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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 승조 (陳壽 承祚) A.D.233 ~ 297
어찌보면... 이 칼럼을 시작하며 가장 먼저 다뤘어야 할 사실상 삼국지의 가장 중요인물을 이제서야 다루게 되니,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삼국지정사(三國志正史)의 저자 "진수"다. 사실, 수천 여 년 이상을 자랑하는 유구한 중국문명.. 심지어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와 함께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인 중국의 역사는 여간 장대한게 아니며 그 중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후한 말 ~ 삼국시대는 고작 한 세기 밖에 안되는.. 이리 말하면 좀 뭐하지만, 말 그대로 "찰나" 에 불과하다. 그런 찰나의 순간(...)을 중국 본토는 물론 타이완과 동남아시아 및 중화권을 넘어 여기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길고 긴 중국역사 중 가장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넘치는 시기이자 큰 인기와 관심을 얻게 된 시대로 만들어 낸 것의 시작은 바로 진수의 공적인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토 다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 뭔 개소리여, 삼국지는 나관중이지! ' ' 난 이문열꺼만 봤구만 뭔 소리? ' ' 오레노산코쿠지와요코야마미쓰테루상노산코쿠지데스 ' 다 맞다. 모두 옳다. 무엇보다 오늘날 대인기의 삼국지가 있게 된 가장 큰 공은 누가 뭐래도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저자인 "나관중(羅貫中)" 및 나관중 이전에 삼국지정사의 부족하거나 아쉬운 부분들을 연구하여 주석을 달았던 "배송지(裴松之)", 그 밖에도 현대에 와서 이를 바탕으로 한중일 삼국에서 평역본과 흥미로운 미디어믹스들을 양산해낸 많은 이들이 오늘의 삼국지가 누리는 인기와 명성을 있게 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연계물들 역시 애초에 진수가 삼국지를 집필하지 않았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였다. 참고로 삼국지정사는 나관중의 연의가 창작되고 이게 또 인기대폭발하며 아주아주 근래에 그리 일컫는거지, 지금도 중국에 가서 '삼국지'라 하면 그냥 정사를 말하며 삼국지연의만 따로 연의라고 한다. 이는 마치 짜장면과 짜파게티를 구분할 때 짜장면을 가리켜 굳이 '정통짜장면'이라 안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정사는 말 그대로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엮은 거라 제법 많은 편수로 이루어져 있고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에 각 서들은 여러 인물들 위주의 열전들로 구성되어 있다. 연의만 줄기차게 읽다 환상을 품고 접하면 그야말로 모든 불면증을 치료할만큼 노잼.. 아니, 핵노잼이다. (일단 구해보기조차 버겁다..,) 다시 진수의 이야기를 해보자면 그는 당시로는 파서군(巴西郡) 안한면(安漢縣) 출신이며 오늘날 중국 쓰촨성의 난충 시에서 북쪽으로 50~60km가량 더 가면 그쯤이 대략 진수의 고향 위치다. 참고로 이 동네는 중국내에서 일조량이 매우 적은 곳 중 하나인데, 여름 기준으로 오전 8시쯤 일출, 오후 5시쯤이면 일몰로 어둑어둑하다고 한다. 구글링 해보니 이 동네 5성급 호텔 일반객실의 평균가가 우리돈 ₩ 50,000. 쯤이라는데 매우 싸다! 내가 예전 여친과 자주 가던 캘리포니아모텔의 1박이 ₩ 40,000. 주말 피크타임에 가서 일반실 없다고하면 어쩔 수 없이 가는 디럭스룸이 ₩ 50,000.이였는데... 대신 디럭스룸은 일회용품을 그냥 줘서 실제로는 ₩ 9,000. 더 비싼 셈이다. 여튼 진수의 고향을 보면 알겠지만 촉한(蜀漢)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제법 학문에 밝았다고 하며 그 덕에 초주의 휘하로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그렇다고 초주가 1:1 과외를 해준 건 아닐거고 당시 트렌드상, 아마 초주가 가르치는 여러 문하생들 중 하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지연의나 코에이의 게임에서 잉여노쓸모로 나와 그렇지, 초주는 촉한의 당대최고의 학자들 중 한 명이였고 명성이 대단했기에 그런 초주의 문하생은 아무나 될 수 없었다. 참고로 초주는 "도참설(圖讖說)" 이라는 일종의 예언과 관련된 이론의 신봉자인 촉한판 노스트라다무스였다..;;; 본인도 똘망진데다 스승인 초주빨이 겹쳐 꽤 일찍 벼슬에 나섰지만 원래 책만 후비는 애들이 대개 그렇듯, 사회생활은 잘 못 했는지... 당시 실세였던 환관 황호를 비방하는 상소를 올리다 좌천 세 번에 파면 한 번을 먹었다. 보드게임 하다 주사위 잘못 던지면 "처음으로 돌아가시오" 이런거 여러 번 걸리는거랑 비슷한 사회생활을 했다..... 내내 이렇듯 정권실세에게 개김질 하다 파면크리 먹고 백수생활 하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한량처럼 살 때 촉한은 위나라가 낳은 클리프행어 등애의 손에 멸국을 맞고 검각에서 버티던 강유마저 종회에게 항복하며 진수는 집에서 노는 사이, 국적이 촉한에서 위로 바뀐다. 그리고 여전히 노는 동안 사마염이 위를 멸망시키고 진을 건국하며 백수진수의 국적은 위에서 진으로 또 한 번 바뀐다. 이런 복잡한 귀화사를 가진 진수는 진사람이 되서야 장화라는 한 문관이 한 때 꽤 날렸던 그의 학문을 아까워해 천거해주며 다시 벼슬아치로 재취업에 성공한다. 솔직히... 인성 자체는 그닥이였던 듯 싶다. 촉한시절 임관동기였던 자와 술자리 계산문제로 다툰 후 원수지간 되었는데 진수가 재임관 후 마침 그 자도 다른 이의 천거로 다시 벼슬에 나오려는걸 진수가 혼신의 뒤끝으로 막았고... 당시 촉한출신 벼슬아치들이 여럿 있었는데 이들 모두 진수와 사이가 다들 별로였다. 꼭 그렇다고 어디 나와 있는건 아니지만.. 아마도 진수는 저런 직장내 왕따도 당하고, 별 다른 공적이 없으니 인사고과가 별로라 승진도 잘 안되어 그랬는지... 그 후부터 촉한의 이런저런 자료와 기록들을 모으고 엮어서 역사서 저술이라는 히키코모리나 해낼 법한 일을 해내고 이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오늘날... 여러분과 내가 좋아하는 삼국지가 된다! T-T 진수가 만약 직장동료들과 막 사이 원만하고 일도 열라 잘 해서 제갈량처럼 온갖 거 다 떠맡고 그랬으면 그렇게 한가롭게 자료 모아서 역사서 만들 생각도 안했을거고 여유도 없었을거다. 물론 진수 본인의 삶이야 한결 업그레이드 되었겠지만 그야 내알바 아니고, 따당하는 일못인 덕에 우리가 오늘도 삼국지를 볼 수 있는 것. 물론, 내가 반 년이나 쉬다 이제 와서 다시 이 칼럼을 연재하는 이유가 결코 직장내 왕따 및 인사고과 하위자여서가 아님을 명시한다. 이렇듯, 인성이 별로인 진수의 삼국지는 그야말로 대박을 친다. 한창 위와 촉의 기록을 모으던 터에 마지막으로 발악하던 오나라까지 망하며, 거기서 유입된 오출신 학자들과 공동으로 오의 역사기록들까지 합쳐 엮으며 삼국지는 완전체가 되었고 보통 당시에는 인정 못 받는 경우가 많음에도 진수의 삼국지는 이미 당대에도 여러 학자들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본인도 내 길은 이거다 싶었는지 더욱 삼국지 편찬에 집중... 심지어 본인을 재임관 하도록 추천해준 장화가 다시 더 높은 직위에 천거하자 장화의 반대파에서 태클이 들어왔는데, 진수는 그걸 핑계 삼아 승진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실 무렵 반대파의 집요한 태클에 또 다시 파면 당하여 백수가 되고 만다. 허나 그간 정력을 다해 삼국지를 짓고 또 어머니도 여의고 게다가 정치적인 태클도 워낙 심히 받다 기어이 파면까지 되며 그가 받은 스트레스도 적잖았을 것으로 보여진다. 결국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안되어 본인도 병을 얻고 사망하고 만다..... 그가 죽자, 그가 지은 삼국지를 읽었던 학자와 고위관리들은 그와 그 책을 잊지 못하여 당시 천자에게 상서를 올려 진수가 지은 삼국지가 겁나 명작이니 그냥 저렇게 없어지는건 아니될 말이라며 애원했고 이에 천자도 사람들을 진수의 집으로 보내 이들로 하여금 인간복사기가 되라는 어명을 내려 이렇게 수작업으로 베껴진 삼국지는 세상의 빛을 본다. 위에서 말했듯 그 분량이 대단하지만.... 근 100년의 역사를 엮은 것치고는 간소한 부분도 많았다. 그런 아쉬움에 훗날 송나라의 3대 황제인 유의륭이 부족한 부분을 좀 더 기록과 자료 및 민담 등을 걸러 주석을 달게 하였으니 이 때 주석을 달았던 것이 배송지다. 일부 떠도는 소문에... 제갈량에게 처형 당한 촉한의 장수인 진식이 진수의 부친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픽션! 그냥 픽션도 아니고 개픽션!! 저 진수가 지은 삼국지정사에 의하면 진식은 3차 북벌 당시 참전했다는 기록 이후로는 등장이 없다. 그리고 연의에서 진식이 처형되는 4차 북벌 자체가 나관중이 지어낸 뻥인데다, 그 연의가 맞다셈쳐도 연의 속 진식의 사망시점이 230년이니... 233년생인 진수가 3년 전 사망한 진식의 아들이 되는 방법은 현대에서나 가능한 냉동정자보관 기술만이 정답이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그 긴 시간 피나는 노력과 정성으로 온갖 자료들을 끌어모아 역사서를 저술하는데 자기 부친의 기록만 하필 부실한 것도 말이 안된다. 여튼 그가 촉한출신에 위를 거쳐 진의 신하가 된 관계로 당시부터도 명서라는 호평과는 별개로 기록의 공정성에 대한 논란 및 이에 대한 가십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역사서에 좋은 기록으로 넣어줄테니 뇌물을 요구했다던가 (그런데 이건 나였으면 진짜 이랬을 듯.ㅎㅎㅎ) 사마가문에 대한 비판이 유독 없다거나 등등... 특히 이 사마가문의 비판관련 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애초에 진수도 결국 사람인지라 현 정권의 시초 및 그 가문 사람을 객관성있게 표현할 깡은 없었다는 주장과 또 하나는 위에 진수 사망 후 인간복사기들이 가서 진수가 쓴 삼국지를 베끼는 과정에서 누락 시켰다는 주장이다. 뭐 그런데 이건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는 부분이니.. 혹여 독자분들 중 근시일내로 안타깝게 운명하시는 분이 저승가서 진수를 만나거든 물어본 후 내 꿈에 나타나서 알려 주시기로 하자. 여튼 당시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자신들의 출신이나 정치성향에 따라 어땠는지는 모르나 현대에 와서는 그의 저술방향에 있어 두드러지는 편향성은 거의 없다고 평가 받고 있다. . . . 가장 마지막이 7월 2일에 올린 노숙편이니 그날부터 거의 만 반 년만에 올리네요...ㅎㅎ (하필 컴백편 주인공이 노잼 진수...;;;) 제가 4월에 이직을 했는데, 새 회사가 제가 지금껏 살며 다닌 그 어떤 회사들보다 일이 더 많고 어렵네요.. 맨날 일에 치이다 집 와서도 일하고 새벽 3~4시에 자고 제가 사이버대학에 등록해 공부 중인데 그것도 벅차고 가장 큰 이유는 빙글의 인터페이스가 제 입장에서는 좀 직관적이지 않고 불편하더라구요.,.. 사실 여러 번 썼다 말았다를 반복 했었어요. 그렇게 저도 삶에 치여 잊고 살았는데, 간간히 뜨는 알림에 들여다 보면 꽤 긴 시간 놓고 있음에도 저와 제 글을 잊지 않아 주시고 돌아오라는 기다린다는 댓글 남겨 주시는 분들의 댓글을 보며 완전 진짜 마음 울컥 했습니다....T-T 제 바쁜 삶이 달라지진 않다보니 꾸준한 연재는 약속 드릴 수 없지만(뭐 이건 전에도 그러긴 했죠ㅋ) 그래도 텀이 길지언정, 예전처럼 많은 분들이 봐주시지 않는다해도 연재는 계속 해나가겠습니다. 사실 이 6개월도 제가 글을 안쓰겠다 마음 먹은 건 아니였고 어쩌다 저쩌다보니 진짜 시간이 쏜살처럼 간거예요ㅋ 아무튼 이제 솔크도 지났고 곧 새해니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날 추우니 감기들 조심하세요! 그리고 본의 아니게 긴 휴재에 대해 사과 드리며 그럼에도 여태 기다려 주신, 그리고 다시 돌아와 읽어 주신 분들께 깊은 고마움을 표합니다. 제 글 때문에 빙글 안지운다는 분들과 돌아오라고 언제까지고 기다리겠다는 분들 정말 고맙습니다. 어차피 노총각이라 주말에 시간이 남으니 최대한 빨리 연재 해보려 노력할께요!
어느 일본도시의 캐릭터 맨홀 테러사건.txt
5년 전, 일본 시즈오카현 누마즈시에 설치된 러브라이브 선샤인 캐릭터 맨홀 11종. 팬들이 3400만엔을 클라우드 펀딩으로 모금하여 완전자비로 설치한 물건. 덕후들이 스스로 관광 컨텐츠를 만들어준 셈이라 시에서도 반기며 홍보책자까지 만들어 배포했고, 주민반응이나 관광효과가 은근 좋아서 뉴스도 여러번 타게됨. 결과 다른 시에서도 따라하며 일본 지자체에서 캐릭터 맨홀 붐이 일어나기도 함. 덤으로 설치 초창기에는 팬들이 찾아가서 맨홀을 깨끗히 닦아주는 유행도 퍼지며 별개로 화제가 되기도. 암튼 지역와 오타쿠 서로서로 행복하게 끝난 사업... 이였는데.... 분위기가 좋은걸 본 관종들이 찾아가 맨홀을 긁거나 페인트를 뿌리는 테러사건이 발생. 성지순례하는 덕후를 생각해 인적이 드문 공원이나 시골쪽에도 설치한게 범죄의 표적이 됐던 것. 설치로부터 열흘도 안 된 시점이였다. 소식을 들은 팬들이 곧바로 찾아갔지만 긁힘과 페인트가 물수건으로 없어질리가.... 그리고 이런 사건이 벌어진 누마즈시는 절대로 이걸 단순한 소동으로 여기지 않았다 사건이 알려진지 얼마 안 된 새벽에 시의원들이 달려가서 현장을 둘러보고 피해현황과 복구일정을 확인하며 심상치 않은 상황을 공유. 아침이 되자마자 누마즈 시청에선 맨홀의 회수, 피해현황, 향후대응에 대한 성명을 발표. 이어서 공공기물 훼손 혐의로 경찰에 고발장을 접수하였다. 덕분에 트위터에서 '다음엔 정x을 뿌려줄것'이라며 낄낄대며 상황파악도 못하던 테러범들은 누마즈시가 전력으로 휘두른 공권력 풀스윙을 처맞고 모조리 체포당했다. 이후엔 추가피해 방지를 위해 기존 위치에는 색이 없는 맨홀이 설치되게 되었고 컬러 맨홀은 인적이 많은 역앞 상점가와 전시관에 설치한 뒤 CCTV로 24시간 감시하여 테러사건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됐다고 한다 출처 : 더쿠 오.. 지자체가 일을 아주 잘 하네요.. 남의 기쁨과 성의를 왜저렇게 망치고싶어할까요 참 할짓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이다엔딩이라 다행이군요
노숙 자경 (魯肅 子敬) A.D.172 ~ 217
