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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 공간 해방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

공간 <해방>과 이야기 모임 <4분 16초의 진심>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웁니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지요.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뿌리로 가냘픈 생명을 남겨 주었습니다.
T.S.엘리엇의 시, 황무지의 일부분이다. 그의 사월은 가장 잔인하지만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는데 우리의 사월은 겨울이 지나도 망각의 눈으로 덮여 있다. 우리의 가냘픈 생명들이 아직 세월호에 갇혀 있다. 그 차갑고 어두운 바다 속에서 아이들이 가장 무서웠던 순간은 옆의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게 될 때가 아니었을까? 침몰하고 있는 것은 세월호뿐이 아니다. 우리 사회 역시 침몰하고 있다. 옆의 사람의 외면과 무관심에 유가족은 갈 곳을 잃고 있다. 하지만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저마다의 일상 속에서 세월호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 공간 <해방>은 세월호를 기억하는 이야기 모임 <4분 16초의 진심>을 만들었다. 그들은 세월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여전히 침몰해가는 배를 향해 어떤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지 들어보려고 한다.
<해방>은 어떤 공간인가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틈새 문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저희 공간에서는 전시, 대관, 모임, 세미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이렇게 함께 이야기하고 소통하기 위해서 물리적인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해방>을 열게 된 거구요. 그런데 좀 생뚱맞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고 느껴져요.
해방촌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뭔가요? 맞아요. 저희는 인사동이나 삼청동처럼 예술 공간이 쭉 나열되어 있는 아트허브에 위치한 게 아니라, 오래된 동네에 똑 떨어져있어요. 아트허브에서 벗어나 틈새를 활용한 거죠. 창작자들을 위한 해방공간임과 동시에 동네주민들과 어우러질 수 있는 공간이에요. 또, 해방촌이 한국 근현대사를 간직하고 있는 동네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자체가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동네 이름을 따서 공간 이름을 <해방>이라고 지었어요.
이야기 모임 <4분 16초의 진심>은 어떻게 기획하게 되었나요?
지난 여름, 한국이 세월호 때문에 노란 물결이 일었을 때 저희는 대만에 있었어요. 그때 대만에서도 선플라워 운동으로 뜨거웠거든요.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우리의 세월호 진상규명 운동과 저들의 선플라워 운동이 결국 다르지 않구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보니, 홍콩에서는 우산혁명이 일어나고 있더라구요. 지금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시위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그 본질은 국가와 자본이라는 두 가지 필터 안에서 돌고 있는 거예요.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서 컨트롤되기 때문에 서로 만나지 못하고 우리 얘기는 우리만의 것, 너희 얘기는 너희만의 것, 이렇게 나누어서 생각하게 되는데 사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이 얘기를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한 거죠.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예술로서 뭘 얼마나 할 수 있을까, 자신은 없었지만 예술가이기 이전에 우리가 시민으로서 국민으로서 시민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며칠 동안 아이들이 차갑고 어두운 바다에 가라앉는 모습을 온 국민이 실시간으로 봤잖아요.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와 그 일이 전혀 해결되지 않는 것에 대한 억울함, 내가 이 사회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무기력함을 느꼈어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드러나는 부정부패와 비리들을 보면서 어른으로서 아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부채의식이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어요.
2015년 4월 16일, 세월호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시청광장이 아닌 <해방>에서 모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배의 끄트머리만 남았을 때도 계속 희망을 품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배가 한순간 아예 사라져버린 거예요. 그때 마음속에 응어리가 생긴 것 같아요. 내가 그 참사의 당사자는 아니지만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면서 저도 모르게 내상을 입은 거죠.
이야기 모임 <4분 16초의 진심>은 저처럼 내상을 입은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 일상에서 감각한 세월호를 이야기하고 그 말들을 기록하는 활동이에요. 그 활동을 통해 자가 치유도 되는 것 같고요. 이게 꼭 유가족들만의 얘기가 아니라, 나 또한 이 사회의 ‘을’로서 언제 당할지 모르는 내 문제이니까요.
