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 못 보신 분 많지 않을 겁니다. ‘수트빨’ 액션에 뻑 간 지인들이 입에 닳도록 콜린 퍼스를 칭찬했기에 안구 정화는 되겠지만, 솔직히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오빠와 아저씨의 한끗 차이로 더블수트의 패션 따라잡기가 화제가 된 터라, 어중간한 007 시리즈의 콜린퍼스 버전쯤으로 기대했었거든요.
첩보영화들이 다 그렇듯 킹스맨의 신의 한 수는 스토리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정치적 허무주의를 말하고 싶은 것 같았습니다. 물론 ‘지구 멸망을 대비하기 위해 인구수를 줄여야 한다’는 악당 발렌타인의 발상은 그닥 새롭지는 않았습니다. 휴대폰 유심칩으로 인간의 뇌파를 조절해 절제력을 잃게 만들어 서로 죽이게 만든다는 설정은 다소 현실감 있게 다가왔지만요.

제가 눈여겨 본 장면은 영화 ‘올드보이’의 ‘장도리 액션’을 참고했다는 교회 몰살신이었어요. 백인 목사와 신도들은 꼴통 보수 교회에서 낙태·동성애·흑인·유대인 등이 미국 멸망의 이유가 될 것이라며 분개합니다. 그리고 발렌타인에 의해 미치광이로 돌변해 100여 명이 뒤엉켜 유혈 난투극을 벌이죠. 죽기살기로 치고받는 모습을 이렇게 유쾌하게 그려낼 수 있다니, 분명 신의 한 수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런데 보고 있자니, 뭔가 싸했습니다. 대개 이런 설정은 기득권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요? 이 뇌섹남은 살짝 비틀어 놓았더군요. 팍팍한 삶의 분노를 소수자의 혐오로 돌린 딱한 피해자로 말입니다.
감독은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거대한 살육 계획을 세우고도 피만 보면 겁내는 발렌타인은 지구 온난화와 같이 환경문제에 집착하는 진보 지식인으로, 영국의 있는 집 자제 출신의 킹스맨 후보들은 이기적인 바보로, 킹스맨 귀족주의 수장은 발렌타인 꼬임에 넘어가는 머저리 엘리트로 풍자했습니다.
이처럼 엘리트, 정치인, 서민 등 닥치는 대로 까대는 감독의 정치적 허무주의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기에 더욱 관심이 갔는지도 모릅니다. 메르스 사태를 놓고도 청와대와 정치권이 해대는 쌈박질을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는 화를 내고, 누군가는 기회를 노리고, 결국 서민들은 개고생을 하는 그런 구조는 잘 안 변할 것 같거든요.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서울 특파원으로 근무했던 다니엘 튜더가 최근 펴낸 ‘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은 쌈박질만 해대는 대한민국 정치권을 절망감, 무력감으로 바라보는 사회에 대한 일갈을 담고 있습니다. ‘과연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인가’에 관한 도발적 질문을 제기한 거죠.
그 기저에는 보수와 진보가 창과 방패 역할을 하며 성장해나기는 커녕 언제부터인가 일당 독주체제를 구축했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새누리당은 경제 지표 올리는 공약(이를 테면 기득권 밀어주기) 외엔 별다른 철학이 없고, 새정연은 새누리당을 반대하는 외에 뭐가 없으니까요. 새누리당의 좌클릭 공약은 51%의 표심을 포섭하기 위한 영리한 전략이지만, 정권을 잡고 난 뒤 ‘나몰라라’해도 우리는 또 다시 잊고 마니까요. 그리고 젊은 세대들은 갈수록 정치에 무심해집니다.
물론 모든 정부가 언제나 만능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수준에 걸맞는 정부를 갖게 돼 있다’는 작가의 일침은 폐부를 찌르는 것처럼 참 아팠습니다. 세월호가 발생해도, 메르스가 터져도, 마치 재난이 연례행사처럼 맞아야 하는 현실은 그대로인 것 같아서요. 그럼에도 우리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여전히 갈등하며 싸우고 있어서요. 전혀 달라지지 않는 이 현실이 어쩌면 더 큰 재난이 아닌가 하고요.
영화 속에서는 킹스맨과 같은 영웅이 있다지만, 우리네 현실에서는 기댈 구석이 있는 영웅이 없어 보입니다. ‘영웅 없는 시대는 불행하지만, 영웅을 요구하는 시대는 더 불행하다’는 브레히트의 말이 콕 와서 박히네요. 대체 우리 젊은 세대들은 앞으로 어떤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