이 칼럼을 시작하며 대략 스무 명 가량의 인물들을 다뤘지만 거의 매번 붙는 수식어가 바로 "연의의 피해자"라는 타이틀. 피해자가 있으면 반대로 수혜자도 있어야 하는데, 어쩌다보니 의도치 않게 피해자들만 줄줄이 다루고 있다...;; 오늘의 주인공 역시 비록 그 피해가 앞선 다른 이들에 비해 경미하기는 하나, 그래도 피해자라면 피해자인 인물. 바로 "노숙"이다. 적벽대전 앞두고 항복론자들이 대다수였던 오에서 가장 앞장서서 항전을 외쳤고, 유비세력과 오의 연합에 있어 일등공신에, 주유 사후 오의 군권을 총괄했던 그의 숨겨진 그리고 연의의 각색 전의 본모습에 대해 알아보자! 양주 임회군 동성현.. 오늘날 중국의 안후이성 딩위안 출신이며, 없어 보이는 이름과는 달리 양주의 대호족 출신 금수저였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할머니 손에서 자란 오냐자식이였으며 대대로 있는 집 아들내미라 마음의 여유가 넘쳐나다보니 재산을 들여 인근의 빈자들을 돕고 베풀며 뜻 통하는 명사들과 사교나 하며 근심없이 살던 양반이였다. 정사의 노숙전에 따르면 우리가 아는 이미지와 달리 체격이 제법 큰 편이였던 것으로 보이며, 난세에 걸맞는 스킬을 보유해야겠다는 생각에 어려서부터 궁술, 마술, 검술 등을 익히고 가난하지만 힘 좀 쓰던 장정들을 어깨로 고용하여 적잖은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주유와의 인연도 이때 맺었으며, 당시 이미 공직에 있던 주유가 군량을 좀 협찬 받으러 노숙을 찾아가자 아예 곳간을 들어내다시피 퍼줬고 이에 뻑간 주유와 비즈니스를 넘은 친분을 나누게 되었다고...ㅎ 이래저래 재산과 명성을 다갖춘 노숙을 가장 먼저 리쿠르팅한 것은 역시 당시에 상당한 유력군주였던 "원술". 그렇게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노숙이지만 원술의 하는 꼬라지를 보니 얘는 아니다 싶었고 당시는 무슨 사직서내고 마음대로 퇴사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였어서 원술의 스타일상, 그냥 그만둔다하면 뒤끝작렬이 예상되었던터라... 노숙은 일가친척 다 이끌고 짐을 싸서 '도망'을 친다. 그럼 그렇지, 빡친 원술은 애들을 풀어서 도망치는 노숙을 잡아오게 하였는데, 추격대와 마주친 노숙은 이들을 설득하는 한 편, 방패를 세워놓고 활로 이 방패를 꿰뚫는 슈퍼파월을 보여주며, 호락호락 잡혀가진 않겠다는 경고를 했고, 설득도 설득이지만 그 궁술을 보고 쫄아붙은 추격대는 그대로 되돌아 가버렸다. (벌써 이 대목부터 노숙이 문약한 선비가 아님이 드러남) 이러고 도망가서 의탁한 사람은 바로 자신의 과다협찬을 받고 베프를 먹은 '주유'였다. 이 때, 주유는 자신이 모시던 "손책"과 노숙의 미팅을 주선, 손책도 노숙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헤드헌팅을 하려던 때 노숙의 사실상 부모님에 진배없던 할머니께서 돌아가셔, 노숙은 할머니의 장례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 와중에 노숙의 친구였던 "유엽"이 마침 인근에서 세력을 키우던 '정보'(여러분이 아는 그 정보 아님)가 인재를 구한다니까 같이 가보자는 청을 받고 가려는데 (그냥 별 생각없이 아무나 섬기고 보는 스타일인가....) 그 소식 듣고 찾아온 주유의 설득에 당시 손책이 막 죽고 뒤를 이어 어린 나이에 어버버하고 있던 "손권"을 섬기게 된다. (아무나 섬기는거 맞는 듯...-_-;;) 이 면접(?)에서 손권에게 노숙은 "천하이분지계"라는 테마로 프레젠테이션을 했고, 여기에 감명받은 손권은 바로 노숙을 임용한 뒤 최측근에 두고 쓰게 된다. 당시 노숙의 프레젠테이션의 거국적 스케일은 아직 미성년자요, 아버지를 여읜지 그리 오래지 않아, 사실상 아버지 역할하던 형까지 잃고 난 후 자기 혼자 어떻게 세력을 굴려야할지 가늠을 못 잡던 손권에게는 실로 파격적이였으며, 심지어 훗날 천하의 남쪽을 평정 후 천자의 자리까지 나가시라는 노숙의 우쭈쭈가 가미되어 손권은 기분이 째졌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손권의 평생 겐세이맨이였던 "장소"는 노숙이 아직 손권을 곁에서 바로 보필하기엔 젊어서 경험도 적고 태도가 건방지다는 이유로 노숙의 임용을 반대했는데 그럼 그렇지, 손권은 장소의 말을 그냥 씹고 노숙을 중용했다. 보통 한 세력의 우두머리를 섬기기 전에는 그 휘하의 실세들과도 접견하는 시간을 갖는데, 손권의 당시 오른팔인 주유와 왼팔인 장소를 조우하던 자리에서 주유와는 그닥 코드가 안맞던 장소였던지라 주유가 왠 젊은 놈 하나 데려와서 주군 측근에 바로 꽂을라치니 장소가 노숙에게 시비를 좀 걸었나본데, 노숙 역시 손권 다음 No.2인 주유가 하도 설득을 해서 온건데, 왠 꼰대가 태클을 거니 그닥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진 않았던 모양...ㅋㅋ 이때부터 장소와 노숙은 서로를 태클거는 상호태클지간으로 둘의 관계를 시작하게 된다. 노숙이 오에서 펼친 가장 대표적인 정책은 "친유비정책". 당시만 해도 유비는 자체 세력은 별 볼일 없이 유표에게 의지하다 유표가 죽고, 유표의 뒤를 이은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선언하여 형주의 반조조파였던 유표의 장남 유기와 결탁한 상태였는데.... 노숙은 비록 유비세력이 당장은 부실하지만 그 강대한 원소도 조조에게 작살나고 중원의 큰 세력이던 형주의 유씨집안도 조조에게 꿇은 상황에서, 천자를 등에 엎고 승상이라는 위엄을 지녔던 조조를 도리여 역적으로 몰며 대항하는 유일한 세력이며, 당시 천자인 헌제가 직접 족보를 뒤적여 한실의 종친임을 인정 및 좌장군이라는 결코 낮지 않는 공식직함도 파준 "명분"에 주목했다. 그런 유비와 손을 잡으면 유비가 가진 포텐과 명분을 빌려 조조와도 맞서고, 조조와 맞서는 것은 후한조정과의 맞다이를 의미하여 사실상 역적이 되지만, 유비가 지닌 명분 덕에 오히려 역적을 도모하는 정의파로 이미지 세탁이 되기 때문. 사실 유비의 이 메리트는 상당해서, 비록 한실종친이라고는 해도 서민출신에 세력도 별 거 없던 유비가 공손찬, 원소, 유표, 조조 등의 당시 내로라하던 강자들의 환영을 받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저 중 공손찬은 그런 유비가 지닌 명분보다 유비와의 개인적 친분으로 유비를 서포트 해주긴 했지만 당시같은 난세에 인격이 꽝이던 공손찬이 단지 그저 동문이라는 이유만으로 유비를 도왔을리는 없었기에... 당시 오 내부에서 이런 유비의 전략적 가치를 그리 크게 평가하는 이는 사실상 전무했다. 어쨌건 유비의 군세 자체는 당장 오에 있어 큰 전술적 가치가 없을만큼 대단치 못 했기 때문이다. 허나 이건 유비의 군사력만을 놓고 보는 한정적인 '전술적' 시야에서 그런 것이고, 그 외나 그 이후의 여러모로 넓고 멀리 바라보는 "전략적" 시야에서는 유비가 지닌 가치와 그 활용도가 대단했는데, 오에서는 이런 유비의 전략적인 요소를 뚫어보는 정치적 대국안을 지닌 이가 없었다는 뜻. 노숙은 손권에게 자신과 손권이 봐야 하고 가야 하는 길은 당장의 강동수성이 아닌, 장강 이남의 세력을 규합하여 강북을 평정한 조조와 대치하며 나아가 제위에 오르는 길임을 인지시켰고 그 시작점에서 시작하는 사업이 바로 친유비정책이였던 것. 노숙은 진정으로 손권을 위한 충성심으로 가득한 자였고 유비에 대한 부분도 오로지 자기 주인에게 도움이 되는가 여부의 판단에 따른 것이지, 전혀 절대 유비가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닌 것이였고.. 이는 내 예전회사의 김이사에게 사람들이 들러붙어 온갖 설탕발림을 쳐바르는 이유가 회식 때마다 누구도 말 않는데 도대체 어떻게 알고 와서 술빨, 안주빨 다 극대화 시키고 노래방 가자고 진상 부려서 다음날 출근할 사람들 새벽 4시까지 집 못가게 해놓고는 이사씩이나 쳐되는게 법카로 1원 아니, 1전 한 번 긁는거 없이 시발새끼 담배도 심지어 애들꺼 달래서 피우는 그 새끼를 사랑해서가 아닌, 그 새끼가 인사고과 평점을 메기는 나쁜놈의 새끼라 어쩔 수 없음과 같다. 노숙이 이러한 친유비정책을 진행하며 가장 주안점으로 삼은 것은 손권세력과 유비세력을 서로 상호의존관계로 만들어 이와 잇몸이 되게끔 유비의 세력을 어느 정도 성장시키는 것이였는데, 이러한 투자를 위해 노숙은 철저하고 꼼꼼히 유비를 패트롤 하기 시작 했으며, 유표의 사망 당시 조문을 구실로 유비를 첫 대면한 것을 시작으로 심지어 유비가 조조에게 작살나서 허겁지겁 쫓기는 상황의 장판파까지 가서 유비를 살피며 손권과의 동맹을 제시했다. 삼국지연의에는 이런 노숙의 모든 선견지명과 노력이 다 짤리고 그냥 제갈량이 손권 단물 빼먹으려 뭣도 없는 주제에 허세로 혼자 유-손 동맹을 결성시키는 듯 나오지만 사실은 이렇듯 노숙의 선노력에, 이를 합당하다 여긴 양측의 초천재인 제갈량과 주유의 납득. 그리고 이 재사 셋이 논리를 모아 손권을 설득한 결과. 결국 이 동맹의 시너지는 둘을 합친 것보다도 최소 5배 가까이 더 많고 경험많은 대군단을 거느린 조조군세를 불싸르게 되며 사실상 조조는 이날 이후로 장강 이남을 포기하고 유종의 항복으로 얻은 형주의 장강 이남도 잃게 된다. 이후 적벽대승의 지분으로 유비는 형주의 장사, 영릉, 무릉, 계양 및 남군의 공안까지 다스리는데 손권의 허가를 얻어내는데 여기서도 손권을 강하게 설득한 것이 노숙. 삼국지연의 속 노숙은 제갈량에게 놀아나고, 주유에겐 갈굼 당하며, 손권의 눈치를 보는 뭔가 강동의 빵셔틀처럼 나오지만 사실은 열라 기 쎈 주유, 손권에게 당장은 좀 손해여도 훗날을 위한 투자임을 인지시켜 유비에 대한 지원을 설득하고 또 이런 유비에 대한 서포트를 발판으로 손권을 황제로 만들려는 거국적 스케일의 정치가였던 것. 주유 사후, 주유의 간언 및 손권의 의지로 노숙은 오의 군권전체를 통솔하며 실질적인 오의 서열 2위가 되고 이 때 각 군영들을 시찰하며, 평소 글도 모르는 잡나부랭이 취급하며 무시하던 "여몽"이 니미 도리여 자기도 못 보는 부분까지 캐치해가며 자기를 가르치려들자, 그 유명한 오하아몽 & 괄목상대 사자성어가 등장하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는 후에 여몽편에서 다루기로.... 하여간 이때껏, 스스로 문무겸전이여서 장소처럼 매가리도 없는게 쥐뿔 글 좀 읽었다고 앵기는 것들, 이전 여몽처럼 무슨 대가리도 근육일 것 같은 힘만 쎈 무식종자들을 모두 무시하던 노숙이였으나 이 일을 계기로 여몽과 급친해진다. 이 와중에..... 노숙의 작품이던 유-손동맹의 금이 가는 사건이 발생하니 이는 바로 "유비의 익주정벌"... 일전에 주유와 감녕의 주도로 유장은 좆밥이고 형주도 비록 유비에게 임대주긴 했어도 실상 우리땅이니 이제 천하이분지계의 마지막 퍼즐은 익주를 먹자는 움직임이 있었고 당시 손권은 익주와 맞닿은 형주의 유비에게 이를 이야기하자 당시 유비는 유장이 자신과 종친이고... 그 땅은 오에서 멀며.. 험한 산악지대에... 들어가는 길목도 좁아 대군과 물자의 수송이 어렵고... 예로부터 장거리원정이 성공한 예가 드물고... 니들 거기 갔을 때 조조의 빈집털이는 어쩔 것이며.... 등등등등등등의 이유로 손권의 익주행을 반대했는데 당근 이는 제갈량과 유비 역시 자신들의 천하삼분지계의 마지막 퍼즐을 익주로 정해서였다. 아무튼 그때는 유비의 반대도 있고 하필 주동자인 주유도 죽어서 흐지부지 되었건만 그때 그렇게 거품물고 반대하던 그 유비가 익주를 따먹었다니까 손권은 빡칠 수 밖에 없었던 것... 이렇듯 유비는 익주를 먹으면서 자기의 본진인 형주는 관우를 남겨 수비케 한다. 이 때부터 관우는 명줄을 재촉하는 한편, 본인 스스로의 정치역량이 얼마나 후달리며... 또 본인 스스로 한 방면의 주둔 수비사령관으로서 얼마나 부족한지를 여실히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 당시의 관우가 어땠는지는 훗날 관우편에서 자세히 언급하기로...ㅎ 아무튼 당시 형주와 오의 접경지역에서는 빈번한 충돌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때마다 노숙은 자기선에서 우호적으로 재량껏 처신했지만 그 도를 넘어서기 시작하자 참다 못해 관우에게 독대를 요청하고 관우도 이에 응해, 둘의 접견이 성사된다. 연의에서는 관우의 호기와 노숙의 호구의 대비로 표현하나, 실상은 절대 달랐...아니, 틀리다. 이 당시 관우와 노숙은 서로의 경호병력은 물리치고 단둘이 오로지 칼 한 자루씩만 차고서 만나 논쟁을 펼치는데, 물론 당시 장비와 함께 "만인지적" 칭호의 유이한 그레이트 관우는 맨몸이라한들 노숙이 칼 아닌 총을 차고 나갔어도 그런 노숙의 허리를 뒤로 접을만큼의 위력을 지닌 사나이긴 했으나 노숙 또한 풍체가 작지 않고 힘과 패기가 없는 이가 아니였기에 전혀 쪼는 기색없이 관우를 만나 언성을 높이며 따박따박 할 말을 한다. 숙 : 니네형 익주 먹었으니 형주 돌려줘. 우 : 뭔소리냐... 숙 : 땅없어서 가여워 빌려준거잖아. 돌려줘. 우 : 우리형이 가엽다니!!! 숙 : 조조한테 작살나 쫓겨온거 우리가 땅 빌려준거임. 그런데 익주도 생겼으니 꽁으로 빌리던 형주 줘. 우 : 우리 없었으면 니들도 못 먹을 땅이였어. 숙 : 하아.. 주유가 거의 다 차린거, 밥숟갈만 얹었잖아. 그럼 저번에 익주는 형제의 땅이라 우리보고 치면 안된다더니 남인 우린 못 하게 하고 형제라는 너희 형은 왜 그랬음? 그리고 형주 다 내놓을 거 없이 계약상 우리에게 빌린 지역만 달라는데 뭐 문제 있음?? 우 : 천하는 덕 있는 자의 땅이거든!!?! 숙 : 오호라? 그럼 지금 제일 넓은 땅 가진 조조는 니미, 니네형과 우리 마스터보다 덕이 더 많아 땅부자 되신거임? 그럼 그 전 너희형은 덕이 부족해서 땅이 없었다 갑자기 덕폭탄 맞음? 아니 그리고 관우 니는 세상에 땅크기로 사람덕을 측정하는 덕투력측정기였음!??! 와.. 세상이 관우를 의사랬는데 이거 뭐 그냥 복덕방 아저씨였네.. 대실망 우 :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숙 : 그게 아니면?? 우 : 날씨가 좋군! 숙 : 뭐래는거야 이 수염쟁이가... 땅내놔! 우 : 씨팔 형한테 말해! 왜 나한테 지랄이야 지랄이! 결국.... 오는 익주의 유비에게 사자를 보내 강력 컴플레인을 걸고 유비측은 자신들이 실효지배 하고 있으나 영유권을 주장하는 오에 장사, 강하, 계양 세 군을 되돌려 주게 된다. 사실, 유비측 입장에서도 노숙의 저 논리에 마냥 데꿀멍되버릴만큼 명분 없는게 전혀 절대 아니였으나 늘 춘추를 지니고 다니신다는 관운장께서는 그저 폼으로 춘추좌씨전을 갖고 다니신건지, 매번 첫 페이지만 읽다 잠드셨는지는 모르나... 노숙의 어거지에 제대로된 대꾸 몇 마디 못 해보고 리타이어 되버리는게 바로 정사! 아무튼 다 떠나서 이번은 노숙편이니만큼 노숙이 주인공이니, 노숙입장에서 보자면 그 무력깡패인 관우와 독대하고도 일절 위축없이 자기주장을 내세워 관우를 그로기상태로 몰아간 그의 패기와 용기는 실로 대단한 것이다. 부잣집 금수저에 어려서부터 베풂을 좋아했다고는 하나, 본인 스스로에 대해서는 검소했고 스스로에게 있어서 상당히 엄격했던 사람이였다. 다만, 남에게도 엄격했던거 같다... 기록을 보면 거의 활자중독에 가까운 사람이였는지, 시국이 안좋고 격무에 시달릴 때조차 책을 읽었다. 주량이 약한건 아니였던듯 보이나 필요해서가 아니면 좀처럼 입에 대지는 않았던거 같다. 본인이 인정할만하다 싶으면 스스로를 낮추며 공경하는 자세로 대했으나 그렇지 않다면 단호박이였다. 그리고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이미지나 당장 그러한 이미지들의 결실인 첨부던 일러스트들만 보더라도 그냥 문관필이지만, 일반 행정관련 내정을 본 적이 없는 군무만 봐왔던 인물로, 전장에도 수 차례 출전하며 야전경험도 적잖았던 사람이였다. 주유 사후에 대도독을 맡으며 오의 No.2였으나... 안타깝게도 장수하진 못 했다. 사망원인으로는 과로에 의한 급성사와 위암설이 있으나 둘 다 유력하진 않다. 언변이 워낙 좋았다고 하는데, 말을 길고 화려하게 하진 않았지만 할 말만 조리있게 딱딱 짚어 하는 스타일이였다. 오와 손권의 미래전략에 있어 오의 마지막 진보주의자였다. 주유와 노숙만이 진정한 오의 팽창주의자였기에 오의 물리적 확장을 추구하며 그와 관련된 전략들을 제시하며 준비했었으나 그 후의 여몽과 육손 등은 물론 훌륭한 인재들이긴 했어도 오세력의 유지와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을뿐 사실상 오의 대외진출에는 소극적이였다. 물론, 훗날 제갈각이 있긴 하나 주유 & 노숙과는 조금 다른 사례이기도 하고... 사실상 노숙의 사망과 함께 오는 천하이분지계나 노숙이 주장하던 개념의 천하패권은 물건너 간 셈이다. 물론, 천하이분은 아니여도 삼분은 했다지만 이는 위와 촉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와중에 오의 의지와는 별개로 형성된 것에, 손권이 제위에 오른 부분 역시 천하의 패권을 쥐고 기성국가의 권한을 이양받으며 제위에 오른 조비나 그 기성국가의 명맥을 이어 부흥을 꾀하고 기성국가를 패망시킨 국가를 타도한다는 명분으로 제위에 오른 유비의 그것에 비해... 딱히 세가 커진 것도, 명분도 없는 그냥 날치가 뛰니 짱뚱어도 뛰는 식의 미투제위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가 제시한 친유비정책은 단기적으로야 오에 손실 또는 이익의 저하를 가져오긴 했으나 바로 그 전략덕에 오는 물론 유비세력 역시 초반의 그 엄청난 기세로 남하하는 조조에 맞서 이길 수 있었던 것. 노숙 사후와 맞물려, 유손동맹이 와해되고 관우의 사망이 겹치며 이는 또 이릉대전으로 옮아가는 와중에.... 훗날 제갈량의 고군분투로 촉오동맹이 재건되기까지 안그래도 둘이 합쳐 위에 못 미치는 촉과 오는 서로간의 싸움으로 적잖은 국력을 소모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노숙은 어느 조직에나 있진 않지만, 어느 조직에나 필요한 "미래와 성장"을 내다보는 진취적인 인물이였다. 열 명, 백 명의 현상유지자들보다 이런 한 두 명의 진보주의자들이 있을 때 그 조직은 나중을 준비하고 또 그 나중을 준비하고자 새로운 것을 시도하게 되며 투자라는 것을 할 수 있다. 물론, 미래에 대한 투자의 불확실성은 어쩔 수 없는 리스크지만 이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할 뛰어난 컨설턴트가 필요한데, 오와 손가에게 있어 바로 그 마지막 컨설턴트였던 노숙이였다.
허저 중강 (許褚 仲康) A.D.? ~ ?
