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ong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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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ㅜㅠ

아 ㅆㅂ 이황금연휴에..집구석.. 누가나좀 데꾸바람좀 쐬주라 할매되것따 ㅈ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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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님이러시면아니좋습니다.
@SSong9 왜 뻥이죠 저도 지금 방구석에 있는데...
그렇게 하루가 갔네요
@acroxs ㅡㅡ^
@cyk1406 담주 불금에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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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주기生涯週記 6
직원에게 물어보니 S시는 호남선이라고 했다. 우등으로 표를 끊고 시계를 보니 출발 시각까지 3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버거집이 눈에 들어왔다. 딱히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지만 자리를 잡고 버거를 주문했다. 심지어 패티도 한 장 더 얹어서.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버거를 다 먹고 보니 얼추 시간이 다 되었고, 버스에 올랐다. 평일 오후인데도 버스는 만석이었다. 서울은 한차례 큰 물난리가 지나간 뒤였고 언제 그랬냐는 듯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창 위의 에어컨은 영 시원찮았다. 버스에 오르면 책이라도 볼 생각이었지만 도통 책을 펼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음악을 들을 기분도 나지 않았다. 더위 탓이라고 생각했다. 문자가 온 것은 오늘 새벽 한 시 반쯤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K의 이름과 그의 이름 앞에 붙은 ‘故’라는 한자였다. 어쩌면 예정된 일이었지만 가슴이 철렁했다. 처음에는 ‘그’가 죽었다는 사실보다는 ‘죽음’ 자체에 대한 충격이 먼저 왔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어떤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슬픔이 오기에는 아직 이른 때일지도 몰랐다. 부고를 받은 몇몇 지인들은 퇴근 후 함께 모여 출발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마침 휴가였기 때문에 평일 이른 오후에 시간을 낼 수 있었다. S시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잡았다. 지방 소도시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장례식장은 너무나 외진 곳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고, 허름한 편이었다. 빈소에 들어서기 전 로비에 준비된 봉투에 이름을 쓰고, 터미널에서 인출해온 지폐를 몇 장 넣었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금액이었다. 생전의 그에게 내가 혹시 빚진 것은 없는지 가늠해보았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정장이라고 할 만한 옷이 죄다 본가에 있었고, 격식을 갖출 만한 옷이라고는 검은 겨울용 카디건뿐이었다. 화장실에 들러 카디건을 착용하고 매무새를 다듬었다. 부고문에 적혀있던 3호실은 2층 좌측이었다. 20대 초반 정도 되었을까, 입구에는 K의 다소 앳된 사진이 붙어있었다. 그는 나보다는 두 살이 적지만 30대 후반이었고, 내가 본 적 없는 그의 청춘은 풋풋하다 못해 다소 촌스럽기까지 했다. 왜 이 사진을 고른 걸까. 어릴 적의 그만을 기억하는 사람, 그리고 30대 이후의 그만을 기억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알아보기 수월한 연령대를 조율한 것일까. 그렇다기보다는 경황이 없었을 테지. 조문 예절은 버스를 타고 오면서 다시 확인해두었지만, 공수법은 언제나 까다롭다고 느껴졌다. 분향과 헌화 두 종류 중 나는 어느 때나 헌화를 택하고는 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것이 좀 더 수월해 보이기 때문이다. 헌화 시 조문 예절은 국화의 꽃봉오리가 영정사진을 향해야 한다고 되어있지만 이제껏 방문했던 장례식장에서는 모두 꽃봉오리가 영정사진이 아니라 반대로 향해 놓여 있었다. K의 영정사진 앞에 놓인 국화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어쩌면, 장례식장에서 특별한 위로를 받아야 할 자는 망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일지도 몰랐다. 국화의 꽃봉오리를 이쪽으로 돌렸다. 주춤거리며 영정 앞에 서서 머릿속에서 연습한 대로 두 번 절을 하고, K의 형으로 추정되는 남자와 맞절을 했다. 나는 종교가 딱히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정의하자면 개신교의 정체성이었다. 개신교의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묵례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절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다. 