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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에 있어 줘'

melrose란 이름이, 수도원으로 유명한 영국 스코틀랜드 동남부의 한 시골을 뜻하는 것인지 쇼핑 도시로 유명한 미국 메사추세츠 보스톤 근처의 지역을 말하는 것인지 장미향으로 이름난 영국산 홍차의 상품명에서 따온 것인지는 모른다. 4년 전인지 5년 전인지 그가 선물한 USB 메모리의 커버에는 단순히 그 스펠링만 적혀 있을 뿐 의미를 추정할 수 있는 다른 어떤 힌트도 담겨있지 않았다. 아무튼 그 후부터 새 메모리를 휴대폰에 걸고 수많은 곳들을 떠돌아 다녔다. IT 산업의 한가운데에서 일해왔고, 워드 프로그램과 메일을 수저처럼 사용하는 습성상 그 메모리가 손에서 떠날 일은 없었다. 친구가 맨 처음 이 메모리를 선물했을 때 'melrose'는 케이스에 담긴 상품 개봉 전의 상태가 아니라 그같은 포장이 제거된 개봉 후의 상태였는데 이유는 그가 거기에 음악과 영화를 담아서 주었던 까닭이다. 영화 파일 2편과 10여개의 음악 앨범이 든 USB 메모리를 PC에 꽂고 열심히 보고 들었던 당시가 생각난다. 근본적으로 나란 사람은 음악을 거의 듣지 않고, 영화도 영화관에서 관람할 뿐 PC로는 거의 보지 않는다. 그래도 정성이 고마워서, 그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열심히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생각해 보면 그 때가 우리의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 서로 호감을 가지고 상대를 경청하기 위해 숱한 날들을 노력했던 시간이니까. 이래저래 많은 일들이 생기고 적지 않은 날들을 거쳐오면서 처음에 melrose에 담겨있는 파일들은 다른 컴퓨터로 옮겨지고 또 이동했다가 마침내 지워지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메모리 자체의 내구성에도 문제가 생겨 손잡이가 녹슬고 usb 접촉면 덮개도 망가졌다. 전과 다름없이 전화기 고리에 끼고 다니며 항상 휴대하지만 사실 이제는 이 메모리를 거의 쓰지 않는다. 새 메모리를 살 때도 됐고, 쇼핑할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나 그가 선물한 이 작은 것, melrose를 다른 것으로 바꾼다는 것에는 자꾸 망설이게 된다. 이제 사실상 쓰기도 힘든 건데... 더구나 이제 그 친구를 만나게 될 일도 사실상 거의 없지 않겠나 싶은데 여전히 마음 자리가 들쑥날쑥 출렁이는 것이다.
원래 그가 넣어줬던 파일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 안에 있었던 영화 한 편의 제목은 아직 기억하고 있다. 2005년작 싱가포르 영화, "내 곁에 있어 줘". 인생에는 수많은 변수가 있고, 그 중 어떤 변수들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삶을 크게 바꾸어 놓는다. 내가 서울과 파주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에겐 큰 변화가 생겼고, 그 와중에서 잡은 손을 놓쳐버렸다. 다행히 그는 좋은 기회를 만났고, 지금은 포근한 가족을 꾸려 새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아주 가끔, 휴대폰 문자로 안부를 나누지만 그것이 더이상 예전같은 울림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다행한 점은 그 과정에서 우리가 불행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 나는 그로 인해 요네하라 마리를 알았고, 익산과 원광대를 여행했고, 프랑스 와인의 깊이를 배웠다. 그는 나를 만날 때마다 책이든 음악이든 와인이든 꼭 선물을 주었고, 우리는 익산과 전주의 여관에서 밤새 이야기를 나누며 그가 가져온 와인을 비웠다. 그랑 크뤼 와인을 처음 마신 것도 그와 함께 였다. 국내 책들에 치우쳐 있던 내게 그는 다양한 작가를 소개해 줬고, 특히 소설과 에세이에서 아주 탁월한 저작을 일러주었다. 한때 제주에 살았던 그는 능숙한 제주어로 내가 모르는 섬의 어떤 곳들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은 늘 즐거웠다. 다만 내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에도 늘 역마의 한살이를 살고 있던 까닭에 지속적으로 오래도록 만날 수 없었던 것 뿐이다. 그 반대로, 그가 내게 무엇을 얻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미안한 마음, 아쉽고 빚진 느낌이 드는 것은 우리의 정산이 한쪽에 치우쳤기 때문이리라. 본인이 좋을 때건 나쁠 때건 그는 변함없이 내게 마음을 열었고 온 마음을 다해 나를 대접해 주었다. 사랑받은 기억은 오래 사라지지 않는다. 한밤중에 가끔, 나는 아무런 일도 없이 잠에서 깨곤 하는데 이제 생각해 보면 그건 어떤 상실감, 아주 지독한 결락감 때문일 지도 모른다. 과거를 되돌리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한다. 나도 그처럼, 누군가에게 온전한 한 배려였던 때가 있었던가? 그에게는 물론 그 누구에게도 나란 사람은 늘 제멋대로의 고집쟁이였을 뿐이다. 'Give and Take'란 아주 이기적인 소통의 형태라고 지적되기도 하지만 나는 관계의 최소한, 받는 만큼 주는 것에조차 인색했던 사람이었다. 이제 이 메모리를 처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것이 '내 곁에 있어 줘'라는 것은 아이러니지만, 그건 우리가 서로 다른 시기에 보내고 받는 뒤늦은 동일 신호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세상은 바뀌고, USB 메모리는 이전만큼 유용하지 않다. 포털의 파일보관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대용량 메일을 사용하면 1~2GB쯤은 쉽게 보내고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그때 내가 받았던 마음 그리고 지금 내가 느끼는 것들을 어떤 형태로 그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부서진 melrose를 어루만져 본다. 이 직사각형의 플라스틱 덩어리는 더이상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이별은 후일담을 양산한다. 그와 나는 헤어지지 않았으나 더이상 연장되는 드라마는 없다. 이제 진정으로 그를 보내줄 시점이다. 내 곁에 있어 줘. 말은 언제나 마음보다 늦게 도착한다. 말이 담긴 진심은 얼음이 녹듯이 이런저런 이유로 전달의 과정에서 100%의 충만을 조금씩 상실해 가게 마련이다. 어차피 관계란 개인의 환상일 수 있으며, 우리는 사실 타인에게서가 아니라 내가 느끼는 감정 안에서 위안과 공감, 실망과 좌절을 얻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모든 관계가 환상이거나 자기만족인 것은 아니리라.
늦었지만 그의 메시지를 수신한다. 담긴 내용 모두를 아주 온전히. 회신(Return mail)을 보내지는 않겠으나 아마 지금쯤, 당신도 알게 됐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별한 것임을. 아쉬움은 있지만 진심을 모두 건넸기에 후일담은 없으리라는 것을. 시기가 맞지는 않았으나 우리가 결국 같은 메시지를 보내고 받았다는 것을. 후회나 미련 없이 그 시절 전체를 긍정한다는 것을. 고맙다. 당신의 남은 날들에 내 몫의 행운을 보낸다. 부디 평안과 건강이 항상 당신 곁에 함께 하기를. 어쩌면, 아마도, 아니 확실히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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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peB 고마웠다겠지요...'젠장'에 좋아요 버튼을 드립니다 ㅋㅋ
난데없이 친구가 생각나는군요....친구였는지 아니였는지와는 무관하게...어떤 시절에 내게 각성을 주었던 모든 것들에게...결론은 고마웠다겠지요...젠장 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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