사람 보는 안목도 훌륭했고 용인술도 뛰어났으며 철저한 능력 위주의 인재기용 방식을 추구한 실리주의자 "조조"의 휘하에는 모두가 알다시피 삼국시대 당시 가장 많고 두터운 인재풀을 자랑한 삼국시대의 레알 마드리드 라고 할 수 있었고 응당 그런 조조 아래에는 뛰어난 무장들도 참 많았다. 여러모로 뛰어나거나 조조와 코드가 맞아 신임을 얻은 장수들도 여럿 있었지만, 사료를 살피고 그 모든 것들을 토대로 볼 때 조조에게 '인간적인 애정'을 가장 많이 받았다 느껴지는 장수가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허저"였다. 오늘의 주인공은 이 진짜 "스트롱맨"인 이 인물로 간다. 오늘 날, 중국 안후이성 보저우시 출신인 허저는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며 당시 온갖 히어로들.. 그중에도 특히 범인을 훌쩍 초월하는 피지컬과 신체능력을 자랑하는 차이니즈 슈퍼히어로들 중에서도 가히 압도적인 진짜 '스트롱맨'이였음이 기록에 나온다. 삼국지연의에도 등장하는 허저 관련 에피소드들 중 허저가 조조 휘하로 임관 전... 고향에 살 당시 1만 여명 이상의 대규모 도적떼가 허저의 고향에 침공했고 대치에 지친 양측이 휴전을 합의하며 도적들의 곡식과 허저측의 소를 물물교환 하는 와중, 소가 놀라 달아나자 그 소의 꼬리를 한 손(!?!)으로 잡고 백여 걸음을 끌고 갔다는 이 말같잖고 믿기지 않는 스토리가 엄연하게도 위서의 허저전에 실려있다.... 당시 후한말에 일반적으로 사육하던 소의 품종, 암수(♂♀)여부, 소의 연령, 소의 영양상태 등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품종여부 떠나 소라는 동물 자체가 원체 크고 암수의 무게차도 상당하지만 암컷인들 일반인에게 끌어 당겨질 무게는 아니며 어린 송아지 또한 지금 이 글 쓰는 나, 읽는 댁들이 힘으로 해볼 수준을 가뿐히 넘어서고 당시 허저측이 처한 환경이 열악해 사람도 제대로 못 먹어 오죽하면 도적떼에게 고기를 주고 곡식을 받아오려는 시도까지 한 점등 비추면 소인들 제대로 먹어 평소의 몸상태는 아니였겠으나 그렇다한들 소는 소인지라 어쨌건 사람이 일신의 용력만으로 한 손끌이를 할 생물이 절대 결코 아님은 명백하다. 게다가 소의 꼬리를 잡아끌었다는건 소 또한 순순히 끌려가지 않고 그러지 않으려 끌려가는 반대방향으로 가려고 용을 썼다는 이야기인데... 전 중국 및 전인류사에서 최강의 파워맨이라 일컬어지는 항우가 이런 허저보다 힘 좋았을까 싶을만큼 여간 대단한 힘이 아니다. 위서에 의하면 신장도 "여덟 자 남짓" 이라 하는데, 당시 후한 말 기준의 여덟 자가 현대 기준의 거의 190cm에 가깝고 '남짓'이라는 표현은 여덟 자를 좀 넘는다는 뜻. 게다가 후한 말 관련 모든 역사서들 중 유일하게 허저는 허리둘레에 대한 언급이 있다. 당시 단위로 "10위"나 되는 허리둘레를 지녔다고 나오며 이 역시 현대기준 무려 115cm(45inch가 넘는다!!)라는... 당장 이 수치는 체격이 작은 편은 아닌 내 가슴둘레를 넘어선다.. 아마도 위에 언급된 인간계 끝자락급의 파워를 볼 때 엄청난 근육질이였을 것으로 보이며 저런 피지컬까지 지닌 것으로 보아, 대략 상상해보면 '브록 레스너'나 '밥 샙' 정도 되는 체구를 가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런 거구들은 지금도 길에 지나가면 사람들이 다들 쳐다볼만큼 눈에 띄는 엄청난 거한들인데, 성인남성의 평균신장이 146cm 가량 정도였을 후한 말의 중국에서는 그야말로 단순 거인을 넘어서, 방금 화장실 다녀왔더라도 마주하면 소변을 지릴 괴물이였음이 분명하다. 이런 엄청난 신체조건 + 신체능력을 지닌 초인 허저는 조조가 허저의 고향 일대를 점령하자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을 이끌고 조조휘하로 가는데, 당시의 조조 또한 허저의 체구를 보고 심히 놀랐다는 기록이 있고 이 당시 "실로 나의 번쾌가 될만하다!!" 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조조는 허저와 그가 이끌고 온 장정들을 고스란히 자신의 근위대 즉, 최측 호위대로 임명했다고 하는데 당시같은 난세에 당시 조조가 듣보잡이 아니였음에도 그런 새로 갓 합류한 이들에게 자신의 신변경호를 맡긴 것을 보면 허저를 굉장히 좋게 보고 신뢰했던 모양인데, 이때부터 조조는 허저에게 반한 듯 싶고 조조의 알음알음 허저 챙기기가 시작되었던거 같다.ㅎㅎ 허저는 생김이나 체구, 그 압도적인 신체능력 등을 갖추고도 전혀 그에 어울리지 않는 샤이가이였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눈에 띄는 것도 싫어해서 조조가 장수들을 집결하면 가장 구석이나 뒷편에 숨겨지지도 않는 체구를 한껏 움츠려 섰다고 한다. 조조는 장수들이 군공을 세우면 많은 이들 앞에서 당사자를 불러내 크게 칭찬하는 방법으로 당사자를 띄워주고 다른이들도 분발을 유도했는데, 부끄럼쟁이 허저는 간혹 공을 세우고도 이런 수 많은 사람들 앞에 불려나가 주목을 받고 추켜지는 것에 상당히 큰 부담을 갖고 있었고... 조조가 그를 앞으로 호명해도 못 들은체 딴청을 부리고 밍기적대다 거듭 그를 불러도 쌩까는 허저를 조조가 호통을 쳐 부른 후에야 마지못해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성격이 저런 사람이다보니 말도 거의 없었던 듯. 그러나 할 말은 하는 편이였던거 같고 하루는 형주방면 총사령관이던 조인이 급한 보고를 위해 허창으로 갔는데 당시 조조가 바쁜 정무 중이였고 조인은 맡은 중책이 중책인지라 조조를 기다릴 겨를은 없어 허저에게라도 메모를 전달하려 허저를 불렀다. 허저는 조조의 인척이자 최측근이고 방면군 사령관인 조인의 부름을 거절할 수는 없어 조인에게 갔는데.. 조인 : 아, 허중강! 나 지금 쫌 급한데 말 좀 전해줘! 허저 : 기다리시면 전하 곧 나오십니다.. 이러고는 조인의 대꾸도 듣지 않고 바로 휭~ 조조에게 돌아갔고 이날 이후 조인은 허저를 벼르기 시작한다. 조인은 다시 정욱을 불러 이 일을 이야기했고 정욱이 듣고 놀라 허저에게 가서 물었다. 정욱 : 중강! 사회생활 참 못하네.. 조장군 성격 몰라? 전하의 친척에 측근에 개국공신인데 왜 그러셨대? 허저 : 암만 그래봐야 저 사람은 방면 맡는 바깥사람이고 난 전하의 신변경호를 맡았는데 내가 왜 전하의 허락없이 외부인을 만납니까... 이 에피소드가 조조의 귀에 들어가자 안그래도 이쁨받던 허저는 더욱 조조의 사랑을 받았다. 허저와 조조는 아무래도 주군과 호위관이다보니 서로 붙어있는 시간이 길었는데, 허저는 종종 옷매무새가 허술하거나 한 경우 조조가 이를 먼저 보면 직접 옷매를 다시 챙겨주기도 했고, 조조가 식사시에 조조곁에 서서 조조의 식사를 지켜보는 허저에게 같이 식사를 권해서 허저가 응하면 함께 먹기도 했다. 허저는 자신이 좋아하는 찬이 있으면 응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며 응하지 않았다.... 허저가 체격이 체격인지라 허저가 타는 말은 금새 지쳐 여러 마리를 번갈며 탔는데, 허저가 탈 말은 조조가 직접 선별해 골라줬고 경우에 따라 자신이 타고 있는 말과 바꿔타기도 했는데, 주군이 신하와 말을 바꿔 타는 것은 당시 "말"이라는 동물의 군사적, 물질적 가치를 고려하면 대단한 호의를 베푸는 것이였다. 게다가 당시의 조조가 타는 말이 예삿말들도 아니였고.. 이는 마치 내가 새로 간 회사 사장님이 외근 나가며 업무용 레이를 타는 내게 자신의 아우디 Q7을 타고 가라며 바꿔 주는 것이나 진배 없는 것이다. 조조의 경호실장이면 거의 대부분 조조의 가장 근처에 있다보니 전장에 나가 지휘를 맡은 적이 드물지만 없진 않다. 양에서의 장수와 전투 당시 돌격대를 맡아 돌진하여 적의 기세를 꺾었던 적도 있고, 관도대전과 원소 사후, 원소의 잔당들을 정벌하는 중 업군 포위전 당시에도 소수나마 병력을 이끌고 나선 적 있다. 하지만 사람을 적재적소에 잘 쓰는 조조가 그를 호위관으로만 거의 중용하고 전장에 내보낸 횟수가 다섯 손에 꼽히는 걸 보면 통솔능력은 별 볼일 없었던 것 같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종종 허저의 일기토 내용들이 나오던데 올뻥이다. 허저는 누군가와 1vs1로 전투에서 맞붙은 적이 없다. 전위와 조조의 경호패키지로 묶음처리 되기도 하지만, 놀랍게도 둘은 연의에서처럼 서로 맞붙은 적도 없고 심지어 둘이 얼굴을 마주한 적조차 없다. 왜냐 하면 실제 역사에서는 전위가 이미 사망한 후에 허저가 조조휘하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삼국지연의의 내용 및 이를 토대로 캐릭터들의 능력치를 데이터화시킨 코에이의 삼국지 게임 내의 허저 어빌리티만 보면, 왠지 자기 이름이나 쓸 수 있을지.. 1부터 10까지 숫자는 셀 수나 있을런지 싶을 힘 쎈 바보로 그려지지만 절대 그런 사람은 아니였다. 조조에게 임관 전에도 고향에서 도적떼를 상대로, 또 조조에게 임관 하면서도 자신을 따르던 적잖은 무리들이 있었던 점 등으로 봐서 아주 근본도 없는 사람이 아니였고 정사나 위서, 그의 열전 등 어딜 봐도 '허저는 빠가였다'는 식의 언급은 진짜 1도 없다. 다만... 워낙 별 말이 없고, 게다가 이게 좀 치명적인데 허저는 평상시에 입을 약간 벌린 눈도 촛점없는 멍한 어딜 보는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바로 이 표정 탓에 그의 별명은 "호치(虎癡)"가 된 것.. 저 허저의 유명한 닉네임 호치의 호는 범 호, 다시 말해 전장이나 임무수행 및 조조곁을 지킬 때의 그의 호랑이같은 무시무시한 기세를 뜻하는 것이지만 문제는 뒤에 붙은 저 '어리석을 치(癡)' 인데... 저 치가 바로 허저의 그런 평상시 표정 탓에 붙은 것이였다. 그치만 허저입장에서 이것도 좀 억울한게, 조조곁에 있거나 전장이거나 뭐 그러면 모르지만 진짜 아무일없는 평상시에 조조가 내전에서 업무 보거나 천자를 알현, 또는 자거나 등등 그럴 때의 허저는 혼자 긴 시간을 문앞에 서 있어야 하는데 이 당시에 무슨 스마트폰이 있어서 허저가 유튜브나 빙글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쨌건 근무시간인데 이어폰끼고 음악 들을 것도 아니고, 진짜 할 수 있는거 없이 서 있는데 누군들 표정이 저리 멍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고 영국 왕실근위병들처럼 뭐 교대를 하는 것도 아니였을 것이고.... 당연히 허저는 본인의 저 별명을 싫어했고 위나라 내부에도 감히 허저앞에서 저 별명을 입에 담을 수 있을 힘과 용기를 지닌 자도 없었지만 어쨌건 허저가 기피하던 저 닉네임은 훗날... 동관에서 마초, 한수와 마주할 때 마초가 바로 달려가 조조를 개 때려잡듯 하려다 조조가 데려간 허저의 비쥬얼을 보고 짐짓 쫄은 마초가 "조공에게는 호후(虎侯)가 있다는데,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말해준 후부터 "호후(虎侯)"로 격상된다. 삼국지연의에서 업을 함락 후, 깐죽대는 허유를 빡친 허저가 죽이는 씬이 나오지만 허구다. 저런 일 자체가 없었고, 허저의 성격상 단지 저렇게 깝친다고 하여 아무나 썽큼썽큼 죽이는 스타일이 아니였다. 일에 있어서는 더할나위없이 용맹무쌍했지만 평상시도 거칠고 격한 그런 사람이 아니였다. 평소에는 온순하니 풀 뜯지만 맹수가 다가오면 날뛰는 아프리카 물소같은 타입이였던듯 싶다. 조조가 죽자 탈진하여 쓰러질만큼 울부짖었으며 어찌나 심신이 상할만큼 슬퍼했는지 각혈까지 했다고 한다... 조비 또한 허저를 근위로 삼았는데, 조조가 허저를 자신의 최측에서 경호하는 소수의 경호대를 이끄는 경호실장역을 시켰다면, 조비는 황실전체를 경호하는 황실근위대를 이끄는 근위대장같은 직책을 맡겼다. 허저는 생몰연대가 명확히 사료에 나와있진 않지만 조조의 죽음에 이어 그 아들 조비의 죽음도 봤다. 물론, 조비가 그리 오래 못산 탓도 있으나 아무튼 주군부자의 죽음을 모두 겪고 조조의 손자인 조예대에 사망한다. 여러 정황들 볼 때, 조예재위기에는 사실상 은퇴상태로서 원로예우를 받았던거 같고, 조예 재위 후 그리 오래지 않아서 사망한 듯. 사인에 대한 별 다른 언급도 없고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사망당시의 허저나이가 상당한 고령이였음으로 추정되기에 그냥 노환에 의한 병사였을 듯 싶다. 사실... 주군의 최측근 경호는 그리 공을 세우기가 쉽지 않은 자리다. 그럼에도 허저를 아끼던 조조는 그런 허저가 혹여라도 기가 죽을까, 늘 그가 있음에 자신이 마음 편할 수 있고 이것이야말로 큰 공이라며 그를 치켰고. 가끔은 허저를 전장에도 내보냈다. 허저가 근위대장임에도 몇 차례 전투에 나섰고 비록 몇 차례 안된다고는 해도 어쨌건 모두 승리했는데 추측해 보건데 이는 조조가 허저를 장수로서의 공을 세울 수 있도록 별 다른 지휘통솔능력이 없어 대병을 이끌기는 무리인 그가 소수병력을 이끌고나마 충분히 승리할 법한 전투에 가려 보내 허저로 하여금 주워 먹게끔 했던 배려로 보여진다. 허저 또한 박식똘똘이까진 아니여도 자신을 아끼는 그런 조조의 마음씀씀이를 캐치할 정도는 충분히 되었고 조조를 깊게 공경해 따랐으며 심지어 조조가 그에게 휴식을 명해도 허저는 이를 따르지 않고 거의 자는 시간을 제하면 조조의 지근거리에서 머물렀다. 삼국지 등장인물들 중 통틀어도 손 꼽힐만한 막강한 피지컬과 그에 따른 용맹과 괴력을 겸한 그가 전장을 휘젓고 싶지 않았을리가 없다. 하루종일 자신의 엄청난 신체를 서 있는데 써야함이 실로 괴로웠거나 자괴감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책임감과 충성으로 묵묵히 해냈다. 비록 자신의 능력과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부여받더라도 이를 최선 다해 충실히 해내는 프로패셔널. 그렇기에 조조는 늘 자신 곁에 시립해 서 있는 그를 대함에 있어, 외지의 수만 병력을 이끌고 요충지를 지키는 사령관, 전장에서 대규모 전투를 승리한 개선장군들에 못지 않게 대했던 것이다. 어찌보면 허저 본인도 그런 자신의 성품 덕에 그 험한 난세에서 난전이나 내부적 정치싸움에 휘말림없이 내내 인정받다 천수를 누렸는지도 모르겠다. 다들 즐거운 주말 잘 보내시고 사전투표 안하신 분들은 돌아오는 화요일에 꼭! 잊지 마시고 투표 하시길 바랍니다ㅎ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대의명분에 입각해 각자가 생각하는 최선의 후보분께 소중한 한 표를 반드시 행사하세요! 사려깊은 문후보님, 구여우신 홍후보님, 총명하신 안후보님, 기개있는 유후보님, 혁신적인 심후보님 모두 화이팅 하시길. 그리고 누가 대권 잡건 부디 국가와 국민을 진정으로 위하는 참지도자 되길 기원합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ㅎ 무슨업적도 필요없이, 앞 둘이 워낙 10년 깽판이라 평타만 쳐도 성군소리 들을 각인데...
삼국지에 대한 이해도 높이기 5.
