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전한 삶을 구성하는 건 과연 무엇일까?'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프라두가 던진 질문이다. 가끔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본인이 완전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프라두의 질문에 완벽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완전한 삶의 구성요소인 동시에 우리가 완전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이유에 집중했다.
우리가 완전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욕망이다.
흔히 쓰는 말로 인간의 욕망엔 끝이 없다. 하나가 충족되면 부족한 다른 것이 필요하고, 또 하나가 충족되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곧 다른 욕망의 대상을 찾게 된다. 욕망의 대상이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는데 사랑이 될 수도 있고 물질이 될 수도 있다.
여러 욕망의 대상 중(프라두의 생각 중) 가장 고차원적인 것은 자화상이다. 자화상은 그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욕망하는 자신의 모습이다. 프라두의 말을 빌리자면 내 인생이 어떤 모습으로 충족되어야 한다는 상이다. 완전한 삶의 구성요소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 또한 자화상이라고 생각한다.
자화상이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페르소나가 떠오른다. 대부분의 인간은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다. 페르소나는 욕망을 통해 생겨나는데, 타인에게 보여주는 모습과 자신이 알고 있는 본인의 모습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제시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내 생각에 페르소나는 '닮고 싶다'라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닮고 싶은 마음이 곧 욕망이며 그 욕망이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면 페르소나가 탄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나를 지키는 하나의 방호벽일 뿐이고 완전한 내가 아니기 때문에 완전한 삶의 구성요소 중 하나를 채웠다고 할 수 없다. 본연의 내가 아니라 욕망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는 소설 속의 프라두와 그레고리우스가 괴로워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완전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또다른 이유는 우리 삶은 유한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책 속의 문장을 인용하자면 '죽을 운명이라는 인식은 종이로 만든 느슨한 끈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어 피부에 거의 닿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언젠가는 죽을테지만 지금은 아니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을 아주 멀리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SNS를 보며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조르지는 자신의 삶을 죽음에서부터 보며 괴로워한다. 죽음에서 부터 계산하며 살아간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공포에 떨며 모든 시간을 계산하며 살지 않을까. 프라두의 말처럼 인생이 가볍든 힘들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관계없이, 인간은 더 많은 삶의 요소를 원하며, 또 죽고 나면 모자라는 인생을 더 이상 그리워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삶이 끝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최근의 젊은 사람들은 완전한 삶을 생각해 볼 겨를이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어쩔 수 없이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많았지만 요즘은 본인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게 현실이다. 그러한 현실을 살아가는 데 유리한 페르소나를 만드느라 급급한 나머지 죽음을 생각할 겨를은 더더욱 없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괴로워하면서도 그저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철학자 페터 비에리(필명 파스칼 메르시어)가 쓴 소설이다. 철학자가 쓴 만큼 인문학적 이야기가 많다. 나는 그레고리우스를 따라 프라두의 인생을 여행하는 기분으로 읽었다. 그러면서 내가 살고있는 삶 또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내가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내용을 뽑아 서평을 썼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담을 책인만큼 이 외에도 생각할 부분이 많은 책이었다. 다음에 다시 읽는 다면 시간에 대해서 좀 더 깊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