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oner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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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차이나타운> - '엄마의 엄마가 된다는 것'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먹는 새끼가 있다. ‘애어리염낭거미’ 의 어미는 애거미가 알집 밖으로 나와 다시 탈피할 때까지 산실에서 기다렸다가 그대로 새끼들의 먹이가 된다. 새끼에게 있어 어미는 자신의 생존과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영양분이고, 어미는 딱 그만큼의 필요로써 존재 가치를 갖는다. 애어리염낭거미처럼 제 몸을 내어주지는 않을지라도,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종족 보존을 위해 다음 세대에게 헌신한다. 우리 대부분이 향유해 온 엄마의 헌신 또한 당신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최대의 효율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작용해왔으며, 그 안에 점철된 ‘희생’ 은 거창할 것도 없이 그저 필요에 따라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옵션일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 <차이나타운>은 마우희(김혜수)라는 ‘엄마’ 와, 일영(김고은)이라는 ‘엄마가 되어가는 여자’ 의 이야기이다.
지하철 역 10번 보관함에 버려져 노숙자들 속에서 자란 여자아이 일영은 ‘엄마’ 라고 불리우는 차이나타운의 사채업자 마우희에게 팔려가게 된다. 십 수년이 지나고, 일영은 엄마가 요구하는 ‘쓸모있는 사람’ 으로 살아남기 위해 채무자들에게서 빚을 받아내는 일을 하며 우곤(엄태구), 홍주(조현철), 쏭(이수경)과 한 식구로 살아간다. 그러던 중 악성채무자의 아들 석현(박보검)을 만난 일영은 친절하고 밝은 그의 모습에 낯선 감정을 느끼고, 엄마와 석현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 모든 관계를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만 정립하는 것은 비인간적이기 이전에 불가능한 일이며, 그 상대가 함께 생활하는 식구나 사랑하는 연인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만일 타인의 마음을 얻는 데에 치러야 하는 값이 정해져 있다면, 아마 우리는 고민없이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배신당할 일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일영을 비롯한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필요한 삶’ 에 대해 환기시키는 엄마의 태도는 냉정함을 넘어 이상적으로까지 느껴진다. 채무자의 삶의 필요가 빚을 갚는 데에 있는 것처럼 일영의 필요는 엄마가 빌려준 돈을 돌려받는 데에 있고, 그 일을 계속 해내는 한 일영은 결코 엄마에게 버림받지 않는다. 재미있는 건, 엄마가 그토록 강력하게 추구하는 ‘필요’ 에 부합하는 목적은 영화 속에서 드러나지않는다는 점이다. 엄마와 일영을 비롯한 식구들은 낡고 좁은 차이나타운의 사진관(으로 위장된)에서 함께 먹고 잔다. 영화 <타짜>의 정마담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펑퍼짐한 엉덩이와 불룩한 배를 가진 엄마의 모습은 차이나타운을 주름잡는 사채업자라고 하기엔 차라리 소박하다. 하물며 밀입국 중국인들에게 위조 신분증을 만들어줌과 동시에 사채 빚을 안긴다거나, 고위 공무원들과의 유착과 구린내 나는 비즈니스(?)의 어디에도 그녀의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엄마가 변함없이 지켜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이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한 식사다. 일영을 비롯한 아이들이 엄마에게 필요한 일을 하기 훨씬 전부터, 어쩌면 버려진 후 먼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온 일영을 위해 자장면 곱빼기를 시켜준 날부터 이미 엄마는 일영을 필요로 했는지 모른다. 그저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넘치는 일영을 곁에 둠으로써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일영에게 있어서 엄마는 어떤 필요로써 존재할까. 그것은 단순히 죽음에 대한 공포의 반작용이나 숙식을 제공하는 집이 주는 안락함(그다지 안락해 보이지는 않지만)과는 다른 무언가다. 일영에게 엄마가 필요한 이유는, 그저 그녀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 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결코 일영을 맹목적으로 대하는 법이 없으며, 철저히 자신의 필요를 충족한 대가로 일영을 신뢰한다. 그렇게 일영은 엄마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이것이야말로 일영에게 있어 가장 완벽한 삶의 방식이다. 말하자면 일영은 엄마의 ‘엄마’ 로서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느와르라는 측면에서 <차이나타운>은 분명 신선한 매력을 지닌 작품이다. 그리고 일영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사건과 갈등들은 이러한 장르적 특성을 부각하기 위한 도구로서 작용한다. 우리가 장르적 공식에 갇히지만 않는다면, 이 도구들은 서두의 애어리염낭거미의 예처럼 우리의 각성을 위해 기능하고, 이내 엄마에서 일영으로 이어지는 모계 가족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게 할 것이다. 이 영화를 통해 첫 장편을 연출한 한준희 감독이 말했듯, 이 영화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 관계를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만 정립하는 것은 비인간적이기 이전에 불가능한 일이며, 그 상대가 함께 생활하는 식구나 사랑하는 연인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만일 타인의 마음을 얻는 데에 치러야 하는 값이 정해져 있다면, 아마 우리는 고민없이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배신당할 일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일영을 비롯한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필요한 삶’ 에 대해 환기시키는 엄마의 태도는 냉정함을 넘어 이상적으로까지 느껴진다. 채무자의 삶의 필요가 빚을 갚는 데에 있는 것처럼 일영의 필요는 엄마가 빌려준 돈을 돌려받는 데에 있고, 그 일을 계속 해내는 한 일영은 결코 엄마에게 버림받지 않는다.
재미있는 건, 엄마가 그토록 강력하게 추구하는 ‘필요’ 에 부합하는 목적은 영화 속에서 드러나지않는다는 점이다. 엄마와 일영을 비롯한 식구들은 낡고 좁은 차이나타운의 사진관(으로 위장된)에서 함께 먹고 잔다. 영화 <타짜>의 정마담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펑퍼짐한 엉덩이와 불룩한 배를 가진 엄마의 모습은 차이나타운을 주름잡는 사채업자라고 하기엔 차라리 소박하다. 하물며 밀입국 중국인들에게 위조 신분증을 만들어줌과 동시에 사채 빚을 안긴다거나, 고위 공무원들과의 유착과 구린내 나는 비즈니스(?)의 어디에도 그녀의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엄마가 변함없이 지켜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이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한 식사다. 일영을 비롯한 아이들이 엄마에게 필요한 일을 하기 훨씬 전부터, 어쩌면 버려진 후 먼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온 일영을 위해 자장면 곱빼기를 시켜준 날부터 이미 엄마는 일영을 필요로 했는지 모른다. 그저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넘치는 일영을 곁에 둠으로써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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