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d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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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해져라

치열해져라 그것이 내가 사는 길이다 하루라도 맘을 놓다간 위태로워진다 제발 치열해져라 다른 맘 갖지 못하도록
led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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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청승
하루는 친구가 나에게 사업을 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업종은 요식업, 주막 형식으로 술집을 차려 보자고 했다 요식업은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다들 알고 있겠지만 오래된 나의 꿈이자 내가 언젠가 사업을 하게 되면 해보고 싶었던 분야였고 그렇기 때문에 혼자 여러 레시피를 모으고 내 생각 속에서 여러 점포를 군데 군데 내놓기도 했었다 하지만 번번히 시작을 하지는 못하였다. 항상 좋은 핑계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밑천이 없다" 물론 사업을 하려면 밑천이 필요 하겠지 하지만 요즘 벌어서 사업 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대부분 대출로 시작 하겠지... 그냥 나의 오래된 지병 같은것이다. 뭐 하나 잘난것도 없이 기껏 나르시시즘에 빠져 살면서 뭐 하나 이루어낼 자신도 없으면서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서 시작을 망설이는... 정말 지독하고 무서운 병이다... 그래서 너와의 결혼도 시작이 두려워 이런 저런 핑계를 찾았나보다... 어느날 내가 심한 장난을 쳐 너가 화를 냈던날, 나는 왜 그런걸로 화를 내냐며 온갖 치사한 말들로 너의 감정을 부정 하려고 했고 착한 너는 오히려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어느날 오랜만에 외출 하던날 무슨 일인지 표정이 퉁해 있는 너를 보며 오랜만에 나왔는데 왜 또 그러고 있냐며, 너의 감정을 물어 보기는 커녕 화를 내는 나에게 착한 너는 오히려 미안하다고 말했다. 어느날 무엇때문에 싸웠는지도 모를 그런 사소한 일들을 나는 이런 저런 이유를 들먹이며 너에게 쏘아댔고 착한 너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어느날 손바닥 뒤집듯 부리는 내 변덕에 결혼을 다시 생각해 보자고 했던날 착한 너는 나를 이해 한다고 말했다. 다시 잘 해보자고 용기를 내보자고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하지만, 그때 내가 너에게 했던 말들은 모두 나의 지병이 만들어낸 이런 저런 핑계일 뿐이었다. 그 때 우리의 대화에 등장 했던 인물들의 문제가 아닌 그저 나의 문제였다. 나의 이별은 대게 그랬다 뒤도 안돌아 보고 갈라 서거나, 아니면 내가 자신이 없어 이별의 핑계를 찾고, 상대방은 그런 못난 나를 다시 한번 잡아 주고 나는 끝내 똑같은 핑계로 다시 한번 이별을 말했다. 그 후에는 당연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함에 나의 핑계가 후회 스러워 다시 돌아가 보지만 나는 사랑도 이별도 그 무엇 하나 얻지 못하고 청승만 떨다... 그저 지쳐 살았다. 이번 이별도 크게 다르지 않을것 같다. 이미 그애는 우리의 3년을 꽤나 잘 정리 해가는것 같은데 나는 아직도 너의 마지막 뒷모습에 멈추어 있다. 얼마나 언제까지 이런 가증스런 청승을 떨고 싶은건지... 이젠 나도 이런 내가 지겨워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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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수필집 원고를 교정 보고 있다. 저자는 지방의 나이 지긋한 여성분인데, 대표의 측근 건너 건너 소개로 들어온 원고다. 이 원고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수준 미달인데, 이것에 굳이 ISBN을 등록하고 출간하여 유통시켜야 하나 싶은 회의감이 많이 든다. 원고를 읽다 보니 답답하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다. 기본적인 글쓰기 역량이 전혀 안 되어있는 것이나 수필다운 깊이를 전혀 담보하지 못하는 것은 둘째 치고, 저자가 긴 시간에 걸쳐 써온 한 편 한 편의 글들이 예외 없이 거의 모두 심각한 수준으로 시대착오적이다. 그녀의 원고는 간단히 말하자면 가부장제와 남아선호사상을 비롯한 전반적인 여성혐오에 완벽하게 학습된, 그리하여 자신이 피해자인 것을 모르지는 않으나(아니 모르는 것일까?) 그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고(혹은 문제 삼지 못하고), 오히려 그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무조건 문제를 삼고 싸우라는 게 아니다. 