종교적 이유와는 하등 상관이 없었다. 상주는 슬픈 표정이었다. K의 부모님은 보이지 않았다. 상주는 내게 어떻게 오셨느냐, 식사라도 하고 가시라, 했지만 나는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한다고 했다. 일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수고가 많으시다고 말을 건네면서도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문제적이지는 않은지 생각했다. 젊은 사람의 죽음이라는 것이 그도 나도 모두 익숙한 일은 아닐 것이다. 주섬주섬 신발을 꿰차고는 도망치는 심정으로 나왔다. 택시 앱을 켜고, 곧장 택시에 올랐다. 기사는 내게 ‘서둘러 가시네요’라고 말을 붙여왔다. 나는 ‘네’하고 대답하면서, 순간 이 택시가 조금 전 타고 왔던 그 택시인가 했지만 아니었다. 장례식장에 올 때 타고 온 택시에는 조수석 서랍 위에 ‘고객님과 제가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잘 아는 길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편히 모시겠습니다.’와 비슷한 문장이 붙어있었지만 이 택시는 그 문구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언제 장례식장에 들어온 줄 알고 저렇게 말하는 걸까, 생각했지만 질문하기에도 나는 이미 너무 지쳐있었다. 터미널은 멀지 않았다. 곧 처음 택시를 잡았던 곳 주변에 닿았고, 택시 기사는 내가 내리기 전 ‘건강하십시오’라고 인사해왔는데, 그 앞에 했던 말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제가 뭘 해드릴 건 없지만’이었던 것 같았다. 아무리 서비스업이라지만 생면부지의 고객일 뿐인 사람에게 ‘제가 뭘 해드릴 건 없지만, 건강하십시오’라니. ‘감사합니다’하고 답변한 뒤 택시에 내리고 나자 조금 이상한 기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날이 너무 더웠기에 그런 생각도 금세 잊혔다. 서울로 가는 가장 빠른 차표를 끊고 뭐라도 마실까 했지만 적당한 데가 보이지 않았다. 터미널인데 마실 것을 파는 곳 하나가 없을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여유가 없었다. 어떤 여유. 글쎄. 나는 빨리 S시를 벗어나고 싶었다. 가장 빠른 차를 찾다 보니 이번에는 우등이 아니라 일반석이었는데, 역시 에어컨은 시원찮았다. 사실상 버스를 거의 연달아 두 번을 탑승하게 되니 너무 지쳐갔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었다. K의 목소리를 상상했다. K 특유의 농담을 떠올리자니 웃음이 났다. 그의 죽음은 잘 상상되지 않았다. 아직은 그가 저쪽보다는 이쪽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가 몸의 이상 징후를 알려온 것은 약 2년 전이었다. 그날도 무더운 여름이었다. 그가 이렇게 떠날 거라고는 작년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다. 우습게도 내 몸은 과연 멀쩡한지부터 떠올렸다. 올해 초 그가 이제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고 알려왔다. 사실상 의사가 판정한 날로부터 조금 더 흐른 뒤였다. 그가 잘 이겨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달 전쯤 보러 간 그는 미디어로부터 저절로 학습된 그런 시한부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에게 무언가를 묻는다는 것이 어려웠다. 그는 평소대로 농담을 쳤고, 그날 함께 그를 찾은 우리 중 누구 하나 슬픈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익숙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일종의 관성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그를 마지막으로 보고 온 뒤로는 그에게 안부를 물을 수도 없었다. 그게 꼭 그의 부고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느낌 같아서 어떤 죄책감마저 들었는데, 그렇다고 뭘 해볼 수도 없는 시간이었다. 대체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떤 못에 깊숙이 찔린 것은 알지만 너무 둔해서 통증을 느끼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의 죽음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래서 그와 나의 삶이 잠시 겹쳤던 그 시간들이 어떤 의미였는지 느끼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언젠가 한 영화에서 예정된 슬픔을 기다리는 인물에 몰입하다가 공포를 느낀 적이 있는데, 지금 나는 딱 그 인물이 된 것 같다. K가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나서 무력하게 그의 부고를 기다린 그 시간처럼, 이제 나는 오늘 그로부터 선고된 어떤 슬픔을 무력하게 기다려야 한다. 그 통증은 내 몸에 여러 개의 못이 더 박힌 뒤 어렴풋이 알게 될 것이다. 서울에 도착했을 때 나는 거의 기진맥진해있었다. 가만히 앉아있었던 게 다인데,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역시 더위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