하나의 단체로 광장에 나가서 함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개인으로 자기 골목 안에서 작은 공간을 만들고, 문제를 환기하고, 스스로 성찰하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또 평범한 사람들이 생계를 중단하고 매일 광장에 나갈 수는 없잖아요. 광장에 나가진 못하더라도 자신의 일상에서 함께 할 수 있는, 각자의 잊지 않기 위한 방법이 필요한 것 같아요.
<4분 16초의 진심>이 기억하는 세월호는 어떤가요?
저희가 이번 이야기 모임에서 우리 안에서 나온 질문들을 담요 위에 물로 적어 내려가는 퍼포먼스를 했거든요. ‘왜’라는 단어만 열 번을 쓰신 분도 있고, 그 ‘왜’ 옆에 ‘그래’를 붙여서 ‘왜 그래’, ‘뭐가 무서워서 그래’라고 쓰신 분도 있고, ‘누가 진실을 두려워하는가.’ 등 다양한 문구들이 나왔어요. 그런데 왜 보이지 않는 물로 적었나요? 사실 모임에서 나온 질문과 문장들을 자수로 새기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우리의 질문들을 자수로 새기면 아직 계속 싸워야하는 세월호의 상황을 종결시켜버리는 것 같다는 의견이 나왔어요. 문장을 물로 써내려간 대신 목소리와 마음에 새기고 영상과 녹취와 같은 기록물로 남기기로 했어요. ‘왜’라는 질문에서 5단계를 가면 본질적인 문제가 뭔지에 도달하게 된다고 하잖아요. 우리는 1년 동안 너무나 많은 ‘왜’를 외쳤지만 본질적인 뿌리에 가닿지 못하고 질문들이 계속 흩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월호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가 침몰해서 물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민낯들을 물로 써내려간다면 또 다른 상징성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물은 증발하겠지만 우리의 질문은 계속될 거예요.
전시 <이불을 빌려드립니다>의 취지는 무엇인가요? 저희가 팽목항에서 유가족이 실제로 쓰던 이불과 담요들을 빌려왔어요. 밤새 잠 못 이루던 뒤척임, 내일 일어나서 다시 대면해야 할 잔인한 상황들 속에서 이불은 그나마의 작은 쉼터이자 은신처, 힘없는 보루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불이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이 거했던 공간이라고 생각했어요. 이 이불을 또 다른 개인들이 빌려감으로써 두 공간이 만나게 되는 거죠. 이불을 빌려간 사람의 몸과 이불을 사용했던 사람의 몸이 이불을 매개로 만나고, 그 안에서 서로의 마음도 만나길 바라요. 하나의 성찰의 장소로요. 누군가의 고통, 슬픔이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의 성찰로써 위안 받기를요. 그렇게 이불이 또 다른 개인의 삶의 틈새로 이동하게 되면서 서로 만나고 연결되기를 바랐어요.
팽목항에서 빌려 온 이불을 대여해주고 기록물과 함께 돌려받는다고 하셨는데, 어떤 기록물이 필요한 건가요?
기록물은 어떤 형태이든 상관없어요. 영상이든 사진이든 그림이든 텍스트이든. 이불과 함께한 행위의 기록을 보내주시면 돼요.
처음으로 이불을 빌려 가신 분은 즉흥 연주자이신데요. 4월 16일에 연남동에서 있었던 공연에서 이 이불을 깔고 그 위에서 연주하셨대요. 또 이불 한 장은 객석 한 자리에 씌워놓고요. 초청의 의미인거죠. 수집한 기록물로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어떤 것들을 느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 이불 위에서 스스로 고민하고 성찰한 흔적들을 함께 나누고 싶어요. 그 기록물들은 416 기억저장소에 아카이브될 거고, 전시로 이어질 수도 있어요.
<해방>과 <4분 16초의 진심>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요? 세월호가 어떻게 보면 다 돈 때문에 생긴 사건이잖아요. 그런데 사실 저희도 자본주의의 딜레마를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솔직히 어떻게 될지 장담을 못 하겠어요. 그래도 계속 작은 틈새를 내고 싶어요.