다만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고, 자신을 둘러싼 이 모든 것들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명색이 작가라면 말이다. 젊어서 오로지 피해자이기만 했던 그녀는 이제 나이가 들어 가해자가 될 수도 있는 위치가 되었다. 그녀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녀에게 학습된, 이제는 사라져야 할 유산이 고스란히 자녀 세대에게도 답습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렇다. 가령 본인 역시 늦둥이 아들을 낳기 전까지 숱한 핍박을 받았음에도, 자신의 딸 역시 아들을 낳기를 은근히 바라는 그 무모함이나, 이제 막 성인이 된 딸에게 ‘여자다움’을 가르쳤다고 하는 부분이나, 평생을 남의 생일은 알아도 며느리의 생일은 모른 척한 시어머니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내 그리워하는 것, 그러한 어머니와 아내로부터 방관자로서만 일관한 남편에게 여전히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레 행동하는 희생자적 태도 같은 것들은 정말이지 남자인 내가 봐도 답답할 지경이다. 이런 나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그녀는 행복해 보인다. 그 근원이 뭐가 됐든 행복하다는 사람에게 당신은 뭘 모르고 있다고, 당신은 행복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권리는 없으며, 남의 가정사에 재를 뿌리고 싶지도 않다. 다만, 그 행복은 그 집안에서만 통용되었으면 한다. 혹자는 그 시대 어머님들은 다 그렇다, 그들을 욕해서는 안 된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 자체를 욕하자는 게 아니다. 그녀는 당연히 여성혐오 사회를 구가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서 뭐라도 해주고 싶은 것뿐이다. 다만 그게 그녀의 의도처럼 이 사회에 이상적인 방식은 아닐 뿐. 또한 그녀가 피해자라는 것을 잘 알지만, 그녀의 정당화된 삶이 가족들끼리만 돌려보는 가족 문집이 아니라 엄연히 유통되어 판매가 가능한 도서가 된다면 얘기가 다르다. 물론 아직 나오기도 전인 이 책이 전반적인 상황에 비추어 팔리지 않을 것도 이미 잘 알고 있고, 세상에 이런 책이 나왔는지 사람들이 거의 모른 채 묻힐 가능성이 90% 이상이다. 저자 또한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엄연히 출판 시장 한구석에 올라가는 도서다. 한 집안의 며느리, 아내, 엄마로서의 그녀의 삶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가부를 떠나서 윗세대 어른들의 공고한 사회를 무너뜨리고 싶은 투사로서의 욕심도 힘도 그다지 없다. 다만 나는 작가로서의 그녀를 비판하고 싶다. 그녀의 글을 보고 있자면 작가로서의 자의식도 없지 않은데, 그녀의 잘못은 이 모순되는 두 위치의 욕망을 어떠한 분리도 없이 가지려는 것이다. 의도를 떠나서 가부장제와 여성혐오에 기여하는 위치에 있더라도, 동시에 작가로서의 자의식도 가지고 싶다면,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위치로 빠져나와야 하지 않을까.(하긴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노골적인 공헌자가 되지도 않았겠지만.) 그래야 그나마의 정신승리라도 가능해질 테고. 이름 앞에 ‘작가’를 붙였다고 해서 자연스레 작가가 되는 게 아니다. 생활인으로서의 그녀와 작가로서의 그녀가 전혀 분리되지 않고 있으니 작가로서의 그녀가 생활인으로서의 그녀에게 완전히 잠식되어 있다. * 말이 나온 김에 여성 운동 및 남녀갈등에 대해 짧게나마 얘기해보고 싶다. 아무리 신중히 말을 골라도 내 생각에 허점들이 많을 것이나, 감안하고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나는 페미니즘을 응원하지만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아니,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기보다 영영 완전한 페미니스트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나 역시 한국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에 기여한 남성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의 혐오가 의도한 것이든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페미니즘을 들여다보고 공부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적어도 무지에 의한 혐오는 멈추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그런데 페미니즘은 남성뿐만이 아니라 여성도 함께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한참을 언급한 나이 지긋한 여성 세대뿐 아니라 내 또래의 세대 또한 마찬가지다. 