지난번 삼.이.높.4에서 중국의 삼국시대 당시 위세를 떨치던 소수민족들에 대해 다루다 분량이 길어지며 일부 민족들을 이월시켰는데, 오늘이 바로 그 나머지 썰을 푸는 시간ㅎㅎ 본문에 앞서, 정말 기약없이 다음편이 늦어진 점에 대한 사죄의 말씀을 고개 숙여 전한다는... T-T 생애 가장 바쁜 삶을 살다보니 진정 도저히 시간적, 정신적, 체력적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기에 (-_-;;) 아무튼 그래서 사과는 다시 차차 드리기로 하고 저번에 못 다룬 소수민족들인 선비, 저, 무릉만과 남만에 대해! 그럼 거두절미, 바로 본론 Go Go~~~ 선비(鮮卑) 이름만 들어보면 맨날 진지하고 엄숙한 선비충같은 부류들 같이 느껴지지만 이미 한자부터 다른, 그냥 발음만 같은... 우리가 떠올리는 그 선비들과는 근본부터 다른 종족들! 지금의 중국 허베이성에서 내이멍구(내몽골) 자치구 일대에 걸쳐 중세시대에 번성했던 '동호'라 일컬어지던 유목민들의 무리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전투민족인 흉노들에게 대대적으로 작살나며 내이멍구 동부의 선비산이라는 산 일대로 쫓겨 정착한 이들이 "선비족"이다. 참고로 오환족들도 저 동호 무리들 중 일부가 '다싱안링산맥'의 한 봉우리인 오환산 일대로 쫓겨가 무리지은데서 이름이 붙은 케이스이므로 선비와 오환은 그 뿌리가 같다는게 학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ㅎ 막상 삼국지의 배경인 후한 ~ 삼국시대 ~ 진나라 때까지는 그리 큰 두각을 나타내던 종족들은 아니였다. 일단 무엇보다 흉노에게 여러 차례 발린 적이 있는데다, 중원의 근간인 한족들과 조우하려면 흉노의 영향력이 큰 지역들을 거쳐야 했기에 굳이 천적인 흉노까지 스킵하며 한족들에 겐세이 줄만큼 수나 파워가 강한 애들은 아니였... 그러다 흉노들이 남북으로 갈리며 약화, 여기에 선비들의 거주지역과 한족들의 거주지역 중간에 있던 북흉노들이 위와 진에 털려 위용을 잃으면서부터 두각을 드러내, 진나라도 점점 나가리의 뉘앙스를 풍기자 땅따먹기하러 쏟아져 내려왔고 이때부터 "오호십육국시대"가 개막된다. 결국.. 우리에게 익숙한 삼국지의 본 배경되는 후한에서 삼국시대를 거쳐 진으로 중국이 재통일 될 때까지 별 영향 못 미치고 북동쪽에 처박혀 있던 쭈구리들였던 것. 심지어, 문화적으로도 그닥 특색이 모호했던지라.. 당나라가 들어설 무렵에는 흐지부지 없어진 종족들이다. 덧붙이자면... 흉노나 한족들에게는 쭈구리였던 얘들이지만, 우리측의 부여에게 있어서는 천적과도 같던 이들이였다.. 부여는 내내 이 선비충들에게 시달림을 면치 못하다 고구려가 건국되고도 한동안 시달림이 지속.. 후에 그 대단한 "광개토태왕"이 요동일대에서 갈아마신 후에야 악연을 끊었다. 저(氐) 위에서 언급한 오호십육국시대의 오호 중 하나를 차지할 정도였음에도 그닥 기록이 별로 없는 종족이다. (참고로 오호는 흉노, 선비, 강, 저, 갈) 이들은 위와 촉 사이의 서량의 남서에서 익주의 북서인 무도일대에 자리잡은 종족들이였고 앞서 설명했던 흉노, 선비, 오환 등등이 유목민족들이였던데 반해 이들은 강족처럼 정착민족들이여서 농업과 임업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강족들과 거주지가 인접 또는 겹쳤는데, 강족들이 숫적우위에 더 와일드하다보니 많이 뭍힌 감이 없지 않고, 삼국지연의나 기타 창작물들에서는 그냥 죄다 강족으로 싸잡히는 비애도 있다... 당장 마초 & 한수가 조조를 씹어먹으러 서량의 세력들을 죄다 싹쓸어 올 때 그들의 주력이 강족전사들이라고만 표현되어 있지만 강족과 저족의 비율이 7:3 가량 되어, 저족들의 비중도 무시할 수준이 아니였음에도 나관중은 그냥 무시하고 다 강족처리 했다. 한편... 기록이 부족하다는건 그만큼 기록자인 한족들 입장에서 별 임팩트를 못 느꼈다는 소리. 사실, 동북쪽의 소수민족들은 넓디 넓은 벌판에서 수 많은 가축 때를 휘몰아 쏘다니며 늘 말을 타고 또 원래 저런 벌판은 물도, 식량도 넉넉치 않으며 대체로 육식위주다보니 아무래도 더 거칠었던 반면... 서쪽의 소수민족들은 그럴 벌판이 없는 산악지형에 거주하며 수렵, 채집생활도 하긴 했으나 역시 식량의 주요루트는 농사였던 관계로 채식비율도 더 높고 식량수급이 아무래도 떠돌이 유목들보다는 나았기에 좀 덜 거칠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저 당시에 "말"이 갖는 기동력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파괴력이 어마무시했기에 대부분 1인 2마 이상인 유목민들이 말보다 농사짓는 소와 더 가까운 산악민족들보다는 공격력이 앞설 수 밖에 없었을거 같다. 현세에 이르러, 우리회사만 봐도... 늘 사무실에 정착해 자기자리에서 농사짓듯 모니터만 보고 밥도 식당밥, 도시락 먹는 내근직들보다는 맨날 이리저리 차 타고 거래처와 클라이언트 찾아 떠돌며 편의점에서 MSG와 나트륨 범벅인 백종원 CU도시락이 주식인 영업직 인간들이 더 거칠고 개새끼들이 많다.. (나도 그 개새끼들 중 한 마리인건 함정) 무릉만(武陵蠻) 삼국지의 자타공인 바퀴벌레 종족들이다.... 삼국시대 당시에 만약 핵전쟁이 났어도 쥐, 바퀴벌레와 함께 절대 멸종 안했을거 같은 한족들 입장에서는 진심 진저리 넌더리 났을 종족들인데, 이들의 포지션을 현대로 옮겨와 보자면 아프가니스탄에서 긴긴시간 우주제일 천조국을 엿 먹인 탈레반과 비슷하고 역시 몇 십년 전 천조국을 학 떼게 만든 베트콩과도 비슷하다. 이름만 봐도 어디 사는지 드러나는 이들은 말 그대로 형주의 "무릉"일대에 퍼져 살았다. 삼국지를 연의나 게임으로만 접한 분들 입장에서는 여태 언급된 소수민족들은 아직 소개안한 남만족과 더불어 거의 중국의 변두리에 살았다지만 무릉만들이 사는 무릉은 중국의 한복판인데 뭔 소수민족??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도 그럴만한게, 중국이 원체 넓고 큰데다 그 넓은 땅이 전부 평야도 아니고 도심지도 아니다. 심지어 지금보다 훨씬 인간 적고, 인프라가 꽝이라 미개척지, 오지가 많던 1,900여 년 전 중국은 말할 거 없어, 당시의 형주는 비교적 인구도 많고 인프라와 교통이 발달한 강릉, 강하, 장사 정도까진 꽤 살기 괜찮은 곳이였지만 무릉은 그냥 완전 험준한 협곡 투성이의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는 오지로서... 여러분들 영화 '아바타' 다들 봤나? 거기의 파랗고 길쭉한 나비족들 사는 판도라와 엇비슷한 그런 환경이였다. 무릉만들의 전술은 바로 저 거지같은 험지의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전"이였고... 이 전술 덕에 한족들의 끊임없는 토벌릴레이 속에서도 종족의 근간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유표는 손 놓고 없는셈치는 땅이였고, 삼국이 정립되어 가는 와중에 오에서 황개, 반준, 여대, 보즐 등등이 수차례 토벌에 성공은 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그냥 겁 주고 주의만 시킨 수준일뿐, 이들의 세력존폐를 위협할 수준의 데미지를 주는데는 실패했다. 쉽게 말해, 그냥 이들로 하여금 지들 영역에서만 짱 박혀 지지고 볶고 알아서 하게 하고 한족의 영역으로 나오지 않게끔 억제만 한 수준이였던 것. 당장 역사를 조금만 더 올라가보면, 이들의 존재는 한족의 애물단지같은 위치였고, 하다하다 안되자, 소수민족 토벌의 달인인 마원(마초의 조상) 까지 고령임에도 출병시킬만큼이였다. 허나 소수민족 상대로 킬 수가 수두룩 하던 그 마원조차도 무릉만들 상대로는 지지부진하다 끝내 전장에서 병사한다. 무릉만들도 순수혈통 단일민족은 아니고 그 일대에 퍼져 사는 여러 종족들을 싸잡아 일컫는 호칭이였는데 무릉만들 중 일부는 식인풍습도 있었던 듯... 뭐... 저걸로도 무릉만들 수준이 어땠는지는 자세한 설명을 생략해도 된다고 여겨진다. 일반적인 삼국지 매니아분들에게 있어서, 무릉만의 슈퍼스타는 역시 "사마가"인데, 사마가의 등장은 유비가 관, 장 두 아우 사망에 있어 만악의 근원인 오를 정벌하고자 이릉대전을 개전함에, 촉에 협조하는 것으로 나온다. 당시 걸핏하면 자기들 족치려는 오를 극혐하던 무릉만들에게, 승전시에 자치권을 보장하는 것을 조건으로 촉한의 특산물인 최고급 비단을 잔뜩 챙겨 무릉만들을 설득했던 결과였다. 당시, 비단 싸들고 무릉만들과 협상하러 나섰던 촉한의 네고시에이터는 바로 백미 "마량"이였는데... 당시 자치권도 자치권이지만 그건 나중 이야기고 일단 마량을 필두 삼은 촉한의 협상단이 가져간 비단을 본 무릉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였다고 한다. 하긴, 그도 그럴게.. 여러분들도 맨날 동네시장 신발가게에서 아티스나 슈퍼카미트만 사신다가 옆동네에서 에어조던 시리즈별로 다 갖고 오며 도와달라면 눈 뒤집힐 듯. (아티스나 슈퍼카미트 알면 무조건 아재 당첨) 허나, 여러분들도 다 아시다시피 이릉대전에서 촉이 대박살이 나며 따라갔던 무릉만들도 무시 못할 피해를 입었다... 참고로 여느 소수민족들이 그렇듯, 무릉만들도, "We Are The 무릉만!" 이라며 하나로 뭉쳐진 단일세력이 아닌, 여러 크고 작은 부족들의 연합 비슷한 것이였고 여러분들이 아는 사마가는 연의의 표현처럼 무릉만들의 왕이 아니라, 그런 여러 무릉만들의 부족들 중 한 부족을 이끄는 부족장들 중 하나였다. 남만은 분량도 좀 될 것 같고 아무래도 다른 소수민족들에 비해 삼국지 매니아분들이 더욱 궁금해하며 흥미 가지실 것같은 종족이라 차라리 따로 다루는 게 나을 듯 싶다는 생각에 따로 추후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너무나 죄송합니다, 독자여러분들.. 제가 연재를 늦게 하는 편이기는 했지만 진짜 이번에는 도가 지나친 수준의 텀이 생기고야 말았네요... T-T 하지만 저 역시 뒹굴고 노느라 연재가 미뤄진 것은 절대 아니였어요. 저도 좋아서, 즐거움과 보람에 시간내서 글 쓰는데 장시간 못 그러니 참 답답했습니다. 그 와중에 재촉없이 묵묵히 기다려주신 분들, 애정과 관심 담아 재촉해주신 분들... 모두 죄송하고 또 고맙습니다. 그 긴시간 동안 연재 없음에도 팔로워는 줄지 않아서 기뻤다는 ㅎㅎ 아무튼 다시 연재에 힘쓰겠습니다!
당부.
안녕하세요. Three Kingdoms Generation.의 필자입니다. 일단 삼국지관련 내용의 글이 아닌 점 먼저 사과드립니다.ㅎ 오늘은 이것저것 몇 가지 말씀 올리고자 타이핑을 합니다. 1. 표절. 연재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데다, 아직 카드나 팔로워가 많은 편은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이리저리 빙글을 뒤적이다보니 몇 곳에서 제가 쓴 글과 흡사한 카드들을 몇 번 목격했습니다. '삼국지'라는 역사 및 소설관련 컨텐츠를 다루다보니 당연히 내용은 비슷할 수 있는 점 십분 헤아리지만 읽어보면 제가 쓴 문장의 구성이나 표현, 어휘까지 같거나 매우 흡사한 경우들이 있더라구요. 제가 쓰는 이 칼럼은 보시는 분들의 생각 이상으로 공을 들여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제가 삼국지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갖고 어린시절부터 찾아보고 조사하고 공부하며 모은 수 많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쓰여지며, 이것들을 알맞게 구성하여 쓰다보면 순수 작성시간만 짧게는 2~3시간, 길면 5시간 가까이 소요됩니다. '아니, 겨우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게 뭐 이리 오래 걸려???' 하실 수도 있어 의아하시겠지만... 저도 그냥 베껴 쓰거나 하는게 아닌 제가 아는 지식들을 좀 읽기 편하게, 그나마 재미있게, 되도록 자연스럽게 쓰고자 어떻게 쓸 지를 고민하고 다듬으며 쓰다보니 그리 시간이 걸리며 저도 제 생업과 사생활이 있다보니 마냥 시간을 내기 힘들어 보통 2~4일에 걸쳐 써나갑니다. 물론, 제 칼럼들을 베끼셨던 참고하셨던... 그분들이 사익을 추구하여 그러시진 않은 거 같긴 해도 어쨌건 저로서는 수일 간 공들인 제 성과물이 누군가에 의해 몇 분만에 표절 되는건 속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전에 어느 독자분께서 자신이 활동하는 커뮤니티에 출처를 밝혀서 사용하고 싶다고 하셨던 적이 있었는데, 얼마던지 스크랩, 클립해 가셔도 좋고 오히려 그렇게 여기저기 이리저리 제 글이 퍼져나가 삼국지에 대해 더 재미있고 흥미롭게 느끼시는 분이 늘어나는 것은 저로서도 즐겁고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단순 표절은 금해주셨으면 하고 지적재산권에 대한 존중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혹자는 '니가 첨부하는 그림과 사진은 그럼 뭐냐'라고 하실 수도 있지만, 제가 첨부하는 매체들은 누가 봐도 어디의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것들이고 매체의 저작권자들이 이미 이익추구가 아닌 분야들에 대한 개방을 허한 매체들이라 제 글을 베끼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2. 부진. 안타깝게도 점점 연재가 진행될 수록 초반에 비해 '팔로워증가', '좋아요', '클립' 등의 수치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그 원인으로는 첫째가 너무 더딘 제 "연재속도", 두번째는 "인기스타의 부재"가 아닌가 싶네요ㅎ 일단 연재속도에 대해서는 참 뭐라 드릴 말이 없습니다. 헌데 위에서 말씀 드렸듯, 글 쓰는데 걸리는 시간 자체가 길고 또 제가 전문작가가 아닌 관계로 일과 사생활이 병행되며 연재하다보니 아무래도 더뎌지네요;;, 그렇다고 스피드를 좀 내보자고 분량을 줄이자니 이 칼럼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의 기대치와 수준을 고려할 때, 분량의 축소는 곧 내용의 양과 질의 하락.. 다시말해, 퀄리티 하향의 우려가 생길거 같아서.. 물론, 길게 쓴다 능사는 아니지만 다른 분야와 달리 역사관련물은 내용이 디테일할수록 즉, 분량이 길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저로서는 연재속도 탓에 분량을 타협할 생각은 없다보니 그런점 양해 부탁 드립니다. 그리고 댓글보면 조운, 조조, 장료, 여몽 등등 네임밸류 있는 인물들에 대한 니즈가 많은데, 일전에 이미 말씀 드린 적이 있지만 제 나름으로는 그런 인기인물, 유명인물들이 초반에 나오기 시작하면 뒤로 갈수록 이 칼럼의 위력이 반감할까 싶은 우려로 좀 아껴두던 터였습니다. 게다가 비록 우리가 잘 모르는, 혹은 아예 처음 듣는 이름의 인물들을 제가 재조명하여 그들 역시 역사 속의 주요했던 이들임을 부각시켜주고픈 마음도 컸기에ㅎㅎ 아무튼 연재속도도 최대한 스퍼트를 올려보고 앞으로는 중간중간 이쯤이다 싶을 때 유명인물들도 게시하도록 하겠습니다. ^^ 3. 부탁. 대신 저도(건방지게) 부탁을 좀 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읽어주시는 것으로도 참 고맙습니다만..ㅎㅎ 그래도 기왕이면, "좋아요"도 좀 클릭해주시고, 또 "클립" 해가셔서 본인들 컬렉션에도 게시하여 보다 많은 분들이 보실 수 있게끔 홍보도 부탁 드립니다! 나아가 아직 팔로우 안하신 분들은 "팔로우"도 해주십사 고개 숙여 청을 좀 드립니다. 허허허;;; 물론, 다양한 내용의 "댓글"들도 언제나 대환영! 길이와 내용 관계없이 댓글들은 항상 힘이 되거든요. 제가 여기에 글 써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어디 입사지원할 때 이력서에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저 취미로 쓰는 것인지라 여러분들의 "팔,좋,클,댓"의 피드백이 제 엔돌핀이고 에너지!! 또, 혹시 Three Kindoms Generation.의 앞으로의 발전을 위한 좋은 아이디어나 건의사항 있는 분들은 지금 이 글에 댓글을 좀 부탁드립니다. 4. 출판. 댓글 주시는 분들 중 은근 많은 분들이 해주시는 말 중에 "책 내시면 꼭 살께요!" "한 번 책으로 내보세요ㅎ" 등등이 있습니다. ..ㅋㅋㅋ 출판이라...허헣 일단 누가 책을 내줘야 저도 출판을 하는거겠지만, 제가 전문작가가 아니다보니 필력도 부족하고 또 요즘같은 모바일시대에 설령 책을 낸들, 인쇄간행물이 과연 얼마나 판매가 될지도 의문이고..ㅋ 그리고 이 칼럼독자분들이야 아니라 생각하시겠지만 요새 들어서는 워낙에 미디어가 풍년이다보니 삼국지라는 컨텐츠가 어딘가 모르게 매니악한 소제로 치부된다는 인상도 받습니다만ㅎ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삼국지를 읽지 않은 자와는 벗 삼지 말라"는 말까지 있던 보편적 매체였는데, 지금은 삼국지가 뭔지 모르는 분들도 적잖은 세상 같아서 좀 서글프네요...T-T 여튼 출판관련 말씀들은 그만큼 좋다는 칭찬들이시니 기분좋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엇?! 벌써 새 카드가 올라왔어!?' 하시는 마음으로 반갑게 클릭했더니 왠 쓰잘데없는 사설이냐며 실망하셨을 분들께는 다시 한 번 사과와 양해를 올리며, 삼국지관련 내용은 최대한 빨리 연재할께요! 항상 많은 관심 주시고 찾아 주시며 읽어 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 드리고 싶네요ㅎ 고맙습니다!
삼국지에 대한 이해도 높이기 2.
