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2pea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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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여름을 삼킨 소녀

사람은 어느 순간 갑자기 늙는다고들 한다. 어느 날 아침 거울을 들여다보면 전날보다 10년은 더 나이를 먹은 듯한 느낌이 든다는 거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돌아갔을 때, 나는 그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얼굴에 주름이 지거나 한 건 아니지만, 내가 어쩐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동안 한 방향으로 느릿하게 흐르던 삶의 강물이 방향과 속도를 바꾸었다. 곳곳에 위험한 소용돌이와 예측할 수 없는 급류가 숨어 있었다. 제리가 페어필드를 떠난지 얼마나 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아마 1년 이상 된 것 같다고 대답했겠지만, 실은 겨우 넉 달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더는 제리가 그립지 않았다. 제리의 얼굴이 흐릿해지는 만큼 양심의 가책은 커졌다. 제리도, 대니도 내 인상의 사랑은 아니었다. 내 마음에 불안의 씨앗을 심어놓았을 뿐이다. 평생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어쩌지? 누가 ‘그 사람’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살갗을 쓰다듬으니 머리가 텅 비고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라벤더와 장미 향기, 흙과 마른풀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너무 피곤해서 날뛰는 모기를 쫓을 힘도 없었다. 올빼미 소리와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 소리가 마구 헤집어진 내 영혼을 슬그머니 달래줬다. 인생이 강이라면 나는 닷줄이 모두 끊어진 배였다. 낯익은 강변을 떠나 크고 작은 급류와 폭포를 지나 새로운 강으로 휩쓸려 들어간 배. 내 존재 자체가 이상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밤이 외투처럼 나를 감샀다. 나는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 넬레 노이하우스 <여름을 삼킨 소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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