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도망, 김꽈당, 김똑딱, 김해결, 김질주 다 합쳐서 김별명. 김태균
1982년 5월 29일 출생
오늘 소개할 선수는 2000년 제 19회 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추신수, 이대호, 정근우 등과 함께 우승 주역으로 포스트 장종훈이라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프로에 데뷔했으며 현재는 이대호, 박병호 등과 함께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오른손 타자이자 연간 15억원의 최고 연봉을 받고 있는 선수. 하지만 야구장 안에서뿐만 아니라 야구장 밖에서도 상당히 이름난 선수이기도 한데요. 지난 2010년 야구 아나운서 출신인 미녀 아나운서 김석류씨와 결혼으로 화제를 모았고 수많은 별명 때문에 본인의 이름인 김태균보다는 김별명으로 통하는 선수이기도 합니다. 이미 지난 2009년 그의 별명 200여 개가 적힌 티셔츠가 제작되어 판매되기도 했고, 비공식적인 별명까지 500개가 넘어가는 것으로 추정되며 조금 과장해서 그의 별명 개수는 무한에 가깝게 수렴되고 있는 중입니다.

1982년생 황금세대의 일원
1982년생, 고교시절인 천안 북일고 1학년 때부터 김태균은 이미 팀의 중심타자로 자리잡으면서 초고교급 선수로 평가 받는 선수였습니다. 특히 2학년 때인 1999년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선수권 대회에선 1년 선배 오윤과 함께 4번-5번 타자로 기용되며 2-4로 패색이 짖던 마산상고와의 1회전 경기에서 9회 백투백 홈런을 터트리며 극적인 동점을 만든 뒤 연장 10회 오윤의 끝내기 안타로 2회전에 진출했고, 이를 바탕으로 김태균과 북일고는 창단 세 번째 봉황대기 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또한 3학년 때인 2000년에는 제 19회 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 대표팀에 선발되어 추신수, 이대호, 정근우 등과 함께 팀의 중심타선에서 활약하며 연장 접전 끝에 미국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였습니다.이 당시 마무리투수가 부산고의 추신수, 3루수가 경남고의 이대호였고 김태균은 1루수를 맡았는데 30타수 13안타에 3홈런, 11타점을 기록했었습니다.

포스트 장종훈, 포스트 이승엽
북일고를 졸업한 김태균은 2001년 신인 드래프트 1차 우선 지명 선수로 1억 6천만원의 계약금을 받고 한화 이글스에 입단합니다. 당시 한화 이글스의 연고 지역인 충청권에는 김태균말고는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었기 때문에 김태균의 한화 입단은 거의 기정사실화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각 팀의 1차 지명자로 현재까지 프로에서 활약 중인 선수는 경기고를 졸업한 LG의 투수 이동현과 동산고를 졸업해 SK의 입단한 포수 정상호가 있습니다. 김태균은 입단 첫 해부터 팀의 레전드 내야수였던 3루수 강석천의 자리를 밀어내고 88경기에 출장해 3할의 타율(0.335)과 20홈런을 때려내며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대표 출신의 대졸 신인이었던 삼성의 박한이를 제치고 신인왕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데뷔 2년 차인 이듬해엔 극심한 2년차 징크스(소포모어 징크스)에 시달리면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데뷔 3년 차인 2003년엔 전 경기에 출장해 다시 3할의 타율(0.319)에 복귀했고 10할에 가까운 OPS(0.996)과 31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홈런 개수로는 자신의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내며 팀의 대선배이자 레전드인 장종훈의 후계자로 평가 받으며 ‘포스트 장종훈’이라는 꼬리표가 그를 따라다니기 시작합니다. 2004년과 2005년에도 꾸준히 3할의 타율과 2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하며 팀의 4번타자로 확실히 자리매김 했고, 2004년 이승엽이 일본으로 진출한 이후 2005년엔 데뷔 첫 1루수 부문 골든 글러브를 수상합니다. 2005년부터 2008년까지 4년간은 동갑내기이자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야구에 눈을 뜨기 시작한 이대호와 각각 두 번씩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나눠가졌습니다. 신기하게도 김태균과 이대호는 타격 싸이클이 일치하던 해가 거의 없는데요. 이대호가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던 2006년과 2007년에 김태균은 2할 9푼의 타율과 각각 13, 21개의 홈런을 기록했고, 2005년과 2008년엔 김태균이 이대호보다 좀 더 나은 성적을 올리며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습니다. 특히 2008년 김태균은 31개의 홈런(리그 1위)과 0.324의 타율(리그 5위), 1.039의 OPS(리그 1위)를 기록하며 데뷔 이후 규정 타석을 채운 자신의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냅니다.