지난번에 이어, 오늘도 삼국지를 보다 쉽고 재미지게 접하는데 도움을 줄만한 팁들을 준비해 봤다. 삼국지를 아직 읽지 않았다면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고 이미 읽어본 분들 역시 한결 넓게 바라볼 수 있게끔 삼국지에 대한 이해도 높이기 2 Start!! 1. 무기. 삼국지연의 속 장수들은 저마다의 무기들을 쓰고 이 무기들은 곧 그 유져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분신의 역할을 하기도 하며, 정말 다양한 무기들이 등장한다. 관우의 청룡언월도, 장비의 장팔사모, 손견의 고정도, 전위의 쌍철극, 여포의 방천화극, 정보의 철등사모, 기령의 삼첨도, 서황의 개산대부, 황개의 철편, 유비의 자웅일대검 등등.. 열거하기 귀찮을만큼 많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숱한 무기들 중의 대다수는 당시에 실존하지 않았던 것들. 대표적인게 관우의 트레이드 마크인 "청룡언월도". 먼저, '도(刀)'는 한쪽만 날이 있는 칼, '검(劍)'은 양쪽 모두 날이 있는 칼을 뜻한다. '청룡도'는 너비가 넓은 도를 일컫는 말이며, '언월도'는 '월도'라고도 했는데 이는 긴 자루가 달린 도를 일컫는다. 고로, '청룡도 + 언월도 = 청룡언월도'라 함은 긴 자루 달린 청룡도를 말한다. 너비가 넓다보니 일정 수준 이상 부피가 있던 무기인 청룡언월도는 대체로 일반 도검들에 비해 중량이 좀 나가는 무기였고, 찌르기보다 베기용이긴 했다만.. 날카로움으로 벤다기 보다는 무게로 내리찍는 용도의 무기였다. 왜냐하면 당시의 제철수준으로 큰 월도를 날카롭게 제련하는 기술력의 한계가 있었고, 설령 내가 쓰는 질레트 마하3 면도기날처럼 어찌어찌 날카롭게 만들었다 한들... 몇 번만 쓰면 금새 날이 무뎌지기 마련. 게다가 날카로우려면 단면이 얇아야 하고 또 얇게 만들다보면 그만큼 가벼워지니 살상력이 떨어진다. 쉽게 말해, 청룡언월도에 맞으면 영화나 만화처럼 '뎅겅~'하고 썰리는게 아니라, 짓뭉개지며 박살이 나는건데, 심지어 연의에서의 묘사에 의하면 관우가 썼다는 청룡언월도의 무게는 무려 "82근"! 혹자는 한대의 한 근은 지금의 한 근보다 가벼워, 당시의 여든 두 근은 대략 18kg쯤이라고 하는데, 나관중이 명나라 사람이라 명대의 도량형으로 설명 했기에 청룡언월도의 무게는 48kg이 맞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무기 + 그 무기 휘두를 덩치 + 갑옷 + 안장 + 마갑 = 어림잡아도 230kg을 넘어가는데 그럼 말은 도대체 무슨 죄인가? 더구나 아무리 장사여도 저 중량의 무기를 휘두르기 위해 마상균형을 잘 잡아야 하는데, 그 시대에는 말 타며 균형 잡고자 발을 거는 등자가 몹시 어설퍼, 제 기능 발현이 어렵던 시기였다. 일단 송나라 때에나 등장한 청룡언월도를 관우가 썼을 리 없고 정사기록에 "관우가 안량을 찌른 후 목을 베었다"라는 구절을 볼 때, 관우는 '삭'으로 불리는, 당시 기병의 보편적 주무장인 찌르기용 창을 썼다고 본다. 그리고 '여든 두 근'이란 표현도 실제 측량무게가 아닌 관우의 파워의 대단함을 묘사키 위한 나관중의 중국인 종특인 과장의 산물이다. 소설과 인물에 대한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부여된 일종의 아이템같은 개념이였던 것이다. 장비의 "장팔사모" 역시, 지금 추산 시 5m가량의 기나긴 창으로 묘사되지만 한대에는 그런 긴 창은 쓰지도 않았거니와 동서양 역사에서의 그런 길고 긴 창은 보병의 대기병전용 무장이였지, 말 위에서 휘두르기는 너무 불편한 무기였다. 당시의 백병전은 인정사정 없었고 사소한 실수, 작은 삑사리 하나로 장애인이 되거나 바로 요단강에 발을 담그는 리스크가 될 수 있기에... 여든 두 근 청룡도니, 한 장 여덟 척 장팔사모니 하는 후까시용 무기보다는 그저 실용적이고 쓰기 편한 무기가 답이였다. 여포의 방천화극 또한 그 "방천화극" 자체가 역시 청룡언월도와 마찬가지로 송나라 중엽에서야 등장하는 무기였기에 픽션이며 그냥 찌르기용 '극'을 쓴 것으로 보여진다. 삼국지 등장 장수의 거의 8할이 "찌르기용 창"을 실제로 썼는데, 이는 '베기'보다 '찌르기'가 더욱 적은 에너지와 운동각으로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기에 체력소모와 한 번 움직임에서 다음 움직임 까지의 인터벌을 최소화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베는 창을 쓸 경우, 창을 더욱 높이, 크게 휘둘러야 상대에게 치명상 입힐 수 있는 반면... 빗나갈 경우 오히려 상대에게 역관광을 당하기 제격이다. 그렇다고 적은 각도로 움직이면 운동에너지나 원심력이 제대로 실리지 않아, 상대에게 그만큼 데미지를 많이 주지 못 한다. 놀랍게도 "쌍철극"의 경우, 정사에 전위가 80근의 쌍철극을 휘둘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는 그 당시의 사료이므로 한대의 도량형에 따라 지금 기준 약 16~18kg가량의 무기가 맞다. 2. 일기토. 일본어의 "잇키우치(いっきうち, 一騎討ち)"에서 한자어인 '一騎討'만을 우리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기마무사간의 1vs1 대결을 의미한다. 사실 한, 중에서는 거의 안쓰는 한자어인데, 국내에서는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 탓에 1대1 결투의 일반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정말 숱하게 등장하는게 바로 저 일기토이지만... 놀랍게도 실제 역사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일기토 기록은 열 손 이내 밖에 없다. 192년 "여포 VS 곽사" (장안) 놀랍게도 곽사가 먼저 결투 신청. 그럼 그렇지, 여포의 창에 맞고 죽기 직전에 부하들이 곽사 구출. 196년 "손책 VS 태사자" (곡아) 말 타고 싸우던 중 손책이 태사자의 말을 찌르고 (나쁜새끼), 태사자의 창을 빼앗자, 태사자는 낙마하며 손책쪽으로 넘어지며 손책의 투구를 슈킹. 196년 "학맹 VS 조성" (하비) 여포에게 반기를 든 학맹과 조성이 싸우던 중 고순이 나타나 학맹을 죽임.(읭?) 196년 "마초 VS 염행" (서량) 그 천하의 마초가 염행의 창에 찔려 죽을 위기 맞음. 단, 당시의 마초는 만 19세로 아직은 경험미숙.. 200년 "관우 VS 안량" (백마) 추후 관우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음. 202년 "방덕 VS 곽원" (평양) 방덕이 당시 난전 중에 적병을 그냥 막 죽이던 와중에 곽원도 섞여 죽음.(이건 좀...;;) 208년 "여몽 VS 진취" (강하) 유표군과 싸울 당시 선봉이던 여몽이 적 수비대장 진취와 맞서 싸움. 2011년 "김형수 팀장 VS 이민형 과장" (백림호프) 만취한 이과장이 김팀장에게 반말로 도발하자 이에 격한 김팀장이 숟가락 볼록면으로 이과장의 정수리를 갈겨 단 일 합에 이과장을 처단. 사실, 일기토 자체가 성사 쉽지 않을 수 밖에 없는게, 저건 보는 사람이나 재미있지... 당사자들로서는 자신 뒤의 수 많은 군세의 기세를 책임진 상태에서 사소한 실수 하나로 자기 목숨은 물론, 전술적 승패를 갈음 짓는 1대 1 대결은 실로 무모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기고 있거나 우세한 군세의 우두머리가 이겨도 본전에 지면 그야말로 대참극의 아비규환을 불러올지 모를 그딴 제안에 응할 리가 없다. 그럼 상대가 응하지 않는데 홀로 싸울 수도 없다. 그리고 어지간한 급의 장수들은 영화나 만화처럼 행군 중이나 군사들간 대치 상황에서 가장 맨 앞에 나와 보란듯이 있지 않았다. 그럴 경우, 상대방의 활에 의한 저격에 피격될 위험성이 높기 때문. 물론, 장수의 화려한 차림새나 그 주위의 대장기를 든 호위대 등으로 분명 눈에는 띄었을 것이나, 가장 선두에 다 보란듯이 나와 있진 않았다고 한다. 솔직히 이게 뭐라고 쓰는데 두 시간 걸린다는.... 쓰고 나면 지치지만 여러분들이 주시는 관심 가득한 피드백들이 그런 피로를 잊게 해줍니다ㅎ 연재가 더디긴 해도 심도깊은 내용으로 차차 다룰 소재들이 매우 많으니 인내를 갖고 기다려 주시길 양해 바라며 타인을 비방하거나 불쾌히 만들 댓글은 자제 부탁 드려요. 궁금하신 점 등은 댓글로 문의 주시면 아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답변 드리고 있습니다! 주관적 견해를 바탕으로 한 논쟁은 도돌이표인 경우가 많고 감정만 상하기 부지기수라 응하지 않습니다. 역사와 삼국지라는 다소 고루하며 남성적인 소제를 다룸에도 예상외로 적잖은 분들의 관심과 기대에 늘 고마움 갖고 정성껏 쓰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손견 문대 (孫堅 文臺) A.D.155? ~ 191?
중국의 삼국시대를 구성하는 위, 촉, 오 중의 하나요.. 위, 촉, 오 중 가장 마지막에 망한 오나라의 황실이던 손가의 시작에는 이 남자가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손가의 제네시스라 할 수 있는 "손견"이다. 여기저기에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중국 춘추시대의 위대한 병략가인 '손무(孫武)'의 후예'라는 소문과 추측까지 났지만 일절 그 실제는 확인된 바가 없는 그저 루머에 불과하다. 물론, 절대 아니란 증거도 없지만 유비가 한황실의 종친이라는 사실처럼 족보를 뒤져 팩트를 입증한 것이 아닌 본인의 자칭이며 또 이를 갖고 삼국지정사의 저자인 진수 또한 정황상의 추측을 한 것에 불과하다. 양주 오군 부춘현이 고향이며 오늘날 중국의 최대도시인 '상하이(上海)' 인근쯤이다. 물론, 저 당시의 오군은 이미 전한시대를 넘어 진나라 때부터 살기 괜찮은 지역이였고, "항우"도 거점 삼았던 인구도 적잖던 곳이긴 하지만 당연하게도 지금의 상하이와는 넘사벽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유의해두자. 전반적인 사료들 및 역사서와 그 주석본들, 열전까지 죄다 뒤적여 추론해 볼 때... 양주지역의 제법 좀 사는 "호족집안 아들"이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렇다고 또 대대손손 유구한 금수저까진 아닌거 같고, 후한 말에 이르러 떠오른.. 러시아의 올리가르히같은 그런 신흥세력의 자제였다. 어릴 때부터 이미 살던 동네와 고향 일대에서 먹어주는 깡다구와 대담함을 지닌 싹수 다른 소년이였으며, 만 17세에, 모여있는 수적떼들에게 홀로 덤벼 그들을 쫓아내 와해시킨 일화가 있고, 이걸 계기로 벼슬길에 나가 무관이 되어 같은 해 회계군의 허창 & 허소의 난을 제압한다. 이때부터 손견은 고속승진을 시작했다. 참고로 손견이 잘 나가는 호족집안임을 입증해 주는 한 예가 바로 위의 저 허씨들의 난을 제압코자 모병하는 과정이였는데, 관군만으로는 전력이 부족하다 판단.. 사재를 털어 1천 여명의 병력을 추가로 모병하여 임무를 완수했다는 점이다. 당장 천 여명을 모병하고.. 그렇게 모집된 인원들을 무장 및 최소한의 복색을 통일시켜 먹이고 재우고 훈련하는데 투자되는 비용이 벌써 보통이 아니다. 아무튼 놀라운건 손견이 저런 히어로급 활약을 올렸던 연령이 고작 겨우 열 일곱 가량(추정) 나이였다는 것인데, 아무리 저 시절이 평균수명, 사망연령이 낮디 낮아 일찍일찍 결혼하고 얼른얼른 성인대우를 받았던 시절임을 감안해도 참 대단함이... 당장 나도 그렇고, 여러분들이 열 일곱살 때 어땠는지 떠올려보면 바로 답 나온다. 담임선생님의 빠따 한 번에도 고통에 몸을 뒤틀고 쉬는 시간 벨이 울림과 동시에 매점으로 달려나가 빵 사먹으려고 버둥이던 우리의 그 나이에 손견은 홀로 수적떼를 목 베고, 벼슬도 오르고 군사를 모아 전투도 나갔던 것.. T-T 다만.. 어려서부터 아예 학문은 내려 놓았었던 듯. 책을 읽었다는 기록도 없고 심지어 문맹이였다는 설도 있다. 물론, 저 당시에 문맹률은 엄청나긴 했다지만, 그래도 나름 사는집 잘 나가던 자제로서 문맹설은 본인이 얼마나 학업을 멀리 했는지를 보여준다. 저 당시는 오로지 무예만 출중한 이들은 무시를 받았고 높은 직위에 오르는 데도 한계가 있었기에 어느 정도의 클래스가 되는 무장들은 깊은 학식까진 아니여도 최소한 여러 권의 병략서, 병법서들을 읽는 수준은 되야했던 시절이였기에 문맹설이 돌 정도로 학문을 등한시한 점은 자랑할건 못 됨이 맞다. 허나 그런 무식함에도 불구하고 군사관련 행정처리에는 꽤나 빠삭하게 처리를 했었고 그런 일처리와 용맹 그리고 궂은일은 미루거나 피하지 않고 나서서 쓱싹 처리하는 빠릿함덕에 평판은 좋았던 편으로 성격은 좀 불같을 지언정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시원시원하면서도 화끈한 성격 덕분에 따르는 이들은 적잖았던 모양이다. 군율준수에 매우 엄하면서도 풀어줄 때는 풀어줬고, 병사들을 고압적인 자세 일변도가 아닌 "전우애"로서 대함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식사도 병사들과 함께 동일메뉴로 먹었다고 하니 당근 병사들의 충정도 높았다. 이래저래 빠른 출세가도 달리며 승승장구 했던 손견이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땅 넓고 사람 많은 중국의 어느 지역, 어느 군벌에나 두엇쯤은 있는 준재였던 그가 전국구로 발돋움하는 계기는 다 필요없고 바로바로 원소의 격문에 의해 집결한 18로 제후들의 유니온인 "반동탁연합군 VS 동탁군"과의 대립이였다. 참고로, 삼국지연의 속에는 마치 손견이 원소, 원술, 조조 등 당시 각자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참전한 여러 제후들과 역시 동등한 제후들 중 하나로 그려지는데 이는 왜곡이다. 그때까지도 손견은 독자적인 자신만의 세력을 이끌던 군벌이 아니였다. 이미 그전, '황건적의 난' 당시에는 엄연히 조정의 벼슬에 임관된 상태로 '주준'의 부장으로 참전, 그 후, 서량에서 184년에 변장 & 한수의 난 당시에는 십상시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은 것으로 밉보여 지휘관직을 박탈당한 '황보숭'의 후임으로 정벌군 사령관을 맡았던 '장온'의 부장으로 참전 하는 등... 주로 황실직속의 고위장군들의 부장으로 참전한 경우가 많았던 만년부장이였다 덧붙이자면... 변장 & 한수의 난 당시에는 서량에서 그 위명 높던 동탁도 장온의 천거로 참전한 상태였는데, 손견과는 여러 모로 행실과 견해의 차이로 몹시 사이가 안좋았던 터였고 손견과 달리, 상관인 장온에게도 불손하며 제멋대로에 안하무인으로 굴던 동탁이였기에 둘은 상극.. 게다가 서량에서는 먹어주던 동탁이 상당한 군공을 쌓았음에도 손견은 몇 차례 패전하는 등 재미를 못 봤다. 반동탁연합군에 합류했을 무렵도 당시의 위세가 천하에서도 세 손에 꼽히던 "원술"의 사실상 부장에 가까운 자리로 원술의 지시와 서포트를 받으며 참전했었다. 아무튼 하여간 그렇게 반동탁연합군 소속으로 참전한 손견은 그야말로 군계일학적인 대활약을 벌이며 동탁군을 양민학살하여 후한의 슈퍼스타로 발돋움 하는데... 일단 첫 타석에서는 접고 들어갔다. 동탁의 부장이던 '서영'과의 전투에서 박살이 나서 간신히 최측근의 호위병력 몇 십여 기만 이끌고 살아나왔고 그마져도 위급상황까지 몰려.... 자신의 한 팔과 다름없던 "조무"가 손견의 붉은 두건을 대신 쓰고 목숨을 걸고 시간을 벌어준 덕에 겨우 살았다. 참고로, 삼국지연의에서 조무는 저렇게 손견을 살리고 간지 뿜으며 장렬히 전사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저 때 손견의 두건을 걸어놓고 적병들이 돌아갈 때까지 짱 박혀 있다가 살아남았다. 다만.... 그 이후로 정사에 더 기록이 없어서 어찌 되었는지는 알 길은 없다. 저 패배를 보약 삼아 그 다음부터 나선 손견은 다른 사람이 되어 동탁군을 거침없이 관광 태우기 시작한다. 동탁의 부장 '호진'의 군대를 엘리시키고, 무력의 화신이던 그 "여포"의 부대조차 지워버렸으며, 심지어 이 와중에 연의에서는 관우가 "데운 술이 식기 전에" 목을 베었다는 "화웅"도 참수한다. 솔직히 화웅이 연의에서 관우버프용 적장으로 나와서 동탁군의 에이스던 여포와 함께 원투펀치를 이루는 맹장으로 그려지지만 솔직히 정사나 그밖의 기록들에서는 별 다른 언급이 없어서 그 정도의 장수인지는 알 길이 없다. 