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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간의 학문일주, 장회익 "공부 도둑"

자서전을 닮은, 장회익 교수의 공부담 '공부 도둑'은 물리학이란 배를 타고 세계의 비밀을 파헤치는 흥미로운 모험을 다룬다. 그는 70년 인생을 되돌아 보면서, 그것을 개인적 성취로 다루지 않고 생명체의 진화, 그의 말로 표현하자면 '온생명'이 자신을 자각하는 단계의 어느 한 부분으로 정의한다. 이같은 표현은 본인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자긍심에 가득찬 노인의 회고록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어 이야기의 도입 부분에서 독자를 배격하는 단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내는, 관계를 맺기 위해 우리 모두가 거쳐야 할 정거장이다. 50여 페이지만 넘기면 그의 이런 뻔뻔스럽게 느껴지는 표현들은 소탈한 화법과 성실한 토로와 맞물리면서 편안하고 부드럽게 공부하면서 사는 즐거움을 전파한다. 그가 살아온 시대가 이 땅의 근대였던 까닭에 학생과 연구자로서의 그의 삶은 상당부분 척박한 환경 아래 놓인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그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주는 법. 운명은 가끔 손을 뻗어 그가 더 공부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마법을 베푼다. 그것은 결국 그가 새롭게 해체, 정립해 내고자 하는 생명의 개념과도 상통한다. 생명은 어느 개체 안에서만 이룰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바깥의 무엇과 연관되어야만 한다는 것. 그러므로 이 노학자의 공부이야기는 이야기의 내용과 그것을 담아낸 틀이 그 자신이 만들어낸 학문적 개념과 일치된다. 그 점이, 이 책을 단순한 인생담 이상의 것으로 만드는 이유다. 자신의 가계도를 살펴 알고자 하는 의지의 연원을 묻는다는 점. 잡다하다면 잡다할 수 있는 개인의 에피소드를 여럿 소개한다는 점, 가상의 대화라는 형식으로 조상과 한담을 나눈다는 점은 이 책의 단점으로 읽힐 수도,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논문을 개작한 책이 아니고 간단한 소회에서 시작해 자신이 공부해온 내력을 쉽게 전달하려는 노학자의 교수법으로 생각한다면 적어도 크게 나무랄 부분은 아니겠다. 사실 그 소소한 이야기들로 인해 책이 맛깔나지는 것도 어느정도 사실이므로. 절반 분량이 지나면, 책은 저자의 학문적 성숙기에 이르면서 깊은 사유에서 비롯된 빛나는 문장들을 폭포처럼 쏟아놓는다. 공부는 자신이 배우고 익힌 내용을 책에 쏟아놓는 작업만이 아니다. 한 깨달음은 다시 다른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수많은 레토릭에 둘러싸인 세상의 틀거리를 파악하게 돕는다. 우리가 상식이라 믿고 있는 기성 개념은 공부의 전제에 지나지 않는다. 개체의 생명을 다루기보다 이론의 자장 안에서 원리를 추구했던 물리학자 장회익이 나이들면서 녹색사상가로 변모하게 되는 비밀이 책의 뒷부분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것만 읽더라도 가치가 충분한 저작이겠다. 같이 읽고 있는 책, 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와 '공부도둑'은 결국 최대한 쉽고 평이하나 적확한 근거를 통해서 세계의 위기, 보다 정확하게는 지금의 자본주의 체계가 벌이고 있는 전지구적 생물종의 위험을 적나라하게 기술하고 있다. 개인적 성찰로 이 위기를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런 의미에서 '공부 도둑'이 훔쳐낸 학문 보물창고 속의 정수들은 그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 기한들을 올바로 인식하고 머리를 맞대지 않는다면 낱생명이 온생명을 멸종시키는 최악의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급의 공부꾼으로서, 그는 적지 않은 명예와 자리를 얻었고 더불어 경제적 보상과 존경도 받았다. 그러나 그도 이 땅의 사는 한 사람으로서 현대사의 깊은 굴곡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가 1993년에 재직하던 대학의 신문사에 기고한 글의 일부를 소개하면서 리뷰를 마치고자 한다. 한국의 68이라 할 수 있는 4.19의 와중에 그는 친구를 잃었다. 그 경험은 개인의 슬픔으로서만 남지 않고 도타운 열정으로 개인을 넘는 시대적 의무감으로 승화했다. 이 책은 그런 배움이 진짜 공부라는 것을 가장 내밀한 형식으로 주창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창은 읽는 이의 마음을 뒤흔든다. 나즈막하지만 진지하게. "(중략) 역사는 아직도 그가 맞서 싸우려던 불의에 고통받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불의는 어린아이의 눈에조차 선명히 드러나던 그날의 불의처럼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권력에 의해 순치되고 재력에 의해 타락한 제도권 언론은 몽롱한 의식을 더욱 흩뜨려주고 있다. 