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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명나라의 평양성전투 필승전법 - 원앙진으로 일본 검술 격파

[임진왜란 명나라의 평양성전투 필승전법 - 원앙진으로 일본 검술 격파]  http://kiss7.tistory.com/459 이름이 원앙진인 것은 원앙새가 죽을 때까지 한 쌍이 되어 살아가기 때문에 붙여진 것입니다. 원앙새가 죽을 때까지 한 쌍으로 살다가 한쪽이 죽으면 다른 쪽도 따라 죽는다는 말처럼 전투에서 서로간의 협력이 최상에 이르도록 하는 목적이 원앙진에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전투에 졌을 경우 대장이 사망한 원앙진의 병사들은 죽임을 당하도록 원앙진의 군법을 엄하게 하였습니다. 원앙진의 병사들은 대장이 죽지 않도록 사력을 다해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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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남극 탐험
목요일은 역시 역사지. 모두들 나치 잔당이 남미로 도망갔다거나 남극에 비밀리에 기지를 세워서 UFO를 만들었다더라 하는 전설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남극은 무슨 남극, 달나라 쯤 되어야 음모론이지, 해서 나온 영화가 Iron Sky(참조 1)였고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https://www.atlasobscura.com/articles/nazis-in-antarctica 나치의 남극 탐험은 사실입니다. 물론 UFO를 만들기 위한 비밀 기지는 아니었다. 당시 히틀러가 남극에 사람들을 보냈던 이유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마가린 얘기부터 해 보자. 마가린은 맛은 좋지만 고가에 보관도 신경써야 하는 버터의 대용품을 위해, 프랑스 정부에서 콘테스트를 개최했을 때 나타났다. 즉, 저소득층이나 군대(특히 해군)를 위한 버터 대용품이었는데, 이 콘테스트 덕분에 식품 치고는 기록이 비교적 명확하다. 19세기 중후반,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는 버터 부족 사태 때문에 대체품 콘테스트를 했고, 여기에 메즈-무리에스(Hippolyte Mège-Mouriès, 1817-1880, 참조 2)가 발명한 마가린이 우승을 거둔다(원래 그는 황제의 개인 농장에서 연구하는 학자였다). 원래 이름은 oleomargarine. 여기서 뒷글자만 빠져나와 마가린이 된다. 물론 대량생산이 가능해야 할 일, 이것까지 연구했지만 마가린을 제 때 공급 못 한 이유로(?!) 프랑스는 1870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다. 그래서 프랑스 시장에서 재미를 못 보고 오히려 특허가 네덜란드로 넘어간 건 안 자랑, 본고장인 프랑스보다는 독일과 네덜란드가 마가린을 많이 소비하는 나라가 된다. 처음에 마가린을 만드는 재료는 쇠기름이었다. 이것을 식물성 기름과 동물 지방으로 바꾸는 시도가 있었고, 때마침 권좌에 올랐던 히틀러는 경제개발 4개년 계획(Vierjahresplan, 참조 3)을 발동하는데 이 계획의 주된 목표는 전쟁 준비 및 그에 따른 전략 물자의 국산화였다. 그렇다. 마가린이 전략 물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마가린을 만들기 위해 제일 저렴한 동물 기름은 바로 고래였다! 게다가 고래 지방은 기계용 윤활유로 쓰이고 폭팔물을 만드는 니트로글리세린을 만들 때에도 유용했다. 물론 독일만 아는 사실은 아니다. 가령 영국은 1938년 고래 기름을 전략물자로 선포했다고 한다. 군비경쟁이 극심하던 당시 영국과 독일은 전세계 포경된 고래의 83%를 사들인다. 이 고래를 제일 많이 잡을 수 있는 곳은? 남극이었고 주로 노르웨이 포경선들이 맹활약했다. 그래서 남극의 노르웨이 거점, Queen Maud Land를 어떻게 좀 해보려고 한 것이 바로 나치 남극 탐험대의 목표였다. 그래서 1938년 5월, 나치는 드디어 남극 탐험대를 보낸다. Alfred Ritsche 선장을 필두로 학자와 순인, 포경업자들 82명으로 구성된 독일 탐험대는 Schwabenland라 이름 붙인 배(비행기도 탑재!)를 타고 남극으로 향했고, 다다른 Queen Maud Land를 Neu-Schwabenland(참조 4)라 이름 붙인다. 이를 알아차린 노르웨이는 왕령을 통해 1939년 Queen Maud Land가 노르웨이령임을 선포하지만 곧 일어나는 전쟁에서 노르웨이가 어떻게 됐는지는 아실 것이다(나치가 굳이 노르웨이를 쳐들어간 이유 중 하나가 남극이었다). 이 독일 탐험대는 독일인답게(…) 성실하게 남극을 탐험했고, 알려진 지도의 영역도 더 넓힌다. 