허나 당시 화웅이 맡았던 임무나 직위등을 볼 때, 그렇다고 또 듣보잡은 결코 아니였음을 예상할 뿐! 결국 이런 손견의 크레이지 모드 탓에 동탁은 당시의 후한 수도이던 낙양을 죄다 초토화 시킨 후, 장안으로 천도를 하게 되며... 이 와중에 한 번 여포부대를 박살냈던 손견은 다시 한 번 낙양에서 여포부대를 짓이겼다. 이렇게 수복된 낙양성에 진입하며 손견이 옥새를 득템하게 되었고 그 옥새는 당시 손견의 주군이던 원술이 반협박을 하여 삥뜯기고 만다. 삼국지연의처럼 옥새를 꿍쳤다가 손책에게 물려주고 손책이 그 옥새를 담보삼아, 원술에게 병력을 인수받아 독립했다는 것도 삼국의 한 축을 맡는 손가의 라이프를 보다 드라마틱하게 만들고자 각색된 것이였다는...ㅎ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손견은 명백한 "원술의 부하"였다. 삼국지연의만 보셨거나 게임 등으로만 접하신 분들은 절대 몰랐을 사실이다. 허나 원술이 그럼 그렇지, 명군이 아니다보니 그 아래에서 손견이 이래저래 속앓이를 하긴 했다. 일단 저 동탁과의 전투에서도 파죽지세였지만... 손견이 너무 잘 나가, 그 위세나 명성이 높아지면 그를 컨트롤하기 벅찰 것을 염려하고 시기했던 원술이 겐세이를 놓고자 군량보급을 끊었던 탓에 손견은 그 드높던 기세가 주춤해질 수 밖에 없었고 위의 언급대로 옥새마져 협박으로 빼앗기며 심지어 그 아들 손책마져도 원술로 인한 스트레스가 여간 아니였다고 한다. 그 후.. 그 원술의 명으로 유표를 공격하던 중, 당시 손견에 맞선 유표측 장수인 "황조"의 부대와 전투 중, 원정군 총지휘관답지 않게 퇴각하는 황조를 직접 앞장서 추격하는 무리수를 두다 가뜩이나 눈에 잘 띄는 붉은 두건을 두른 탓에 빗발치는 화살과 돌에 맞아 젊은 나이에 허망히 생을 마감한다. 직접적인 사인은 날아온 돌에 머리를 직격으로 맞고 두개골의 골절에 의한 즉사. ... 손견 본인의 전투 스타일 자체가 겁대가리 상실하여 앞뒤 재고보고 할 거 없이 자신이 앞장서는 스타일. 심지어 공성전에서조차 자신이 앞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고 위에서 언급된, 손견을 전국구스타로 만들어준 동탁과의 전투에서도 그 잘났다는 18로 제후들 중 거의 유일하게 손견 혼자 동탁군 전군을 발랐을 당시 역시 가장 선두에서 미친 듯 싸웠던 손견이였다. 일기토기록이나 무예솜씨에 대한 언급은 따로 남아있는 자료가 없으나, 저렇게 밑도 끝도 없이 앞장 서서 날뛴걸 보면 결코 힘과 무예가 뒤쳐진 사람은 아닐 거라는 것은 기정사실. 저런 스타일은 뭔가 간지넘치고 상남자스러워 보이긴 해도 정말 크나큰 리스크를 안고 있는 '하이 리턴 & 하이 리스크' 타입이라 할 수 있다. 총지휘관이 후방에서 지령만 내리는 부대와 직접 장병들을 독려하며 자신이 선두에서 달려 나가는 부대의 사기 차이는 극명하다. 저 당시의 병사들은 딱히 긴 시간 제대로 훈련을 받은 병사들이 드물었고, 대개 필요시에 허겁지겁 긁어모은 농부들 출신이 대부분에 장비나 무기도 별 볼일 없었다. 우리가 삼국지관련 각종 미디어에서 보듯, 무슨 요새군대처럼 통일된 군복을 입은 것도 아니였다. 쉽게 말해 거의 오합지졸이였는데... 그런 병구성일수록 몹시 중요한 요소는 딱 두 가지! "병력의 수"와 "병력의 사기"이다. 헌데, 그 둘 중에도 더욱 중요한 것은 "사기"였다. 기세가 드높은 소수가 그렇지 못한 다수를 일방적으로 도륙하는 경우도 저 당시는 부지기수였고. 서양의 역사를 봐도 숫자가 많다고 볼 수 없던 로마군이 다수의 게르만족, 북아프리카에서 승리를 거둔 큰 이유는 잘 훈련되고 통제된 정예병들의 자신감에서 오는 결국은 "앞선 기세" 탓에, 상대들이 더 많은 수나 지리적 이점을 가졌음에도 오히려 기가 꺾인 탓이였다. 심지어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는 그 무섭다는 '코끼리부대'를 앞세우고도 보병중심의 로마군에게 패했다. 이유는 카르타고는 코끼리를 앞세우고 나머지는 뒤로 배치, 코끼리가 짓밟고 휘저으면 나서서 시마이하는 전법인데, 로마군의 화살과 투창에 결국... 살로 이루어진 코끼리가 쓰러지면 그 후로는 대책이 없던 카르타고군은 기세가 꺾였기 때문. 아무튼 그렇다보니 저런 용감한 지휘관이 선두한 부대에, 겁을 먹는 장수나 병사가 있을리 만무하여 손견의 부대는 어지간한 적세력은 별 다른 전략없이도 죄다 씹어버렸던 것이다. 허나... 저 방식이 반대로 정말 극히 위험한 게.. 앞장 선 지휘관은 다시 말하자면 그만큼 적병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고, 제아무리 무예가 뛰어난들... 절대 다수의 병력이 다구리를 놓으면 장사가 없고, 활같은 원거리무기에 대해서도 취약하며 또 언급했듯, 만에 하나 지휘관이 전사하면 그 중요한 기세가 꺾이기에.. 다수여도, 승세를 타고 있었어도,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어 패할 위험이 지배적이다. 게다가 저 방식의 장점덕에 열 번, 백 번 이긴들... 저 방식의 단점탓에 한 번 패하면.. 그 당장의 전투는 물론, 그 세력 자체의 존망이 걸리게 된다. 그렇기에 이미 진즉부터 손견의 측근들은 그의 무모한 선두돌격을 자중시켰으나 그때껏 멀쩡한 손견은 당연히 씹고 지고집대로 했고, 그러다 결국은 누가 어디서 던졌는지도 모를 돌팔매에 맞고 허망히 사망한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이러한 성향은 장남에게도 고스란히 유전된다는... 성격은 시원시원했던 모양이다. 처벌도, 용서도 화끈했고 철저한 행동파였다. 대개의 맹장들이 그렇듯, 성격이 불같고 급했으며 전략전술 등은 비겁한 꼼수로 생각하여 비중을 크게 두지 않았다고 한다. 물욕은 없으나 고집이 센 편이였고 대단히 헌신적(?)인 아버지로서 어느 정도 나이가 된 아들들은 전장에 늘 데리고 다니며 각종 군사전투관련 경험과 지식들을 쌓게끔 지도했고 무예도 직접 가르쳤다. 아내(오국태 부인)를 몹시 사랑했던 로맨티스트이기도 했는데, 낙양에서 얻은 옥새를 원술에게 바치게 된 이유가 바로 원술이 손견의 아내를 인질 삼았기 때문이였다. 물론, 현대의 기준으로 아내가 인질인데 그깟 도장은 당연히 포기하는게 맞는거 아니냐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의 여성인권은 지금과 비교불가인 거의 남성의 부록으로 여겨지던 때고 다른 인물들은 자신의 야망이나 위급시에 아내의 안위는 내팽개 친 경우가 부지기수에 심지어 아내가 여럿인 경우도 많았고 "옥새"는 그냥 열쇠도 같이 하는 도장집 가서 인감으로 쓸 거니까 소뿔로 파달라며 3만원 주고 잠깐 기다리면 도장아저씨가 돋보기끼고 레이져로 파주는 그런 물건이 아닌! 상당한 야망가였던 손견같은 이에게는 대단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 당시로는 황실의 권위와 정통을 의미하는 물건이였다. 괜히 삼국지게임에서 옥새를 얻으면 여포도 매력이 100이 되는게 아니고, 원술이 아무리 또라이인들 이 옥새 얻고부터 황제의 꿈을 현실화시킨게 아니다. 게다가 당시 옥새를 분실한 후한 황실도 분실한 옥새를 새로 제작하지 못 하고 전전긍긍하던 것도 옥새는 어디 뒀는지 기억 안나면 다 서랍 뒤지고 엄마한테 어디 있냐 소리질러 찾다 끝내 기억 안나면 새로 마련하는 그런 물건이 아니였기 때문이였다. 옥새 이야기가 길어졌다만, 결론은.. 그런 어마무시대단굉장한 슈퍼레어템을 겨우(?) 아내 때문에 포기한 손견의 가족애가 깊었다는 것. 게다가 그런 가족애는 당시의 영웅이라 일컬어지는 인물들에게는 결여된 가치관이였다는 점이다. 당장 조조만 해도 자기 죽게 생겼으니 장남 조앙을 내버렸고(당시의 장남의 가치와 위치는 상당했음!) 인의의 아이콘 유비도 자기가 위급하니 부인들과 형제들 내팽개치고 지살자고 혼자 내뺐으며, 기타 숱한 인물들이 아내나 기타 가족들에 대한 안위는 뒷전인 경우가 다반사였다. 여러분들도 만약 강남 테헤란로 한복판의 15층 짜리 빌딩 하나를 얻었거나 국회의원 공천권을 받았는데 누군가가 여러분의 아내나 여친을 인질삼아 내놓으라면 내놓겠나? (잠깐.. 당연히 안내놓는다는 전제로 이리 물어본 나만 혼자 지금 쓰레기가 되는건가!?) 하여간 단점도 적지 않았다만 이런저런 영웅호걸의 면모들이 있었기에, 그 DNA가 전달된 손책, 손권같은 이들이 그 인물많고 사건많던 중국 삼국시대 속에서도 큰 획을 그은 히어로가 될 수 있었다는 말씀! 오늘의 주인공인 굵고 짧게 살다 간 손견의 이야기는 여기서 매듭 짓는다. 이번 칼럼은 원래도 늦었지만 유독 더 많이 딜레이가 된 점 깊은 사과 드립니다...T-T 변명을 해보자면, 제가 늦은 나이에 다시금 학구열을 불태우느라 지금 사이버대학에 등록해 퇴근 후에 공부를 하고 있는데, 중간과제 제출 기간 및 중간고사 기간을 앞두고 과제와 시험공부 탓에 틈내기 쉽지 않았고, 또 한 가지는 제가 좀 더 좋은 회사에 보다 나은 조건으로 이직을 하게 되면서 이것저것 좀 정신이 없었어요.. 아무튼 저도 노느라 늦어진 것은 아닌 점 양해 바랍니다. 이번주와 다음주중으로 중간과제 제출도, 중간고사도 다 마무리 지어지니 그 후부터는 제깍제깍 올리겠습니다!
도라에몽 아빠 에피소드 레전드.jpg
아빠가 밤늦게 들어왔는데 술떡이 됨 술 취해서 난동 피우는 아빠 그 덕에 깬 도라에몽과 진구 진구 : 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엄마 : 어머 깨웠구나. 여보 제발 정신 차려요~ 애들이 보고 있잖아요! 술 버릇이 심해지는 아빠 엄마 : 이제 나도 몰라요!  엄마 : 너희도 다시 올라가서 자. 빨리! 도라에몽: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 진구 : 응... 아빠 일어나 봐요. 이런 데서 주무시면 안 돼요! 아빠 : 에잉 시끄러워! 애 주제에 어른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도라에몽 : 이제 어쩌지? 진구 : 아 그래! 어리다고 뭐라고 하셨으니 더 큰 어른을 부르자! 아빠의 엄마. 할머니를 보면 아무 말도 못 하실 거 아냐! (노진구의 할머니는 진구가 유치원에 다닐 무렵,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도라에몽 : 그렇네! 아빠를 (타임머신으로) 옮기자 과거로 아빠 배달 완료! 진구: 할머니를 불러오자! 진구: 근데 뭐라고 말씀드리지..? 진구 : 할머니... 저 그게요... 할머니 : 진구냐? 날 보러 또 와줬구나 진구 : ...! 기억하고 계셨군요 할머니 : 우리 손주를 어떻게 잊을꼬 진구 : 할머니!!!! 도라에몽 : 진구야~ 진구 : 아, 맞다! 진구 :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어요. 실은, 아빠도 같이 왔어요. 할머니 : 뭐? 네 아빠도 같이 왔다고? 진구 : 엄청 취하셔서 난리도 아니에요! 진구 : 봐요~! 할머니가 마구 혼내주세요! 할머니 : 석구야~ 어서 일어나거라 아빠 : 너 누구야!  아빠 : 난 이 집에 가장 이란 말이.. 어? 아빠 : ? 아빠 : 어머니 어째서.. 할머니 : 조금 야단을 쳐야겠다 싶어서 할머니 : 잘 지내는거 같구나 아빠: 그럼요! 할머니 : 우리 아들 잘하고 있니? 아빠 : 당연하죠~! 난 한 가정에 가장이라고요! 할머니 : 그렇구나~ 하지만... 할머니 : 뭐든지 다 혼자서 하려고 하면 안 된다~ 아빠 : 엄마!!!!!! 할머니 : 아이고 우리 아들. 무슨 일이 있길래 이렇게 울음이 터지셨나 아빠 : 부장님이요...! 엄청 못된 부장님인데 날 매일 못살게 굴어요! 할머니 :  그랬어? 힘들었겠구나 진구: 아빠?! 도라에몽: 조금만 있게 해드리자 도라에몽 : 어른은 좀 불쌍한 거 같아 진구 : 그건 왜? 도라에몽 : 그야, 자기 보다 더 높은 사람이 없잖아. 그래서 많이 의지하고 어리광 부릴 사람이 아무도 없어 진구 : 음~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네 도라에몽 : 아빠도 분명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을 거야. 그래도 매일 힘을 내시는 거지 진구: 응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   울다 지쳐 잠든 아빠 다시 현재로 돌아온 후. 다음날 아침 아빠: 고마워요. 어제는 미안했어요. 취해버린 바람에... 엄마: 괜찮아요~ 아빠 : 오랜만에 어머니 꿈을 꿨어요 옛 생각이 나더군요... 아빠: 그럼 갔다 올게요! 다시 돌아온 아빠 아이들은 공감 못하는데, 어른들이 보고 울었다는 에피소드.
공손찬 백규 (公孫瓚 伯圭) A.D.? ~ 199
삼국지를 워낙에 좋아해서 여기다 시간 들여가며 이런 글까지 쓸 정도다보니 나름 삼국지에 대해 좀 아는 편이라 할 수 있는 내가 여러 자료들을 지금까지 보고 듣고 하다보면 그 인물에 대한 호감도를 떠나 참 안타까운 이들이 많다. '이 사람은 왜 이럴 수 밖에 없었을까' '왜 이 인물은 이런 선택을 해야만 한걸까' '그는 결국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건가' 그 중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오늘 다룰 인물 "공손찬"이다. 아마 게임이건 만화건 애니매이션이건 책이건... 소설인 연의를 읽었건, 정사를 읽었건.. 공손찬을 좋아하거나 궁금해 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특히 삼국지연의를 읽은 분들은 더더욱 공손찬을 좋아하거나 궁금해하지 않는데, 일단 연의에서의 그는 워낙 초반부에 등장하고 별 다른 임팩트도 없는, 드래곤볼을 예로 들자면 손오공이 어린 시절에 등장해서 잠깐 오공을 애먹이지만 얼마 못 가서 즈려밟히는 '타오파이파이' 정도의 취급... (혹시 누군지 모르면 포털사이트 검색 Go) 그나마 코에이의 삼국지시리즈를 즐기는 분들이 보다 고난도의 천하통일에 도전할 때나 선택할 인물. 하지만 역사 속에서의 그는 결코 그런 대접을 받을 엑스트라급은 아니였음을 오늘 글을 통해 밝혀 보겠다. 삼국지연의에서도 나오듯 실제로도 당대의 이름 높던 학자인 '노식'의 문하에서 유비와 함께 공부한 동문이고 그 때의 인연으로 유비가 공손찬이 막장테크 타기 전까지 공손찬의 객장으로 있기도 했다. 이쪽도 생전의 라이벌이던 원소처럼 적자가 아니지만 얼자였던 원소보다는 사알짝 나은 '서자'였는데 뭐 우리가 보기에는 도찐개찐... 어쨌건 집안도 원소의 원가에는 댈 바 아니긴 해도 나름 괜찮은 집안의 은수저출신. 공손찬의 집안은 대대로 유주일대의 태수를 지내던 가문이였는데, 원소네가 일전 원소칼럼에서 소개했듯 중앙정부 고위관직자 집안이라면 공손가문은 군수집안쯤? 이걸 보고 혹자는 'ㅋㅋㅋ군수 나부랭ㅋㅋ' 할 수도 있지만 이건 여러분들이 군수를 몰라 하는 소리다. 군수는 3급 공무원이며 군으로 치면 준장(★)에 준하는 정말 높은 자리다. 아무튼 저런 집안 출신이지만 서자인 관계로 지분을 이어받지 못한 Mr.공손은 첫 사회생활을 유주의 말단관리로 시작하는데, 이 때 맡은 업무는 각종 공문서를 필사, 즉 베껴 쓰는 일이였다. 당시는 복사기도 없고 이메일, 팩스 뭐 그런거 다 없으니 공무에 있어 이리저리 나가고 들어오는 문서들을 누군가 직접 보고 필사를 했는데, 그 일을 했다. 인간복사기로서 공손찬은 꽤 유능하여 문서들을 취합 후 요점을 추려 알아보기 쉽게 잘 정리하여, 그가 정리한 문서는 누가 봐도 업무현안이 눈에 잘 들어왔는데, 게다가 공손찬은 말도 조리있게 잘 했고 인물도 좋은데다 "목소리도 좋았다"고 한다. 이런 점들이 소문나며 어느 태수가 그를 점 찍어 사위삼고, 그 후 그를 노식에게 유학시키는 등 이때부터 공손찬의 포텐이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헌데 어느 날 저 공손찬의 장인되는 태수가 비리죄목으로 파직당해 유배를 가게 되었다. 저 당시가 워낙 나라꼴 개판이라 털어 먼지 안나는 태수가 몇이나 있겠냐만... 저 때는 매관매직도 흔했는데 이를테면 A : 저 이거 받으시고 저 벼슬 좀 ㅎㅎ 고위관리 : 오~ 1억전?!! 뭐 하고 싶은데? A : 영릉태수요! >_< 고위관리 : 콜! 조또마떼! (영릉태수 공석 시 발탁, 헌데 기존 태수 재직인 경우...) 고위관리 : 영릉태수 이놈개새끼, 2억전 세금 바쳐. 영릉태수 : 아.... (2억전 입금 시 유임 및 A에게는 다른 자리 물색! 미입금시....) 영릉태수 : 제가 2억전이 어디 있어요... 