그런 시도들로 개인이라는 미시적 존재들이 국가, 국민이라는 경계를 넘어서 우정을 쌓고 서로의 얘기를 함께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언제라도 이 얘기들을 대만 친구들, 홍콩 친구들과 같이 하고 싶어요.
* 해방으로 가는 길 버스 - 202번. 후암동 종점에서 하차 후 해방촌 오거리 방면으로 도보 5분 마을 버스 - 녹사평역 또는 숙대입구역, 남영역에서 용산 02번 탑승 후 ‘큰빛의 집'에서 하차 * 주차 공간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 전시 공간이 협소하여 사전 예약을 하실 것을 권장합니다. * 문의 - spacehaebang@naver.com / mmalkeun@naver.com
* 화요일 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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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 은비: "다 입었다." 나: "마,마저 다 입어라.." 어제 입었던 끈나시와 허벅지가 훤히 들어나는 짧은 트레이닝 하의를 마저 입는 은비. 은비: "이제 뒤돌아도 돼." 여자와 한 공간에 있어본 적 없는 숫총각처럼 몸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입니다. 나: "어,어. 분명 옷을 다 입고 있는데, 왜 시선을 못 맞추겠지. 괜찮아, 진정하자. 난 은비에게 어떠한 사심도 없잖아. 은비: "부끄러워하는 거봐, 귀엽게." 나: "부,부끄럽긴 뭘."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조롱하듯 초밀착하여 희롱하는 은비. 손사래 치며, 외면할수록 더 바짝 붙어 이리저리 품속으로 들어옵니다. 은비: "왜 못봐? 왜애? 응?" 가릴 것 없이 모든 신체 부위가 맞닿습니다. 나: "뭐,뭐가. 아,아무렇지 않은데." 은비: "오, 진짜?" 물러터진 경계가 허물자, 뒤에서 껴안기도 하고 내 발위에 자신의 발을 올리며 대롱대롱 내 걸음을 따라합니다. 은비: "우와, 오빠 복근 장난없다!" 물기 덜마른 촉촉한 머리칼이 뜨거워진 내 몸을 살금살금 건드리며, 손으론 내 복부를 더듬습니다. 아,위험하다. 나: "아, 뭐해, 저리가." 그녀의 골반 근처와 내 하체의 어딘가가 선명하게 맞닿았습니다. 분명 서로가 자세히 느껴질만큼 생생한 촉감으로.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더욱 내 몸에 꽉 붙어 이리저리 흔들며 장난치는 은비. 정말 이 이상은 안돼. 내 몸의 추태를 들킬 거 같다. 나: "아, 그만해. 너 진짜 위험한 줄도 모르고 자꾸 이럴래?" 은비를 뿌리치고, 성급하게 어디든 앉을 곳을 찾습니다. 동선 상 가장 가까운 곳인 침대에 앉아, 자연스레 양 허벅지 위에 베개를 올려놓습니다. 휴. 은비: "우리 사이에 위험할 일이 남았나?"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답이 정해진 듯한 질문을 날립니다. 나: "그,그게 무슨 말이야. 장난치면 혼난다." 은비: "어제 기억 안나? 오빠가 어제 침대에서 나한테 했던 거?" 머리가 지난 기억의 흔적을 짜내려 바쁘게 움직입니다. 아, 모함이다. 이성적인 내가 그럴 리 없어. 반사적으로 팬티 안의 감촉을 확인합니다. 일종의 습도라던지, 농축이라던지. ...... 까마득한 기억은, 거짓과 사실을 뒤바꿀 만큼, 사실도 거짓으로 혼돈할 만큼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으깨버립니다. ... 정말 내가? 나: "미,미안하다. 진짜 기억이 안나." 침대 옆에 나란히 앉은 은비가, 참다 못해 터진 듯 호탕하게 웃어버립니다. 