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hiker
4 years ago10,000+ Views
어렸을 적 즐겨 읽었던 추리 소설 책은 중요한 고비마다 주인공의 결정을 직접 선택할 수 있었다. 눈이 소복히 쌓인 겨울,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느날 예기치 않게 살인을 저지른다.
그렇다면 이제 빨리 도망을 치겠는가, 아니면 좀 더 주변을 둘러보겠는가를 선택해야 한다.
A, B로 나뉘어진 선택에 해당되는 쪽수로 가면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다. 일종의 게임 스토리텔링을 추리소설에 접목한 것이었다.<악의 연대기>를 보는 것도 꼭 게임 속에서 A를 선택할지, B를 선택할지 고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이것은 과연 장점일까, 단점일까?

예측불허의 반전이 허를 찌른다

명확히 짚을 것은 <악의 연대기>의 스토리텔링은 매우 뛰어나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식상한 그림에서 벗어나지 못한 영화이지만, 그 식상한 장면들을 배열하는 감각과, 이야기의 완급을 조절하는 속도감각이 매우 뛰어난 영화였다.
예고편의 크레인에 매달린 시체만으로도 <부당거래>를 떠올리게 하며, 손현주의 마스크를 보는 것만으로도 <숨바꼭질>의 정서가 빼곡할 것이라는 예감을 하게 만든다.
그 뿐인가. 경찰이 초반에 사람을 죽였다는 설정은 <끝까지 달린다>의 기승전결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1 최다니엘이라는 크레딧은 심지어 <살인의 추억>의 박해일의 이미지와 오버랩된다.
즉, 이 영화는 제작의 관점에서는 굉장히 익숙한 것들에 기대어 매우 편리한 방식으로 손익분기점을 예상한 영화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에 가서는 이야기의 구성력에 감탄을 하게 만든다. 장담하건대, 이 영화는 24부작의 추리 드라마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예측불허의 반전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악의 연대기>가 감탄을 자아내는 영화라고 하기에 망설여진다.

빨리 감기와 되감기, 일시 정지를 쉴새 없이 누른다

달리 말하면 <악의 연대기>는 속도의 완급조절, 반전을 드러내는 방식이 전부다.
먼저 속도.
추격장면은 스릴감이 없고, 최다니엘의 병약한 이미지는 <추격자>의 하정우나 <살인의 추억>의 박해일에 비견하면 거의 존재감 제로다. 곰곰 따져보면 형님같이 친근하지만 알고 보면 부패해있는 중간 보스의 최반장에 관해 좀 더 내밀하게 파고 들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이야기와 연출은 최반장의 성격을 십분 활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최반장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수없이 많았다. 그런데도 최반장은 철저하게 영화가 기획해 놓은 속도 감각에 무작정 휩쓸려 떠내려가기만 한다.
다음 반전.
<악의 연대기>는 과거의 인간적 사연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몽타쥬 시퀀스에 모조리 몰아서 회상의 형태로 재빠르게 보여주는 압축의 방식을 크게 2번 선보인다.
그런데 두 번 모두 그 압축의 정도가 지나치다. 특히 최반장과 형사들의 과거의 사연을 소개해주는 몽타쥬 시퀀스에 쓰인 I can't get you off my mind는 90년대가 배경인 회사장면과 결코 어울리지 않아, 장면과 완전히 겉돈다.
지나치게 빨리 이야기를 빨리 전개시킨 후, 관람객을 납득하게 만들기 위해 과거를 소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반전.
<악의 연대기>는 과거의 인간적 사연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몽타쥬 시퀀스에 모조리 몰아서 회상의 형태로 재빠르게 보여주는 압축의 방식을 크게 2번 선보인다.
그런데 두 번 모두 그 압축의 정도가 지나치다. 특히 최반장과 형사들의 과거의 사연을 소개해주는 몽타쥬 시퀀스에 쓰인 I can't get you off my mind는 90년대가 배경인 회사장면과 결코 어울리지 않아, 장면과 완전히 겉돈다.
지나치게 빨리 이야기를 빨리 전개시킨 후, 관람객을 납득하게 만들기 위해 과거를 소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CJ E&M과의 악평 연대기

<베를린>, <나의 PS 파트너>, <타워>, <열한 시> 그리고 <마이 리틀 히어로>와 <사이코메트리>까지.
유독 CJ영화에만 '사무원 냄새'가 난다는 평을 하게 된다. 꼭 영화를 기안에 따라 기획하고, 흥행 성공 사례를 열심히 조사하여 짜깁기 한 뒤, 소수의 고객들에게 설문조사를 하여 좋은 장면을 추려내고, CEO의 최종승인을 거쳐, 제작 승인 란에 결재도장을 찍어 만든 것 같다는 인상이다.
영화가 이런 사무적 느낌이 든다는 건, 단 한순간의 '불꽃'도 튀지 않은 채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과 똑같은 의미다.
이런 경우에는 답이 없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조직 전체에 어떤 답답한 사무직의 공기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에 의해서 만든다는 관점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사실 모든 창작가들은 자신만의 분석이론이 있다)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 영화를 찍는 과정에는 머리로 예상하고 추측하는 것 이상의, 심장의 불꽃이 튀어야 한다. ​
CJ E&M은 CJ 기획인턴 등을 활용해서 쌍끌이식으로 소재들을 끌어 모으거나, 외국 영화의 컨셉을 살짝 한국식으로만 바꾸거나, 시나리오 시사 과정에서 대중들에게 시나리오를 읽혀 설문조사를 하는 것을 과학적인 영화제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듯 하다.
그 과학적인 접근방식은 <악의 연대기>를 속도에 편집증적으로 집착하게 만들었고, 관객들의 예상을 뒤엎는 반전에만 몰두하게 만들었다. <숨바꼭질>에서 명연기를 선보인 손현주는, <숨바꼭질>의 손현주 그대로 판박이었다.
<악의 연대기>에는 정말이지, 예상외의 반전 밖에 없었다. 이것이 <악의 연대기>의 최대 반전일지도 모른다.
filmhi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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