고위관리 : 넌 디졌어 (뭐가 되건 털어 난 먼지로 파직 또는 처벌, 그 자리에 A) 저런 경우가 적잖았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당시 이런저런 지방의 한 자리를 했던 이들은 위로 올려 보낼 세금(명목의 뇌물)을 채우고자, 또 저런 썩은 정부 휘하에서 일하다보니 본인도 썩어 대체로 백성들을 심하게 수탈하는 일이 다반사. 아무튼, 공손찬의 장인인 태수 '유기'(유표아들 아님)가 당시 일남으로 유배를 가게 되자, 본인 또한 자기를 알아보고 키워준 은혜를 갚고자 유배가는 장인을 따라가기로 하고 살아 돌아오진 못할거란 생각에 본인의 "셀프 장례식"을 올리고 유배길을 따라나서는데... 위의 저 유배지 일남, 바로 지금의 베트남이다... 지금 아무 세계지도나 펴고 당시의 유주라 불리던 중국의 베이징 동북부 아무곳이나 찍고 거기서 베트남까지의 거리를 찍어보면 ㅎㄷㄷ... 심지어 그 당시의 베트남은 '오지 Of The 오지'였으며 사실상의 사형선고였던 유배령이였거늘, 공손찬은 은혜와 의리로 그곳을 죽는 각오로 따랐던 것. 다행히 유배 가는 도중 뭔 일인지 또 사면이 되는 덕에 공손찬은 고향에 돌아왔지만, 사면되지 못했다면 대단한 의리남아인 공손찬을 삼국지 게임에서 선택 못할 뻔.-_-;; 고향으로 돌아와 그전의 평판 덕에 다시 벼슬길에 오른 공손찬은 그때부터 포텐이 만개하며 당시 유주 인근의 소수민족들 중 가장 세력 크던 "오환족"의 학살자로 이름 얻기 시작하는데...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오환족들의 분노와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그 과정이 실로 잔인했는데, 공손찬은 단순히 '접경지역의 이민족을 축출한다' 이상의.. 몹시 뒤틀린 인종관을 갖고 오환족은 모조리 박멸하여 그 씨를 말려야 한다는 한족중심의 인종차별론자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오환족의 투항은 결코 용납되지 않았으며, 애어른이나 남녀노소없이 오환은 물론, 그 2세나 3세의 혼혈에게조차 가차 없었고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반 후한 백성들의 원성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오환 및 그 일대 소수민족에 대한 홀로코스트는 중화사상에서 비롯된 한족 우월주의가 당연시되던 여타 한족의 입장에서조차 이해를 얻기 힘들만큼 극심했다. 강족들을 토벌하기도 했으나, 그들과 결탁하기도 했던 동탁, 마등, 한수, 마초 등등이나 흑산적 및 오환족들과는 밀당을 통해 견제와 화친을 번갈던 원소나 조조, 무릉만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했던 훗날의 유비 등 아무리 소수민족을 오랑캐 취급하며 천대했던 당시라도 무조건 다 싸잡아 죽인다기보다는 필요시에는 협력대상으로 봤던 경우도 많았거늘... 공손찬은 이들에 대해 철저한 배척 및 멸종을 도모했고 당연히 오환들도 공손찬에 대한 항복 역시 항전의 끝과 다름없는 죽음뿐이란 것을 알고는 최소한 싸우다 죽자는 결론을 택하며 후한 백성들 역시 오환족들의 침략 또는 병사로 차출되는 등의 피해가 나날이 늘어갔다. 심지어 공손찬은 소수민족들과의 전투에서는 앞장서서 무쌍난무를 찍었고 결국 그의 군사적 재능과 이 오환족 제노사이드가 결합하여 후한의 동북부지역은 어쨌건 가장 소수민족의 평탄화가 잘 된 지역이 된다... 종종 연의 내에 등장하던 공손찬의 "백마장사"라는 닉네임과 그에 따른 업적이 이 소수민족 학살로 얻어진 것이다. 결국 어찌보면 단순히 치안을 위해서가 아닌 본인의 가치관에 따른 삐뚤어진 행태의 결과. 이러던 어느 날, 유주자사(쉽게 말해 우리의 도지사 개념)로 한실종친이자 인망 높고 덕이 있기로 소문난 "유우"가 부임해오며 공손찬은 심기가 매우 불편해지는데... 유우는 군사일변도의 공손찬 플랜에 대해 상당한 회의감을 표출하며 막대한 군비지출을 최소화하고 그 여유분 + 중앙 재정지원을 그간 숱한 전투에 황폐화된 농지개간 및 유랑민들의 정착지원 등의 복지와 지하자원 개발로 인한 산업다각화 및 재정확대, 오환과의 화친 및 교류와 교역의 증대를 통한 경제구조 변혁 등 다분야에 걸쳐 진짜 유주를 위한 각종 계획들을 내세워 추진했는데.. 공손찬은 위에 언급한 자신의 뒤틀린 인종관 + 그런 위기감 조성을 통한 군비확장 및 국방비 사유로 자신의 세력과 야망을 키우던 터에 유우의 저런 정책들은 일절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고 유우와 공손찬은 극심한 갈등을 겪었으며, 공손찬이라면 치를 떨던 오환들도 유우측으로 투항 및 교섭을 시도했다. 이미 드높던 덕망이 이 때 더 높아지며 백성들의 칭송이 줄 이어, 후에 반동탁 전선 측의 맹주인 원소가 그를 새 천자로 추대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던 것이다. 그 결과 그런 원소가 주도하던 '반동탁 연합에도 불참'한다. 하여간 이때부터 유우와 공손찬은 거의 각자노선을 걸으며 갈라선다. 이후 공손찬은 잠시 오환족 박멸을 미뤄두고 하북을 휘젓기 시작하는데, 삼국지연의에는 묘사가 안되나 공손찬의 용병술, 군지휘능력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수 많은 이들 중 가히 TOP10에 들만한 수준이다. 일단 먼저 말한 오환족 박멸 역시 마찬가지로, 원소나 조조같은 강자들이 오환이나 선비족, 흉노같은 북방 소수민족들을 괜히 회유하고 화친하려 든 게 아니다. 그만큼 버거웠던 부분이 크게 작용했다. 허나 공손찬은 이런 이들을 거의 지워버리다시피 했으며, 191년에는 비록 훈련없는 오합지졸이라고는 하나 무려 30만(삼국지 특유의 뻥이 아닌 역사기록에 의함)의 황건적 잔당이... 현 대한국군의 절반 가량의 저 대병력이 유주에 침공하자, 겨우 고작 2만의 병력만으로 저들을 궤멸에 가깝게 타격한다. 솔직히 저 열 다섯 배의 전력차는 진짜 황건적이 모두 맨손이였어도 버거울 지경이거늘.. 공손찬은 해냈다. 심지어 유우와의 대립이 극에 달에 결국 공손찬의 군사행동에 수시로 겐세이 놓던 유우와 공손찬은 다이를 붙게 되며 이때도 무려 10만이나 되는 병력을 고작 겨우 "100명"만 선발해 지휘부까지 뛰쳐 들어가 와해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렇듯 당시의 공손찬은 원소가 제대로 득세 전까지는 당시 전 중국을 통틀어도 맞상대로 당해낼 재간이 없던 최강의 세력이였다. 공손찬군은 병력 수는 물론, 각종 장비와 물자도 상당히 최신이였으며 유독 기병대에 집착을 했던 공손찬의 고집 때문에 전 중국에서 가장 많고 잘 훈련된 기마군단을 거느리고 있기도 했다. 비록 우리가 알만한 네임드 장수나 모사는 없었으나 공손찬은 오로지 자신의 무력과 지휘력 및 전술능력으로 커버업 하고도 남았으며 기마군단 특유의 기동력을 바탕으로 평야지역이 넓던 유주와 요동 일대의 정복자가 되어 심지어 당시의 원소조차 공손찬의 이름을 들으면 쫄지 않을 수가 없던 상황. 하지만 이렇게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갖고 서출의 그가 오로지 맨주먹으로 하북을 주름잡으며 소수민족과 한족 통틀어 무적으로 이름을 날려가고 있는 와중에도 서서히 그에게는 그림자가 들고 있었으니...... 1. 과격함. 그의 정복 및 전투방식은 심히 거칠고 잔인했다. 소수민족들 상대로는 항복 or 항전 여부 무관하게 모조리 죽였으며 사로 잡힌 이들은 곱게 죽이지도 않고 온갖 모질고 잔인한 방법을 통해 죽였으며, 그렇다고 관할지내의 백성들에게 선심을 베푼 것도 아니다. 공손찬의 병사들은 유주일대의 그 어떤 도적떼보다 약탈과 겁탈이 잦다고 악명이 떨쳐져 있었다. 2. 몰인정. 그는 부하들에게도, 병사들에게도, 자신이 다스리는 백성들에게도, 다른 군주들에게도, 당연히 적세력에게도... 오직 자기자신의 욕심과 야망의 성취에 소모되는 도구 또는 그에 방해되는 장애물로만 여겼다. 응당 그런 사람냄새 나지 않는 그에게 인재가 몰릴 리 없고 있는 인재조차 떠나는 경우가 잦았다. 당장 공손찬은 그 부덕함으로 조운, 전예 및 유비 등의 특급인재들을 얻고도 놓친다. 그가 성공가도를 달릴 때야 그렇다셈쳐도 그가 위기를 맞자, 그의 휘하세력들은 이탈에 가속이 붙어 더욱 비참한 몰락을 부채질 하는 계기가 된다. 3. 고집. 그는 말 했듯이 '서자'였고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실력, 운으로 성공을 쟁취했는데, 동서고금 막론하고 이런 이들은 자신이 옳고 맞다 여기는 고집이 보통이 아니다. 게다가 그도 모자라 남을 무시하는 경향도 강하고 이런 부류들이 대개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독단적인 아집부리기다. 공손찬 역시 이를 극복하지 못한체, 오로지 모든 부분에 있어서 자신의 고집대로만 처리했다. 역시 이런 이들 아래로는 자신의 뜻과 재주를 펼칠 수 없기에 인재가 모이거나 성장할 수 없다... 4. 별종. 공손찬은 각종 다양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평범한 사람은 아니였음이 여기저기 나타난다. 물론, 삼국지속 영웅들이 응당 평범한 이들이 아님은 맞으나, 공손찬은 좀 희한한 면이 많은 이였다. 유별나던 인종차별적 면모도 그렇거니와, 장인어른의 유배지를 따라가며 굳이 자신의 장례를 스스로 치른 점, 게다가 공손찬은 놀랍게도 참모나 책사에 점술인, 상인, 건축가 등등.. 일절 군사, 행정과 무관해 보이는 이들을 단지 자신과 코드 맞고 복종하며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채용했다.... 저런 여러 큰 결점들 탓에... 그 놀랍고 빛나는 군사적 재능을 토대로 후한의 동북일대를 독차지 하고도 결국 당시로서 자신보다 모로 보나 뒤쳐지고 모자르던 원소와의 대결에서 패하고 만다. 당시 원소는 객관적 전력으로는 공손찬에 댈 바가 아닌 걸 파악했기에 정면승부를 피하고 공손찬의 전력을 싸우지 않고 약화시키는 전법을 쓰는데, 예전 원소의 칼럼에서 말했듯 원소는 정치정략의 고수였는데 이를 십분 활용! 인심을 잃은 공손찬의 영지였던 유주일대를 비롯, 여기저기 사람을 보내 공손찬의 직간접적 세력권이던 요동, 기주 북부일대, 청주와 병주 등에 공손찬에 대한 네거티브적 프로파간다를 퍼뜨린다. 공손찬을 적대시하는 이들 및 세력들을 적극 포섭했으며, 공손찬에게서 전향해 오는 인재들은 더욱 크게 포상했다. 시간이 지나자 공손찬의 세력권에는 그간 공손찬의 폭정 탓에 더욱 그에 대한 비방과 괴담이 날개를 달고 퍼졌으며 공손찬을 따르던 적잖은 이들이 타세력으로 전향 및 하야하는 등 이탈자들이 줄을 이었다. 공손찬세력의 레임덕은 곧 군기강해이로도 이어져 군자금 및 관련 장비나 물자의 횡령도 횡행했으며 일부 장수들은 군마를 빼돌려 파는 일도 생겨났고 병사들도 더욱 백성들을 심히 약탈하게 되었으며 나날이 공손찬의 세력은 끝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이렇게 저물어가던 공손찬... 이런 와해작업이 무르익었다 판단한 원소군의 총공세에 공손찬세력은 언제 그리 강했냐는 듯 무너져 내렸으며, 그 강하다는 공손찬군의 기마군단 역시 이에 대한 자부심에 변화없던 전술 탓에.. 대기마군단용 요격전술 개발에 심혈을 기울인 원소군에 의해 박살나고 만다. 세가 기울자 공손찬은 수 많은 백성들을 착취하고 노역에 동원해 지은 최강의 방어요새인 "역경"으로 피신.. 여기에서 짱 박힌 체, 히키코모리처럼 허송세월을 보낸다. 이 부분 또한 실로 안타까운게, 이 역경은 당시의 냉병기로만 무장된 재래전력으로는 사실상 수년 이상의 시간으로도 함락이 쉽지 않은 요새였고, 기세가 꺾여 그럴 뿐 적잖은 병력과 그 병력들이 수 년간 먹을 식량도 비축되어 있었으며 내부에 둔전이 가능할 정도의 농토도 있는 등. 거의 이 역경이란 요새는 당시의 건축토목술의 정점을 찍는 요새로 만화 진격의 거인에 나오는 월마리아같은 거대장벽에 둘러쌓인 궁극의 방어요새였던 것. 아무튼 공손찬은 이 요새에 거북이처럼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않았다. 원소군의 입장에서도 공손찬의 장기전은 반갑지 않았다. 어쨌건 자신의 본거지를 비우고 나온 원정이 길어지면 자신의 거점을 호시탐탐 노리던 조조나 흑산적들의 공격에 취약할 수 밖에 없으며 병참에도 한계가 있고 그렇다고 섣불리 퇴각하다 역경내에서 별 다른 손실없이 진치던 공손찬군이 쏟아져 나오면 그야말로 낭패기 때문. 그런 이유들로 심지어 원소는 오히려 공손찬에게 먼저 화친을 제의하기도 했으나, 싸울 생각도 없었으면서도 공손찬은 제 고집에 화친에는 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대치가 계속 된 와중... 안그래도 희한한 괴짜 공손찬은 정신이상에 가까운 기행을 보이는데, 역경루라는 역경내에서 가장 높은 누각에서 지내던 공손찬은 그 누각에 두터운 철문을 달아 안에서 잠그고는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7세 이하의 아이만을 드나들게 하였으며 각종 서류와 공문서들과 식료품과 생필품도 이런 아이들이 셔틀을 맡았고 급한 보고사항은 밖에서 누각으로 소리치면 공손찬의 대답을 다시 누각내의 시종들이 소리쳐 대답하는 심히 박ㄹ혜스러운 행태를 보이기 시작.... 게다가 잠깐 밖으로 군사를 출격시켜 긴 대치에 루즈해있던 원소군을 기습하다 포위 당하자, 어서 구원병을 보내자는 부하들의 요청에, '저들을 구하면 모두 구원병을 믿고 열심히 싸우지 않을거다'라며 그들의 전멸을 방관한다... 이를 계기로 안그래도 저물어 가던 공손찬의 세력은 급속도로 와해되며 탈영병과 이탈자들이 늘어갔고 제 아무리 우주방어요새라도 농성병력이 없다면 함락은 시간문제.... 끝내 원소군이 방어를 뚫고 내부로 진입하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효웅 중의 하나던 공손찬은 가족들을 모두 죽인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원소는 조정에 보고를 올린다는 표면적 이유, 조조에게 경고를 보내려는 내면적 이유로 공손찬의 참수된 머리를 보내는데, 당시의 조조와 조정 대신들 모두 공손찬의 패전을 믿지 못하다 그 잘려진 머리를 보고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훗날, 그런 공손찬을 무찌르고 그의 세력을 흡수하여 하북최강의 대세력으로 거듭난 원소가 훨씬 작고 약한 조조에 의해 몰락을 맞을 때 못지 않게 이 때의 원소가 공손찬을 상대로 승리했음은 전중국 최고의 이슈였다. 이렇듯, 아무리 자신이 뛰어나도 주변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아집으로 가득차 왜곡된 가치관을 가진 불통의 인재는 어떤 끝을 보는지를 공손찬의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실무에 밝고 행정에 뛰어나며 바른 말이나 쓴소리 하는 전문가들을 배제한 체, 그저 자신과 맞는다는 이유만으로 비전문가들을 비선실세로 삼았던 점. 오로지 자신의 의견과 생각만을 일방통보하며 고집과 불통으로 귀를 닫았던 점. 당시 비록 인구가 많진 않았어도 비교적 타지역에 비해 이른 개발덕에 꽤나 자리 잡히고 안정된 터전을 차지하고도 자신의 부덕으로 이를 황폐화시킨 점. 화친과 교류를 했더라면 충분히 윈윈하고 자신의 세를 더욱 키울 수 있던 상대를 오로지 적으로만 삼아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대립을 했던 점. 자신의 병사들이 적들 틈에 죽어가고 있음에 이를 충분히 구할 수 있었음에도 말같잖은 이유로 방관하여 모두 죽도록 방치한 점. 왜곡된 가치관 탓에 주변의 인심을 잃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그로 인해 적잖이 떠나간 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 사태를 수습해야 할 위기에 홀로 외부와 단절하여 틀어박혀 골든타임을 놓친 점. 수 많은 그의 문제점들이 마치 우리나라의 누군가와 놀랄만치 닮았다. 이렇듯, 자신의 역량과 장점들이 충분히 세상을 자기것으로 만들만 했음에도 이들을 잘못쓰게 되면 그 끝은 비참한 말로뿐이라는 것도.... 누군가와 닮았던 안타까운 영웅 공손찬편을 마친다.