은비: "아, 웃겨. 진짜 놀릴 맛 난다, 오빠. 너무 좋아." 쪼그만한 게 몇번씩이나 날 가지고 놀아? 나: "너 진짜 죽을래? 나 진짜 화났어. 빨리 나가 너." 은비: "어제 얼마나 힘들게 오빠 집까지 데려왔는데, 이렇게 매몰차게 내쫓는 거야?" 그렇긴 하지만.. 저 가녀린 몸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데려왔을라나. 내가 주사가 없어서 망정이지, 휴. 나: "대신 앞으로 그런 장난치지마. 그럼 별일 없던 거 맞지?" 은비는 골똘히 눈을 굴리며 지난 밤을 생각하네요. 은비: "아무 일이 없었던 건 아니지." 나: "뭐? 그럼?" 은비: "글쎄, 말해주기 싫은데. 내 소원 들어주면 말해주지롱." 내가 또 이런 허수에 당할 듯 싶으냐. 어림없지. 음... 나: "알겠으니까, 빨리 말해." 은비: "아싸! 안지키기만 해, 죽어 아주. 어제 잠들기 전까지 서윤인가 뭔가 하는 여자애만 종일 불렀어. 그리고 나한테 '서윤아' 하면서 막 안기고 보듬고 그랬어 오빠가. 나: "또 거짓말이지 너." 은비: "오빠, 너 마음대로 생각해라." 잔뜩 심통이 나있는 듯한 은비의 표정. 은비 표정을 보아하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네요. 다른 여자 이름을 부르며 본인에게 그랬다니, 은비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미안해지네요. 나: "미안해. 그냥 잠꼬대 였을텐데. 너한테 함부로 행동해서 미안하다." 한동안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에게 등을 돌린 채 앉아있습니다. 화를 풀어줘야 하는데, 이런 상황이 너무 어렵기만 해요. 뭐라도 해야 하는데, 아! 냉장고에 아이스크림 있구나! 나: "이거 먹고 화 풀어주라. 서윤... 아, 아니 은비야.." 젠장, 하필 이 타이밍에. 망했다. 숨도 쉬지 않는 듯, 미동없는 은비의 뒷모습에서 전쟁의 서막이 피부로 와닿습니다. 나를 휙 돌아보는 은비. 금방이라도 분노에 찬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눈망울. 아랫 입술을 잔뜩 모은 채,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합니다. 은비: "나 신은비라고! 서윤인가 뭔가 하는 애가 아니라고 나는! 진짜 자존심 상해." 분노와 서러움이 뒤섞인 은비의 표정. 나: "아, 미안하다. 내가 아직..." 은비: "왜 오빠 너는 서윤인가 뭔가 걔만 생각하고 걔만 부르냐고! 아, 울기 싫은데 진짜." 나: "......" 여기저기 놓인 짐을 휙휙 급하게 낚아채고, 현관으로 나서는 은비. 설움이 멈추지 않는지, 입고 왔던 가디건을 얼굴에 품고 훌쩍이며 집 밖으로 나갑니다. 다급하게 엉거주춤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고 뒤따라 갑니다. 얼마나 빨리 내려갔는지, 주택 계단을 벗어나 골목을 내려가고 있는 은비가 보입니다. 두손을 입가에 대고 힘차게 은비를 부르려다, 목에서 턱 하고 막혔습니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 이게 맞는 걸까. 괜한 행동으로 불을 지피는 건 아닐까. 곁에 둘수록 은비의 상실감은 더욱 커질테고, 그것에 비례하게 나 또한 미안함에 편치 못할텐데. 모았던 두손은 맥없이 툭 떨어지고, 깊은 한숨과 함께 복잡한 걸음으로 다시 집으로 올라갑니다. 왜 유독 은비를 향한 행동은 갖가지 이유와 근거가 필요할까요. 아직은 이 불편함을 정의할 수가 없네요. ****** 오디션 심사 2시간 전. 무거운 마음으로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집 밖을 나왔습니다. 