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okerz
3 years ago10,000+ Views
잠들기 직전 떠오른 생각을 서둘러 끼적였는데, 불을 켜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아침에 보니 남은 것이라곤 말라붙은 펜과, 잉크 똥만 드문드문 남아 있는 종이쪼가리 뿐이었다. 그건 정말 멋진 문장이었다.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모든 것들이 가지런하게 정렬되는 느낌.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딱 그만한 공간에 밀어 넣는 느낌. 그 문장을 떠올렸을 때 느꼈던 짜릿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거기에다 그 누구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자각에서 오는 환희가 뒤따랐다. 미답지의 정복에 목숨을 걸었던 모험가들은 그런 환희의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 문장을 기억해내지 못한다면 어젯밤의 환희는 무의미해진다. 그건 내 인생을 바꿀 문장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건 분명 내 인생을 바꿀 일생일대의 문장이었고, 나는 그 한 줄을 다시 떠올려야만 한다. 한 문장에 딱 떨어지지 않는 아이디어는 쓸데없이 산만한 잡생각일 뿐이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는 놀라운 아이디어는 언제나 하나의 단순한 문장이다. 어젯밤의 문장이 그랬듯이. 기억은 헤적일수록 혼란해졌다. 기억해내려는 것은 빠를수록 좋지만 이럴 때는 성마른 다급함보다 조근조근한 치밀함이 도움이 되는 법이다. 나는 노련한 탐정처럼 내 생각의 행로를 뒤쫓았다. 펜을 끼적이고 나서 잠들기 전까지 들었던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보고, 불현듯 침대에서 일어나 그 한 줄을 적기 전에 했던 행동들을 차례차례 떠올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내 기억은 주변만을 어슬렁거릴 뿐 '이거다!'하는 간밤의 그 한 줄에는 닿지 못하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어젯밤의 그 한 줄도 사라질지 모른다. 마음은 점차 초조해졌고 왼손은 거의 반사적으로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내용은 여전히 모르겠지만 그 문장이 환상적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술자리에서 꺼냈더라면 소주 두세 병쯤은 거뜬했을 문장이었고 무겁게 가라앉은 회의실의 분위기를 띄우기에도 딱 맞을 한마디였다. 화난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도, 매번 약속시간에 늦는 남자친구를 반성하게 만드는 데도 그만이었을 그 한 줄. 그건 정말이지 언제 어디서나 잘 어울렸을, 단 하나뿐인 마법의 문장이었다. ...하지만, 어젯밤 그 문장은 역시 똥이었을지도 모른다. 일전에도 심연으로 가라앉던 기억의 조각을 건져낼 수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망각의 손길에서 겨우 빼내온 기억들은 정말이지 별 볼일 없는 이야기였다. 수십억을 벌어줄 것 같았던 사업 구상은 턱없이 순진한 생각이었고, 시대를 아우르고 역사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던 사상은 이미 옛 거장들이 제시한 지 오래, 이제는 누구나 실컷 씹고 뜯고 맛봐 너덜너덜해진 생각의 잔해일 뿐이었다. 아니다. 나는 지금 그 문장을 떠올리지 못할 것을 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솝우화의 여우가 그랬던 것처럼. 어젯밤의 한 줄은 여느 때와 달랐다. 다음날 아침이 되면 부끄러움과 실망만 남겼던 문장들과 달리 어제 그건 진짜배기였다. 술만 마시면 떠올라서 다음날 아침이 되면 카톡과 페북과 트윗에 숙취처럼 덕지덕지 묻어있는 그런 시시하고도 끔찍한 문장이 아니었다. 배변욕구가 치밀었다. 화장실에 들어서던 찰나 기억이 멈칫했다. 어젯밤이 바로 이랬다. 잠들기 전 나는 화장실에 갔었지. 헛손질만 하던 손끝에 기어코 착각할 수 없는 묵직한 손맛이 걸려왔다. 크지만 가벼운 물체가 수면으로 떠오르듯 그것은 조용하게 떠올랐다. "보헴시가 넘버 6는 막상 피워보면 똥이다." 내가 그러면 그렇지……. 익숙한 실망감. 지금까지 끼적였던 모든 문장들처럼 똥 같은 문장이다. 거기에 세상을 바꿀 만한 아이디어 따위는 없었다. 계속 깜빡하고 넘어갔어도 내 인생은 무탈했을 것이다. 깜빡할 만하니까 깜빡했던 것이라는, 지금 와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깨달음이 나를 덮쳤다. 값진 깨달음들은 대부분 변기 위에서 떠오르는 법이고 대부분의 똥도 변기 위에서 만들어지는 법이다. 어젯밤도 그랬고 오늘 아침에 또 이렇듯이. 처음에는 내게 속하지 않았으나 내가 되어버린 것, 그리고 비록 지금은 나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나 결국에는 나의 일부가 될 것을 버리고 왔다. 맞다. 똥 싸고 왔다는 소리다. 어, 이건 괜찮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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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장일지 궁금했는데!ㅋㅋㅋ 보헴시가 넘버 6이 똥이라는 것은 똥같은 맛이라는 것인지 똥같은 맛은 무엇인지도 급궁금해지네요 ㅋㅋ
@paradis 보헴시가 넘버6는요ㅎㅎ 기대를 가득 안은 채 샀다가 억지로 스무 개비를 피우게 만드는 담배...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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