정찰 및 촬영을 위해 날린 비행기는 무게를 줄이기 위해 동 지역에 철제 슈바스티카를 뿌리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남아 있을까?) 그들의 임무는 일단 히틀러의 성탄절 연설 청취(… 참조 5)였는데 남극 대기의 방해가 심해서 라디오는 껐다고 한다. 1939년 이들은 고국으로 복귀했고, 곧 전쟁이 격화되면서 아무도 이를 기억 못 하게 된다. 1958년에 일부 알려지기는 했으며, 2007년에는 논문도 하나 나온다(참조 5). 그렇다면 그동안 숱하게 나온 나치의 달기지며 UFO는 뭐일까? 신화다(참조 6). 인터뷰나 당시 기록들을 오해하거나, 일부러 오독해서 나온 도시 전설이라는 의미다. 독일은 노이-슈바벤란트에 기지를 세우지 않았으며(기지를 세울만한 물자를 싣고 가지 않았었다), 전후 미국이 남극에서 군작전을 펼친 이유는 혹한기 훈련(…, 참조 6)일 따름이었다. 역시 음모론을 만드려면 적어도 우주진출 정도는 해줘야 할 일이며, 나치보다는 소련 UFO가 더 적절하다는 느낌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시작에는 마가린이 있었다. -------------- 참조 1. 사실 후속편은 전편에 비해 별로였다. 율리아 디체(2014년 12월 21일): https://www.vingle.net/posts/640113 2. 그의 주된 연구 분야는 빵에 색상을 입히는 방법이었다. 빵을 즐기는 분들은 모두 메즈-무리에스를 기려야 마땅할 일이다. 3. 1936년부터 1940년까지이며, 이때 재무장은 물론 아우토반 건설도 추진됐다. 4. New Swabia: https://en.wikipedia.org/wiki/New_Swabia 5. Hitler Sent a Secret Expedition to Antarctica in a Hunt for Margarine Fat(2018년 8월 31일): https://www.history.com/news/hitler-nazi-secret-expedition-antarctica-whale-oil 6. Hitler’s Antarctic base: the myth and the reality(2006년 5월: http://www.histarmar.com.ar/Antartida/Base-Hitler/LaBaseAntarticadeHitler.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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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한 신라시대 경주 씨티 모습
현재 확인된 유적지와 터를 기준으로 구현함 9월 9일에 헌강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함께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성 안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고 서울(경주)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시중 민공(敏恭)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인가?” 민공이 “신(臣)도 역시 일찍이 그와 같이 들었습니다.” 하고는 아뢰었다. “임금께서 즉위하신 이래 음양(陰陽)이 조화롭고 비와 바람이 순조로와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고 변경은 평온하여 민간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덕의 소치입니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이는 경들이 도와준 결과이지 짐(朕)이 무슨 덕이 있겠는가?” 산국유사 승려 일연이 쓴 권1 진한조를 보면, “신라 전성기 경주에 17만8936호, 1360방, 55리와 35개의 금입택(金入宅: 고위층 주택)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호를 가구로 치면, 5인 가구 기준 70만~80만, 심지어 100만 이상 인구를 추정할 수 있다. 방은 고대 도시 구역의 기본 단위다. 모량리 유적과 1980~90년대 경주 도심 황룡사 왕경 유적 발굴 성과까지 포함하면, 1방의 크기는 가로세로 각각 160~120m로 추산된다. 발굴단은 모량리 일대에만 최소 200개 이상 방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른 방의 개수를 현재 경주 안팎의 땅 크기에 맞춰보면, 경주 도심은 900여방, 외곽의 모량리 방까지 합쳐 1360방에 얼추 들어맞게 된다. 방이 경주 남쪽의 불국사 근처 말방리까지 뻗어 있었다는 설(전덕재 단국대 교수)까지 넣으면, 고대 경주는 동서 30㎞, 남북 20㎞에 달하는 광역 대도시였다는 추정 또한 가능해진다. 지금 서울 한강 이남 지역의 면적을 훌쩍 뛰어넘는 규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