일본진출과 충격의 중도 퇴단
2009년엔 WBC에서 홈런, 타점 부문에서 1위를 기록하며 자신의 이름을 알렸고, 시즌 종료 후에는 FA 자격을 취득하며 일본 지바 롯데 마린스와 3년 간 70억엔(약 90억원)에 계약을 성사시키면서 일본 진출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일본에서 맞이한 첫 시즌인2010년, 타율 0.268, 21홈런, 92타점(리그 6위)을 기록하며 일본 첫 해 진출치고 나쁘지 않은 활약을 펼쳤습니다. 특히 일본시리즈에서 29타수 10안타를 기록하며 한국에서 한 번도 갖지 못했던 우승 반지를 일본에서 얻으면서 우승의 한을 풀기도 합니다. 그러나0.236의 득점권 타율과 24개의 병살타(리그 1위) 140개의 삼진(리그 2위)를 당한 것은 다음 시즌 보완해야 할 과제로 뽑혔습니다. 이듬해인 2011년엔 1년간의 일본 리그 적응을 바탕으로 더 좋은 활약을 펼칠 것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지진여파로 늘어난 낮경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상이 겹치면서 부진이 장기화 되었고 일본 리그 적응에 문제를 보이며 시즌을 마무리하지도 못한 채 중도 퇴단이라는 결정을 내립니다.

역대 최고 대우와 함께 한국으로 복귀
한때 팀 동료였던 이범호가 일본 진출 후 한국으로 복귀하면서 친정 팀이 아닌 기아 타이거즈로 이적했던 것과 달리 북일고 출신의 성골 프랜차이즈 스타인 김태균은 15억원이라는 역대 최고 대우를 받으며 한화 이글스에 복귀합니다. 2012년 복귀 첫 해부터 타율 0.363(리그 1위), 출루율 0.474(리그 1위), OPS 1.010(리그 1위)를 기록했고 시즌 중엔 역대 18번째 개인 통산 200 홈런을 달성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 복귀 첫 해 16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장타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는데요. 하지만 김태균은 이대호와 마찬가지로 원래 타격에서 홈런을 노리기 보다는 정확한 타격에 중점을 두는 타자로 자신의 커리어 하이 홈런 기록도 31개에 불과 합니다. 하지만 이승엽의 일본 진출과 심정수의 은퇴로 토종 선수로는 이대호와 김태균이 포스트 이승엽, 심정수로 지목을 받으며 기대치가 높아졌던 것이 많은 팬들에게 실망으로 돌아왔던 것 같습니다. 또 한국 프로야구가 당시 ‘타고투저’에서 ‘투고타저’로 돌아서면서 홈런 개수가 줄어든 이유도 있죠.
이듬해인 2013년은 복귀 첫 해보다 더 떨어진 홈런 개수와 장타력으로 ‘김똑딱’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 최종 성적은 0.319의 타율, 10홈런(팀 내 유일의 두 자릿수 홈런 타자)을 기록하며 다른 선수라면 훌륭한 기록이겠지만 김태균에겐 겨우 체면치레를 한 시즌을 보냈습니다. 지난해엔 0.365의 고타율(리그 2위)을 기록했고 0.463의 출루율을 기록하며 한국 복귀 이후부터 3년 연속 출루율왕 자리에 오르며 장효조와 함께 이 부문 역대 공동 1위에 올라와있습니다. 하지만 지난해가 기록적인‘타고투저’ 시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8개의 홈런과 84개의 타점으로 각각 18위와 17위에 머무르며 연봉 15억 원을 받는 선수, 그리고 팀의 4번 타자라고 하기엔 부족하다는 비난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올해도 15억원의 연봉을 받으며 KBO리그 최고 연봉자에 올라 있는데요. 아마 매 시즌 중간까지 4할에 가까운 타율을 기록하고도 몸값을 못한다고 욕먹는 선수는 아마 김태균 선수 밖에 없을 겁니다. 올해 새로 부임한 김성근 감독도 김태균은 0.330의 타율에30홈런 100타점을 쳐줘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그에 대한 기대가 매우 큽니다. 올 시즌이 끝나면 또다시 FA 자격을 획득하는 김태균, 가뜩이나 FA 시장의 거품 문제로 선수 몸값 100억 원 돌파가 눈 앞이라는 얘기까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는데요. 엄청난 몸값과 한화의 성골 프랜차이즈 스타라는 이미지 때문에 그가 아마 다른 팀으로 옮길 확률은 거의 희박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한화팬은 아니지만 영원한 한화맨으로서 팬들에게 계속 사랑 받으며 한화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는 모습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