내 또래 세대가 바로 그 윗세대를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자신이 피해자임을 오롯이 직시하지 못하는 내 또래 여성을 생각보다 여러 차례 보았다. 자신이 피해자임에도 무지로 인해 가해자의 세계를 대변하게 되는 것은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내 또래보다 젊은 세대들은 사실 그 굴레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강경하기도 하다. 그래서 그것에 반발하는 남성들이 생겨나고 남녀갈등은 거의 진흙탕 싸움이 되다시피 했는데, 미러링에 대한 생각은 그러하다. 우선은 미러링이 나오게 된 계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소 극단적인 대응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여성들은 이제껏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돌변한 게 아니라, 더는 먹히지 않는 목소리에 힘을 줄 때가 된 것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오랫동안 굳어져 온 관습을 어떻게 조용한 목소리로 바꾸나. 강경하게, 큰 소리를 내야 사람들은 겨우 돌아본다. 다른 비슷한 예로, 광장에서의 LGBT 운동을 들 수 있다. 그들을 비난하는 의견 가운데 하나는 이런 것이다. 꼭 저렇게 극단적인 분장을 하고 요란을 떨어야 하나, 조용히 지낸다면 굳이 욕할 생각 없다. 이 의견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역시 혐오성이 짙다. 당신들의 삶에 관심 없으니 티내지 말고 숨어서 지내라는 말과 뭐가 다른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다소 과장된 듯한 퍼포먼스를 하는지 역시 알 것 같은데, 그래야 그들의 존재를 봐주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큰 목소리와 눈에 띄는 행동이 필요할 뿐이다. 다만 나는 주객이 전도되어 어떠한 성취도 없이 혐오만 남는 것은 반대다. 페미니즘의 목표는 남녀가 동등한 권리를 갖고 그로 인해 모두에게 이상적인 사회로 진화해가자는 것이지, 이제껏 여성을 억압하고 착취한 남성을 영원히 적으로 돌리고 살자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세상에는 온갖 차별이 만연한다. 여성차별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 차별, 인종 차별, 노인 차별 등 갖가지의 차별이 존재하는 만큼 모두가 어느 위치에서는 피해자이고, 어느 위치에서는 가해자다. 모든 이가 어떤 식으로든 편견과 차별에서 자유롭지 않다면, 무조건 배제하지 말고 적어도 차별을 개선하려는 의지는 최소한으로라도 존중되었으면 한다. 어렵기는 하지만 그렇게 뭔가를 도모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역시 그 단계는 남성들이 충분히 여성들의 목소리에 진지하게 경청할 준비가 되었을 때(과연 그 때가 오기는 할까.)나 올 것이다. 지금은 피해자가 자신을 대변하는 상황에서 부득이하게 저지른 사소한 실수 같은 것을 지적할 때가 아니라, 우선은 그의 호소를 들어주어야 할 때인 것이다. 아주 긴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해야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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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퇴근 후 카페를 갔다. 코로나 관련 산문 두 편과 단편소설 두 편을 읽었다. 산문은 뭐 그럭저럭. 소설은 두 편 다 문제가 많았는데, 한 편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가독성이 떨어졌다. 처음 보는 소설가였고, 이름을 검색해보니 아주 오래전에 등단한 사람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출간한 책이 한 권도 없었다. 어떤 경로로 갑자기 잡지에 소설을 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이토록 가독성 떨어지는 소설, 그것도 등단 소설가의 작품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시간이 아까웠다는 소리다. 또 다른 소설은 여성 서사였는데, 가독성은 좋았지만 시의성이 몇 박자 늦는 감이 있었다. 한국 문단에서 현재 여성 서사는 아주 급진적인 속도로 가지를 뻗어 나가는 중인데 5, 6년 전에나 나왔으면 겨우 봐줄 만했을까 싶은 초보적인 담론을 펼쳐 보이고 있었다. 이 소설로 인해 오히려 여성 서사의 현재, 문단의 중심에서 앞다퉈 새로운 목소리를 내고 있는 다른 젊은 작가들의 힘을 새삼 느꼈다. 페미니즘 소설이 여전히 강세이지만 단순히 주제가 그것이라고 해서 박수받을 시기는 이미 지났다. 여성 서사의 첨단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윤리의 발굴이 한창이다. 작가라면 이 바닥의 동향을 꾸준히 파악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말하고 보니 찔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