더 이상 역사는 열정만으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지성만으로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목숨을 아끼지 않을 열정과 함께 역사를 꿰뚫어보는 혜안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과연 그 일을 감당할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지성을 함양시켜 왔는가? 그리고 이것을 통해 역사를 살아가고 있는가? 아직도 그는 내 속에서 부활하지 못하고 있다. 올해도 그의 얼굴은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외치고 있다. 나를 부활시켜라!" - 1993년 4월 19일, <대학신문>, 장회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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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가서 잘 살아라
많은 ‘사람의 일’ 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게 다 날씨처럼 느껴져 섬뜩했다. 나의 귀는 듣지 않은지 오래. 나의 눈도 보지 않은지 오래다. 안타깝다는 말들 슬프다는 말들을 하기가 힘들어졌다. 무엇도 말을 할 만큼 잘 알지 못한다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일이면 37년의 삶을 채 정리도 못 하고서 허겁지겁 파리로 떠나간다. 엠마는 사람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렸고 사람들은 나를 볼 때마다 울었지만 나는 이 나이에 공부를 하러 간다는 말이 민망해서 한 두 걸음 뒤로 물러서며 ‘영영 가는 것도 아닌데 뭐’ 할 뿐이었다. 이 무심한 사람. 하지만 생각해보니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눈 채 그 날이 마지막 인지도 모른 채 영영 보지 못하게 되어 버린 사람들이 잔뜩이다. 또 보자는 빠른 인사로 서로를 지나쳐 열심히 걷다 보니 서로를 그 어느 날의 추억 속에 죽여 놓고 왔다는 걸 한참이 지난 후에야 깨닫게 된 것이지. 그렇게 실은 그 날에 죽여 놓고서 훗날 늦은 장례식에나 가게 되겠지. 우습다. 책들을 정리했다. 두꺼운 책들은 마음을 묶어 두려 놔두고 반쯤 읽은 책들 꿈을 사려고 무리해서 산 책들은 그만 팔아야지 하고 두 가방 가득 채워 서점을 갔다. ‘53기 김상석’이라고 이름이 도장 찍혀서 1000원의 가격이 일괄적으로 메겨지는 18년 된 영화 이론 책들 중 하나에서 엽서 하나가 흘러나왔다. 20살의 아픈 나에게 21살의 룸메이트가 써 준 오줌색의 엽서. 그 친구는 공군사관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한 친구였는데 재수 없게 굴지 않고 웃긴 광대짓도 곧잘 해서 나랑 함께 선배 방으로 자주 불려 다니던 친구였다. 그 친구는 프랑스 공군사관학교로 교환 프로그램을 가기 위해서 우리가 청원에 갇혀 있을 때 서울로 어학원을 다녀 우리의 부러움을 사곤 했었는데.. 준비를 거의 끝 마친 무렵 우리나라와 프랑스 사이의 교류 프로그램이 끝이 나버려서 아쉽게도 프랑스로 가지 못 하게 되었었다. 2년의 시간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지. 친구는 불평 한마디 안 했었지만 임관을 하고 꽤 시간이 흐른 후 나를 갑자기 찾아와 퇴역을 하고 싶다는 말을 불쑥 꺼냈었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시 소식이 끊겼다. 그가 함께 지급받은 펜으로 쓴 엽서의 마지막 줄에는 오래 두고 가까이 사귄 벗이라는 문장이 민망함도 모르고 쓰여 있었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후 철이 없던 그의 룸메이트가 프랑스로 떠난다니 웃긴 일이다. 얼마 전에는 프랑스에서 영화를 배우던 학생 한 명이 연기를 배우겠다고 나를 찾아왔다. 나는 곧 프랑스로 영화 공부를 하러 간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다른 좋은 말들을 챙겨주며 가르치는 일만은 사양했다. 이것 또한 웃긴 일이다. 나의 귀는 듣지 않는지 오래. 나의 눈도 무엇을 보지 않은지 오래다. 내일 나는 무엇도 보지 못 했던 곳으로 무엇도 들리지 않아서 귀가 괴로울 곳으로 기꺼이 간다. 내일부터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못 견뎌 뱉을지 지금의 나로선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무엇을 알아서 뱉는 것이 아닌데. 사실 그저 용기가 없어진 것일 뿐인데. 내가 무서워 못 잡은 쥐 같은 것들이 야금야금 나를 낮춰 가고 있었던 것일 뿐인데. 나는 이제 37년째 적당히 치던 도망을 끝내고 자수를 하려 한다. 추방되어 가는 곳에서 나는 가볍게 돌리던 이름 대신 외우기 힘들어 금방 대답하기도 어려운 숫자로 불리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무슨 이야기를 써야 좋은 지 모르겠다. 다만 내 마음이 자꾸 가는 두 주인공만 불러 세웠을 뿐. 가서 잘 살아라. 할머니 엄마 아빠 형 친구들 동료들 제자들에게서까지 같은 말을 듣고 와서는 개런티처럼 들려준다. 그러니 가서 잘 살아라. W 레오 P Luca Micheli 2019.11.15 파리일기_두려운 날이 우습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