 사진은 작품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젊은이들을 피해 저도 힙스터들의 배경이 되어 준 벽돌벽을 가득 담아 봤습니다. 거 사진 찍기 참 좋은 날씨로구먼. 하늘광장에서 왼쪽으로 시선을 두면 하늘길이라는 미디어 아트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늘길의 끝에는 자연광을 받고 있는 '발아'라는 작품이 있고요. 돌아가는 길은 다른 계단을 이용해 봅니다. 내부에 미사를 드리는 곳도 마련이 되어 있어서 신자들도 많이 찾아 오시더라고요. 젊은이들은 하늘광장에서 줄 서서 인생샷을 남기고, 신자들은 미사를 드리거나 상설 전시관에서 역사를 나누고 계시는 모습들이 대조돼서 흥미로웠어요. 공원도 잘 조성되어 있으니 날 좋은 날 방문해 보시길 :)
눈 오는 날, 뭐 하셨어요? ☃️🌨☃️
🌨 ☕️ 아침에야 잠이 들었는데 열두시 쯤 눈이 번쩍 뜨이더라고요. 벌떡 일어나 커튼을 젖히니 엄마야 세상에 그렇게 기다리던 눈이 펑펑! 와 니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아나?! 핫쵸코를 타와서 눈으로 토핑을 합니다. 생크림이 없응게 대신! 보송보송 훨씬 맛있겠지요 *_*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다 습관처럼 켠 빙글에서 눈산에 방문하신 @veronica7 님의 카드를 보고 저도 후다닥 잠옷 위에 그대로 패딩을 걸치고, 세수도 안 한 채로 모자를 눌러쓰고 집 근처 산(?)으로 향했어요. 가는 길도 이래 곱지예 *_* 그러니까 부산에 살던 때에는 겨울비가 내리는 날이면 종종 범어사를 찾곤 했거든요 그러면 눈을 볼 수 있는 날이 있었으니까. 여기도, 아스팔트 바닥에서는 금방 녹아버리는 눈이 산에는 쌓여 있을 테니까! 그리고 역시나! 이미 눈을 맞으러 오신 분들이 많아서 눈 쌓인 바닥은 단단히 다져져 있었지만 어디든 새 눈은 있으니까 발샷 한 번 박아 봅니다 후후 눈사람도 만들어서 사람들 지나는 길가에 살짝 놓아 두고요. (저처럼) 홀로 풍경을 감상하시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전 잠옷이 젖을까 걱정이 되어 엉덩이를 붙일 수는 없었습니다... 조금 더 오르니 눈이 다시 펑펑 쏟아 지고요. 영상을 찍는데 갑자기 뛰어드는 토끼도 있... 으응? 토..끼...? 보이시나요 화면을 가로지르는 맹렬한 기세의 토끼! 마침 슬로모션으로 찍고 있었던 터라 마치 스펀지 촬영본이라도 보는 기분. 인형 같지 않아요? 눈도 보송 토끼귀도 보송 토끼 꼬리도 보송... 사랑스럽다 정말... 너 춥지는 않냐 흑흑 고개를 돌리면 푸르른 대나무 위로도 이렇게 눈이 펑펑 내리고요 *_* 으아 치한다 눈에 치한다! 내려가다 보니 또 눈이 그쳐서 보이는 하늘빛도 너무 곱다 아입니꺼. 눈 밟는 소리도 들어 보실래예? 그리고 입구 가까이 오면 만들어 둔 내 친구가 서있습니다. 귀여워... 엘사가 아니라 녹지 않게 해줄 순 없어서 미안할 따름이네요. 눈이 오는데 하늘이 이렇게 곱다니. 산(?)에서 내려와 집으로 돌아와 봅니다. 하늘이 이렇게 고와요. 물론 바닥에 눈은 간데 없지만. 아스팔트 너란 녀석 뜨거운 녀석... 참. 집 옥상에도 눈사람 친구를 만들어 줬답니다. 옥상에는 눈코입을 만들어 줄 만한 게 없어서 맨얼굴이지만 대신 친구들을 곁에 두고 사진 한방 박아 주고요. 수미상관의 법칙에 따라 마지막은 다시 핫쵸코로 장식합니다 헤헤. 겨울은 역시 눈이 와야 겨울이죠! 이제 좀 겨울 같은 느낌이 듭니다. 비록 입춘이 지난 지 한참이지만...
白으로 만들어진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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