간손미
삼국지에 대해 좀 깊이 아시는 분들이라면 "간손미"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듯.... 이는 무슨 각선미, 육체미, 백치미같은 그런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이 아닌 촉의 개국공신 3인방인 "간옹", "손건", "미축"을 묶은 표현이다. 저들은 형제지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딱히 서로 되게 친해서 붙어 다녔다는 기록도 없지만 삼국지 통틀어 유관장 삼형제와 함께 3명이 패키지화 된 유이한 그룹. 유관장은 의형제일지언정 어쨌건 형제지간에... 그 인지도나 삼국지 내에서의 비중이 넘사벽이지만 저 셋은 뭐랄까... 각자 개개인은 이도저도 아닌 애매함에 본의 아니게 묶여진 감이 크다. '간손미'라는 표현 자체는 이미 기존에 삼국지 관련 커뮤니티들에서 떠돌던 표현을, 웹툰작가 "이말년"이 웹툰에서 쓰며 대중화 시켰지만.... 사실 이미 삼국시대 당시부터 저들 셋은 묶이기 시작했다. 당장 삼국지정사의 저자 진수가 저들의 열전을 '미-손-간'순으로 엮어놓았으며, 삼국지연의 내에서도 수경선생 "사마휘"와 유비간 이런 뉘앙스의 대화가 오가는 부분이 있다. 휘 : 니는 뭐 그리 밑에 애들이 없냐?...ㅎ 비 : 어허, 뭔솔!? 내 밑에 관장조 안보임? 휘 : 걔들이야 그냥 주먹이나 쓰는 애들이고~ 비 : 머리 쓰는 애들로 간손미 안보임? 휘 : 간손미??!?!!?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 : .....,..(ㅅㅂ) 이런 연유로 저 위, 이말년의 언급처럼 남 주기는 아깝지만 또 막상 내가 쓰자니 영 별로인 이도저도 아닌 문관들이나 삼국지내의 인물들, 나아가 국내 삼국지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저런 부류들을 싸잡는 대명사로까지 나아간 표현.. Ex.1) 본인 : 너희회사 너희팀에 새 팀장 왔다며? 친구 : 응! 전 회사에서 같이 하던 대리도 데려왔어. 본인 : 일 잘 하디?ㅎㅎ 친구 : 오우, 시박 완전 조던피펜이야... 둘이 일 다해 본인 : 오지네ㅎㄷㄷ 친구 : 니네 팀장이랑 차석 과장 둘도 일 잘 한다지 않음? 본인 : ㅋㅋㅋ뭐래~ 갸들 그냥 간손미임...ㅋ Ex.2) 본인 : 역쉬 걸스데이는 혜리가 짱인듯... 친구 : 뭔 소리여ㅋ 걔야 그냥 얼굴 마담인데 본인 : 닥쳐!! 걸데는 혜리 빼면 죄다 간손미!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한 예문일뿐, 실제 걸스데이 멤버들간 팀내 기여도 및 수익성, 인기 등과 일절 무관함을 알림.) (허나 내 취향과는 유관함을 알림.. 혜리야, 사랑한다. 이 오빠, 너에게 작은 보탬이나마 될까 싶어 오늘도 일부러 팀장말 쌩까고 세븐일레븐 가서 혜리도시락 먹었다.) 이렇듯, 혜리는 2015년 아르바이트생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내용의 알바몬 CF로 고용노동부의 감사패를 받았고 창렬하다는 말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자 만악의 근원이던 세븐일레븐의 PB도시락 모델이 되며 세븐일레븐의 르네상스를 이끄는 선두마가 되었으며 혜리도시락의 단순 모델을 넘어, 메뉴선정에도 상당한 의견을 제시한 책임형 모델로서 인성과 프로패셔널, 미모를 겸비한 개념돌의 대표주자다. 자, 잠시의 방황을 접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간손미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가보자면... 유비의 생애가 제갈량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뉠 수 있는데, 제갈량을 만난 후의 유비는 말이 필요없는 성공으로 점철되나 그 전의 유비는 정말 의지할 땅 한 쪼가리 없이 변변한 세력도 형성 못 하며 산전수전 다 겪고 떠돌기 급급했던 비젼없는 군주였지만 원소나 조조, 도겸 및 유표 등등 당시 나름 한따까리씩 하는 군웅들은 하나같이 유비의 합류를 반겼고 아무리 시련을 겪더라도 기어이 이겨내고 극복하며 살아남았던 그 비결에는 간손미의 노력과 헌신이 녹아들어 있었다. 쉽게 말해, 한 편의 액션블록버스터를 만든다고 가정할 때 제작자 유비, 감독 제갈량, 주연배우 관우, 장비, 조운, 조연 마초, 황충, 위연, 방통 등이라면 간손미는 별 비중없고 눈에 안띄지만 그래도 없으면 안되며 누군가는 해야하는 촬영팀, 메이컵, 코디, 미술팀, 음향팀, 매니져, 밥차 이모 같은 그런 포지션. 사실 간손미는 이렇게 셋이 하나로 묶어 버리는 것이 실례인 촉한의 개국공신들! (이라며 이미 나도 이들을 묶어 한 칼럼에 쓰는 실례는 넘기자.) 자, 그럼 간손미를 한 번 따로따로 살펴보기로! 간옹 헌화 (簡雍 憲和) / A.D.? ~ ? 촉한의 인물들이 대개 그러하듯, 사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 간손미 중 가장 왕고인데, 고향이 유주의 탁군 탁현... 지금 중국 허베이성의 바오딩시와 줘저우시인 곳인데, 그렇다. 바로 유비의 고향인 그곳! 유비와 동향으로 삼국지연의에는 묘사되지 않지만 유비와 어린 시절부터 친한 친구 사이였다. 고로, 유비 휘하에서는 의형제인 관우 & 장비보다 유비와 알고 지내며 함께 한 시간이 가장 긴 인물이다. 유비가 기의한 이래 입촉까지 함께 했으며, 어찌보면 당연하고, 어찌보면 놀랍게도 유비의 지시에 절대복종하긴 했으나 유비를 주군의 예로 대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지고, 성격은 요샛말로 하면 개그캐였던 듯. 유표에게 의지하기까지 허구언 날, 박살나고 패배하고 쫓기고 도주하여 사실상 패배주의, 열등의식, 암담함이 가득했을 유비진영에 분위기를 다독이며 살림살이를 챙기고 병사모집과 관리 및 잡다한 일들의 처리를 하는 일종의 행정을 도맡았다. 툭하면 져서 쫓기고 그 와중에 죽고 다치는 이도 한둘이 아니였을 당시 유비세력에서 항상 넉살좋고 입담좋고 성격좋아 친구이자 집단 최고권자인 유비부터 그 이하 부하들까지 농담 및 음담패설로 웃음을 안기고 분위기를 북돋던 간옹의 역할은 수치로 환산할 수 없고 또 그래서 평가절하 되기도 하지만 그때 비참하던 유비집단에 없어서는 안될 부분이였다. 제갈량 영입 전은 물론, 영입 후에도 유비는 업무 외적인 부분의 넋두리나 상담 등은 간옹을 불렀다고 한다. 다만, 사람 자체는 자유분방했는지.... 딱히 원리원칙을 세세히 준수하진 않은 듯 보이며, 그래서인지 복색도 늘 격식없이 대충 걸쳐 입었고 위의 언급처럼 비록 충성하며 상명하복할지언정 유비를 주군아닌 친구로 대했던 간옹이기에 훗날 유비가 형주에서 기반이 서서히 안정되며 초창기부터 유비의 정에 끌려 따라다니던 이들 외에 철저히 비즈니스적으로 영입된 인재들이 늘어나던 와중에도 간옹은 그들을 모두 편히 살갑게 동생들 대하듯 했다고 한다. 제갈량이 군사직을 맡아 전략회의를 진행하는 엄숙하고 긴장된 순간조차도 간옹은 한쪽 구석에 의자 몇 개를 이어붙이고는 비스듬히 누워서 회의에 참석하거나 뭔가 군것질거리를 우물거리며 회의에 참여했다. 심지어 회의 도중 화장실에 가고 싶거나 본인이 들을 부분을 다 들었다 싶으면 회의 중간에 휙~ 나가기도 했고... 식사 중 자신의 찬을 다 먹어놓고는 관우의 자리로 가서, 관우의 찬을 집어먹기도(!?) 했으며.. 장비에게 자신이 더 힘이 셀 것 같으니 팔씨름을 하자고(...) 도발을 걸기도 했다. .... (장비가 응했는지 여부는 사료가 남지 않았다만 왠지...) 조운에게도 활솜씨를 겨루자며 조운이 먼저 과녁을 맞추자, 그 과녁을 잠시 바라보고는 조운은 자신의 상대가 못될 것 같으니 다음에 겨루자며 가버렸다... 보다시피 내용만 보면 진정 민폐갑에 진상 캐릭터다. 그러나 대단한건 이러한 간옹의 언행들에 대해 타인들의 불쾌함, 불만, 이의제기 등에 대한 기록들이 일절 없다. 유비진영의 모두가 저런 간옹의 진상에 모두 애정으로 보듬을 존나 호인들만 있었을 리도 없고.. 심지어 간옹이 건드린 인물들 중에는 성격이나 인성이 결코 순둥이라고 볼 수 없는 관우와 장비도 있으며, 그렇다고 제갈량이나 관장조같은 천하의 히어로들이 감히 어쩌지 못할 위엄이나 권한이 있던 것도 아니다. 이는 쉽게 말해 타인들이 간옹의 저런 격의없이 구는 언행들을 '쟤는 뭐 원래 저렇지~' 라며 넘겼다는거다. 그리고 간옹 역시 그닥 격식이나 예를 차리지 않을 뿐, 기강을 해이하게 하거나 타인에 직간접적 폐를 끼치는 수준의 막장 난봉꾼은 아니였다는 말이기도 하다. 입촉 후, 유비가 전후안정화 작업 중 식량난을 우려해 금주령을 내림은 물론, 심지어 양조관련 도구의 보유자도 처벌하려는 법령을 입법시키려 하자 어느 날 간옹은 유비와 밖을 나갔다 지나는 남녀를 보며 저들을 당장 간음죄로 벌하시라 하였는데, 유비가 그게 뭔소린지 묻자 '저 남녀는 간음을 할 수 있는 도구(......)를 갖고 있으니 응당 벌 해야 한다'고 하자, 이를 알아들은 유비는 법령을 철회했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삼국지연의에도 나오지만 유비가 서촉정벌 당시 막타에 몰린 성도의 유장에 항복을 권하는 최후통첩 전할 사자로 들여보낸 것도 간옹. 연의에서는 거만한 간옹이 유장의 한 신하에게 꾸짖음을 듣고 자세를 고쳤다고 나오나 그런 이야기는 남아있지 않다. 간옹이 특유의 입담으로 유장을 설득했다고도 하지만, 이건 좀 오버같고 당시 유비군 VS 유장군의 대치구도상 간옹이 아니라 중풍에 치매도 같이 앓아서 나보고 가끔 자기 마누라라고 부르시는 우리 옆집 할아버지가 갔어도 유장은 항복했을 것이 자명하니 딱히 간옹의 공이라고 하기는 좀 뭐한 부분은 있다. .... 간옹의 기록은 확실히 유비의 입촉까지 함께 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만, 그 후로 그가 언제 어찌 죽었는지가 역사기록에 없다. 허나 정황상 이릉대전 이전에는 이미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꼬장꼬장히 팩트폭행으로 유비를 그로기상태로 만드는데 능했던 법정과 마찬가지로 역시 살아있었다면 유비를 격의없이 대하며 말발로 추스려 이릉대전을 제지하는데 한몫을 하진 않았을지 싶은 아쉬움이 남는다.... 손건 공우 (孫乾 公祐) / A.D.? ~ 214 현 중국 산둥성 웨이팡시의 북부지역 일대인 당시의 청주 북해군 출신이며, 유비가 도겸을 이어 서주자사가 되던 때 천거받고 유비 휘하에 임관하여 그때부터 유비를 섬기고 간손미 중 가장 임관이 늦다. 즉 짬이 셋 중 제일 안된다는 말. 간옹과 마찬가지로 이 양반 역시 자세한 기록이 많지 않은데, 촉한출신 닝겐들의 기록량이 다 이 지경인건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일단 삼국 중 국력이 가장 후달렸던데다, 촉이 망한 후 강유가 종회를 꼬드겨 반란을 일으켰다가 제압당할 당시 성도의 황궁이 큰 손상을 입으며 기록들이 대거 유실된 탓이 크기도 하다. 하여간 손건은 유비 휘하에서 외교력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난세의 떠돌이 유비에게 굉장히 요긴한 역량을 발휘했다. 조조의 통수를 치고 원소 휘하로 들어감을 타진 때도, 다시 원소를 떠나 유표에게 전향해 갈 때도, 유비는 손건을 사자로 보내 상대군주를 설득시켰다. 주요한 외교업적이 꼴랑 두 건이지만, 이 두 건은 유비의 생존에, 유비세력의 흥망에 절대적이고 직접적인 임팩트를 가졌던 두 건으로서... 당시 원소 자체도 워낙 녹록치 않은데다 원소 주위에는 최정상급 책사들이 손건을 다구리 놨을 게 자명함에, 유표 역시 연의처럼 죽을 날 기다리며 숨만 쉬던 호구가 절대 아님은 물론, 반유비정서가 강하던 외척 측근들도 이해로 설득시킨 손건은 분명 대단한 외교가였으며... 그 당시 '사자(사신)'은 사실상 목숨을 내놓고 맡는 보직이였다.. 상대진영에서 분위기가 말리거나 자칫 실수를 하면 그 자리에서 목이 날아가는 건 부지기수에, 당시 교통인프라도 최악에, 치안도 개판인지라 또 중국이 좀 넓어야지, 며칠 걸려 험하고 먼 길 말타고 오가는 건 여간 힘든일이 아니였으며 중간에 혹여 도적단을 만나면 그냥 끝이였다. "네 이놈들! 난 유황숙님의 사자다! 길을 비키지 못할까!!" 이딴거 안먹혔다. 이미 그 전에 나름 세력이 적잖던 조조조차 부친을 재물 노린 이들에게 잃었을 판에, 하물며 당시로서는 별 볼일 없던 유비 나부랭이의 사신 부스러기 따위는 그냥 죽이거나 끌고 간들, 유비로서는 딱히 방도도 없었다. 하지만 손건은 살아남았다. 그것도 자신이 맡은 바 소임을 완수해내면서. 물론, 손건의 외교성과 또한 일각에서는 너프되는게 사실. 그들의 주장은 손건의 외교성과라기보다 비록 유비가 실세는 부족했던건 맞으나 명분상으로는 원소나 유표의 입장에서 제법 매력적인 카드였다는 점을 내세운다. 천자가 직접 황실 족보를 뒤져 자신의 숙부뻘임을 입증한 황숙에, 천자를 겁박한 공공의 적 조조에게 별 볼일 없는 기반임에도 대립각을 세우고 패해서 쫓길 지언정 맞서는 유비는 여타 군주들에게는 천자를 등에 업은 조조와 맞붙음에도 오히려 명분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구실이였기 때문. 이렇듯 어찌보면 간손미들 중 가장 몸고생이 많았던 손건은 의지할 땅 한뙈기 없어, 자신이 몸 던지고 목숨 바쳐 원소나 유표에게 입지를 대신 구걸해야 했던 주군이 서촉정벌을 성공 후 제대로 된 근거지를 자력으로 얻는 감격스러운 광경을 본 후 얼마 못 가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경험과 경력상 장수했다면 이전에 없던 자신의 주군의 위상까지 더해져 더욱 강력한 외교카드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리 되지 못해 안타까운.. 직접 비교는 좀 어려우나 간손미들 중 실질적인 업적이 가장 많고 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그는 관우, 장비, 조운, 간옹 등처럼 유비와의 인연에 의한 것이 아닌 비즈니스적으로 임관한 인재임에도 유비가 여포에게 서주를 잃고 시작되는 험난하기 그지없는 대모험을 함께 겪은 충신 중의 충신이다. 미축 자중 (麋竺 子仲) / A.D.? ~ 221) 간손미 중 훗날 가장 직위가 높았으며 심지어 그 빛나는 갓갈량보다 높았던... 여러모로 간손미 중 가장 뒤에 위치한게 억울할 법한 그는 당시의 서주 동해군, 오늘의 중국 산둥성 린이시가 고향이며 도겸을 섬기다 도겸이 사망 후 유비를 인수자로 정하며 자연스레 유비를 섬기게 되며, 가신의 수가 만 명에 다다를 정도라던 서주 대대로 이름난 대부호집안의 금수저였던 그의 험난한 인생여정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재산도 재산인데다 인근 백성들의 구휼에 신경쓰고 워낙에 성격도 온화하고 인자하여 황실 중앙정부에 천거된 적도 있는 서주의 호족출신 명사로서 솔까말 당시의 별 볼일 없던 떠돌이 군벌집단인 유비세력에 숙이고 들어갈 급이 절대 아니였다. 심지어 정사에는 인물이 좋았다는 평까지 남아있으며 연의에서는 아예 언급조차 안되었지만 상당한 명사수(!)에 승마실력도 훌륭한(!!) 문무겸전(!!!)이였다고 한다. 이런 서주의 토니 스타크 미축은 유비에게 인생을 걸게 된다.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유비에게 모두 기탁하는 한 편.. 나름 당시에 미인이라 평이 자자하던 막내 여동생(미부인)도 유비에게 심지어 정실도 아닌 첩으로나마 바치고 자신의 동생 미방과 함께 유비를 받들어 섬기는데.... 당시 이 미축의 유비에 대한 도박에 가까워 보이는 올인은 유비가 신야에서 조조군에게 박살나 쫓길 때까지도 도도 아닌 빽도에 가까웠으나, 훗날 유비가 입촉 후 군사장군에 임명된 제갈량보다 위인 안한장군에 임명되며 모였음이 입증된다. 제법 나쁘지 않은 무재를 갖췄음에도 워낙에 성격이 고상하고 온후한 탓에 카리스마가 절대적으로 필수인 군지휘에는 걸맞지 않다 느낀 사람 잘보기쟁이인 유비에 의해 철저히 문관으로만 쓰여졌다. 사실.. 간옹과 손건, 미축 모두 꽤 초창기부터 유비를 따르며 갖은 모진 개고생을 겪고 생사고락을 넘나드는 와중에도 유비를 향한 충절이 변함없음은 마찬가지였으나 미축의 그것은 다른 둘과는 그 유가 다른 것이... 그냥 친한 친구 따라나선 간옹, 추천받고 입사하여 직장생활 시작한 손건에 비해 미축은 그때껏 누린 모든 호사를 버리고 가진 모든 것을 유비에게 바쳤다는 점이다. 이 재산 기탁 덕에 유비세력은 이리저리 터지며 쫓길 지언정 유지가 되었던 것이며, 이런 미축의 올인이 없었다면 유비는 진작에 야심을 접고 유력군주의 부하가 되었거나, 난전 중이나 떠도는 와중에 객사.... 아무리 운이 좋았다한들 훗날의 한중왕을 넘어 촉한의 초대황제까지는 절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유비 역시 별 도드라지는 공적이 없음에도, 그닥 능력이 특출나지 않음에도 그런 미축을 은인으로 여기며 챙겨, 미축의 생전 직위는 자신의 두 아우인 관우와 장비에 못지 않던 조운과 심지어 자신의 인생을 바꿔준 제갈량보다 상석에 올랐고 당연히 관장조제갈 및 여타 인물들은 그에 대해 일체 이견이 없었다. 게다가 미축은 원체 군자에 호인인지라, 초창기 유비세력의 대주주임에도 세력의 운영방침에 일절 관여없이 오직 유비의 지시에만 철저히 따랐고 나이로나 짬으로나 댈 게 안되는 제갈량을 공경으로 대했다. 이런 미축이였건만.... 그 끝은 간손미 중 가장 안타까웠던 게, 일단 여동생인 미부인의 사망.. 연의에서는 유비의 정실이 감부인, 그 다음 세컨이 미부인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미부인을 감부인보다 먼저 만났고 서주 최대 부호의 딸이요, 자신 세력의 대주주의 누이기에 그 서열과 대우가 응당 감부인보다 위였다. 게다가 유비는 그런 미,감부인 이전에도 처가 있었으나 이리저리 떠도는 통에 연이 끊겼는지, 자식도 없던 상태에 미부인의 존재는 서주에서 유비가 조조에 패해 쫓기면서부터 언급되지 않는 걸로 보아 그 당시 조조의 포로가 된 듯 하다. 아무튼 그렇게 여동생은 유비에게 바치고 얼마 되지 않아 연이 끊기고... 미축 말년 망타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동생, "미방의 배신"이였다. 미방 이 씨부랄새끼의 배신 및 오로의 귀순은 심지어 유비의 형제요 당시 형주 총사령관 관우의 패전과 사망.. 게다가 유비의 본진 형주를 잃는데 직접적 영향을 끼쳤고 미축은 그게 너무 수치스럽고 죄스러워 스스로를 결박, 유비에게 꿇고 울며 죽음을 요청한다. 사실, 당시의 트렌드로 볼 때... 미방의 죄는 미축뿐 아니라 미씨일가를 싹쓸고도 모자른 대역죄였으나, 유비는 이는 미축의 잘못이 없다며 그의 결박을 직접 풀고 일절 처벌이나 강등없이 전과 같이 대한다. 허나... 오히려 그런 유비의 관용은 미축의 양심을 더욱 괴롭게 하였고 그 좌절감에 병을 얻어 앓다 유비가 제위에 오른 해 사망한다....T-T (미방 개새끼...) 이처럼 간손미들은 그저 마냥 머릿수만 채우며 밥이나 축내는 짬타이거들이 아니였다. 솔직히... 나도 한 때 그랬지만, 대부분 삼국지 속 인물들의 역량과 능력을 코에이의 게임 속 데이터로 판단해버리는 탓에 저들처럼 수치화 시킬 수 없는 부분에서 묵묵히 소임을 했던 이들이 평가절하된 것이 크다. 게다가 촉한의 불운스러운 사료 부족 역시 이유기도 하고.... 아무튼 사람 잘 보고 잘 쓰기로 삼국시대 인물들 중 원탑에 가깝던 유비가 저들을 끝까지 중용했다는 것은 그들이 제갈량, 방통, 서서, 마량, 장완, 비위 등 촉한문관의 슈퍼스타들에 비해서는 어떨지 모르나 충분히 자기 몫은 해내던 비범치만은 않았던 인물들이란 반증이기도 하다. 비록 유비 따라 고생한 기간들이 더 길긴 하다만 어쨌건 셋 다 그렇게 개고생하며 따르던 주군이 왕위, 제위에 오르는 건 보되.. 몇 년 후 그런 성공의 정점 찍은 주군이 "이릉대전"이란 무리수를 두다가 다시 고꾸라지는 건 보기 전에들 죽었으니 어찌보면 다들 보람차게 눈을 감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이들의 능력과 존재감에 대한 판단은 각자가 알아서 할지언정, 확실한건 이들이 없었다면 절대 결코 여러분들이 아는 유비도 없었을 거라는 점.... 이 부분에 대해 여러분들은 인정 못할지라도 정작 당시의 당사자인 유비와 그 휘하 문무백관들은 모두 인정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나가서 돈 잘 벌어오는 아버지도, 학교에서 일진인 첫째도, 전교회장을 맡고 성적도 상위 1%인 막내도, 동네미녀는 전부 건드린 삼촌도, 모두 집에서 중요하고 필요한 영웅들이지만 이런 이들 뒤에는 이들이 마음 편히 자신의 일과 임무에 전념할 수 있게 집안일을 해놓으시고 뒷바라지 하시는 어머니가 계시듯... 간손미는 눈에 띄지 않았을 뿐 그 어느 누구 못지 않은 충성과 성실함으로 주군을 보필한 훌륭한 인재들이였다 이제는 간손미를 무시하지 말고, 더 나아가 기왕이면 간손미라 셋을 묶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