원래라면 기대에 부풀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갈하게 채비했겠지만, 어제 하루 사이에 각기 다른 두 여자의 파동으로, 여파가 극심한 탓에 차마 겨를이 없었습니다. 기다리고 기대하던 오디션 당일인데, 컨디션도 의욕도 반토막입니다. 어제 공원에서 얼마나 울어 재꼈으면, 목이 칼칼한 게 쉰 목소리가 나오네요. 그래도 오늘이 영화에 일조하는 것도 마지막이고, 더이상... 서윤이를 볼 일도 없을 테고. 미련없이 오늘 하루에 최선을 다 하는 게 일거양득이겠죠. 억지 화이팅을 가득 불어넣고 오디션장에 들어갑니다. 홍감독: "어, 김작가 왔네." 나: "안녕하십니까." 홍감독: "아직 캐스팅 디렉터랑 안왔으니까, 미리 배우 프로필 보고 참고해." 두터운 파일을 건내받고, 품에 꼭 쥔 채 이리저리 둘러봅니다. 생각보다 조촐합니다. 오디션 프로그램 스테이지를 생각했는데, 대학로 소극장 느낌에 가깝네요. 빈의자에 앉아 받은 프로필을 열어봅니다. 우와, 오늘 이 배우 실물 영접하는 거야? 영화 '남자사용설명서'에서 하드캐리한 배우잖아. 미쳤다, 미쳤어. 로코물의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니는 배우도 있네요. 나이가 조금 있어서 걸맞진 않아보이는데.. 최근 핫하게 떠오르는 배우도 있어요. SNS에서 벨런스 게임에 항상 등장하던데, 빚이 30억이어도 다 갚아주고 만날 수 있다는 그 배우. 헛웃음이 나오네요. 내가 이런 배우들 앞에 앉아 심사를 하는 꼴이라니. 정작 월세 살이에 확연한 미래도 없는 나하고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일 텐데. '철컥' 문이 열리더니 홍감독과 함께 캐스팅 디렉터와 기타 관계자로 보이는 분들이 들어옵니다. 나: "안녕하십니까." "아이고 안녕하세요. 홍감독님께 말씀 들었어요." 홍감독: "자자, 슬슬 시작하지. 시간 다 됐지?" 스텝으로 보이는 분이, 심사 테이블 바로 옆에 두 대의 카메라를 거치해줍니다. 아마 영상을 통해 비춰지는 모습을 보려고 하는 거겠죠. 한마디로 카메라 빨. 우와 '알렉사 미니LF' 엄청 비싼 카메라로 아는데, 역시.. 홍감독의 손짓에 오디션이 시작되고, 첫번째 배우가 들어옵니다. 티끌도 놓치지 않기 위해 초집중 상태로 배우를 탐색합니다. 그런 나와는 달리, 역시 베테랑인 걸까요. 정돈 안된 거뭇한 수염 곳곳에 나있는 허연 수염에서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홍감독과 캐스팅 디렉터. 연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카메를 휙 보더니 가망이 없다는 듯 배우에게 시선을 끊고 다음 프로필을 봅니다. 다음으로 들어온 배우. 이번엔 두 분 다 유심히 보는 듯 했지만, 대사를 뱉기 전, 호흡에서 이미 아웃입니다. 모든 감정의 시작은 호흡이라고 하죠. 어느새 30명가량의 배우들이 속전속결로 나가떨어집니다. 그리고 기다리던 그 배우가 들어옵니다. 아까 잠깐 언급했던 '남자사용설명서'의 그 배우죠. 두 분 다 눈을 떼지 못하고, 배우의 연기에 빨려 들어가는 듯 보입니다. 배우의 연기가 끝나고, 흡족한 웃음을 짓는 두 감독. 홍감독: "잘 봤고요. 다음 거 해보시죠." 다음은 '지정 연기' 입니다. 한마디로 직접 지정해준 연기를 선보여야 하죠. 사실 '지정 연기'는 연극 영화과 대학 입시에서나 보는 것인데 이번엔 홍감독이 특별히 지시했다고 합니다. 홍감독의 애착이 들어가 있는 장면이죠. 바로 '스물아홉의 우린'에서 중요 장면 중 하나인 서윤이와 나의 이별 씬. ...... 눈을 지긋이 감으며 감정에 몰입하는 배우. 심호흡을 크게 내쉬더니, 준비가 끝난 듯 보입니다. "시작하겠습니다." 부디 그때의 나를, 그때의 우리를 그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