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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잔. 기차는 고양이 왕국으로 - 6(完)

잠에서 깨었을 때 열차는 천천히 속력을 줄이며 종착역에 들어서는 중이었다. 객실 안은 훈훈한 온기가 감돌았다. 창밖은 옅은 어둠이 깔려있었고, 부슬비인지 싸라기눈인지가 창문을 적셨다. 열차는 곧 묵직한 관성과 함께 완전히 멈추어 섰다. 노부부는 주섬주섬 보자기를 챙겨 제일 먼저 객실을 나갔고, 소녀는 잠이 덜깬 표정으로 가방을 챙겨 휘청휘청 통로를 걸었다. 나도 그들을 따라 짐을 챙겨 객실을 나서는데 무언가 잊은 기분이 들었다. 다시 등을 돌려 객실을 훑었지만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무언가 망각의 늪으로 빠져든 것이 분명했지만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뭐, 기분 탓이겠지......' 대합실은 붐볐다. 대부분이 보따리를 한아름 짊어진 노인들이었고, 틈틈이 양복을 차려입은 회사원과 교복을 입은 여학생 서너명이 보였다. 오래된 브라운관 TV는 약간의 노이즈와 함께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현재 전국적으로 폭설 주의보가 내린 상황이며......" TV소리는 열차 시간을 알리는 방송과 사람들의 수다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어정쩡하게 벽에 기대어 팔장을 꼈다. 시멘트 벽은 싸늘했지만 못견딜정도는 아니었다. 마중을 나오기로 한 제럴드를 기다리며 멍하니 유리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제법 굵어진 눈송이는 유리문에 부딪혀 조금씩 녹아 흘러 내렸다. 플랫폼으로 열차가 들어선다. 대합실의 사람들이 서둘러 열차에 오른다. 그들 사이로 단발 머리의 여자가 열차에서 조심스레 내려선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케이지가 들려있다. 그 속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신기하게도 그녀가 낯이 익다......

서른 일곱 잔. 기차는 고양이 왕국으로 - 3

"총각. 이거 하나 잡숴." 노인은 소나무 껍질처럼 갈라진 손으로 귤 두 개를 건넸다. "아, 네. 감사합니다." 엉겁결에 받아든 귤은 몹시 따뜻했다. 노인은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인 채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였다. 깊게 패인 주름 사이로 금방이라도 송진같은 무언가가 새어나올 것 같았다. 누군가 부탁한 것도 아닌데 노인은 분주하게 귤을 나누어주었다. 하지만 입구에 앉은 여자는 노인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무안해진 노인은 옆자리에 귤을 놓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운동회 달리기에서 꼴찌를 한 소년처럼 풀이 죽은 그를 노부인이 엄마의 미소로 달래었다. '그래, 그래. 넌 최선을 다했어.' 랄까? 노인이 건네준 귤이 차가워질 때 즈음, 차장이 객실로 들어왔다. 그의 제복 곳곳에서 눈이 녹아 흘러 내린다. 노인은 차장에게 귤을 권했고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와 손을 함께 내저었다. 그렇게 노인은 또 한 번 뼈아픈 거절을 맞봐야 했다. 차장은 풀이 죽은 노인의 모습에 잠시 망설였지만 귤을 받아 들진 않았다. "으흠. 손님 여러분, 우선 사죄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정체가 오래될 것으로 보입니다."
창작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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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여섯 잔. 기차는 고양이 왕국으로 - 2

끼이이익! 귀를 찢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관성이 몸을 덮쳐왔다. 나는 앞으로 쏠리는 몸을 겨우 가누며 주위를 살폈다. 70은 더 되어보이는 노부부가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서로의 손을 꼭 잡았고, 교복을 입은 여학생은 안고 있던 고양이를 달랬다. 한 자리 건너 앉아있던 샐러리맨은 자리에 일어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입구에 앉은 단발의 여자는 묵묵히 창 밖을 볼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급정거에 대한 걱정보단 객실을 감도는 묘한 긴장감에 가슴이 뛰었다. 긴장감 가득한 적막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어둠 그 자체였다. 어둠과 적막.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사고. 며칠 전 보았던 b급 스플래터 무비(Splatter Movie)가 떠오른다. 여행을 떠나던 6 명의 대학생들이 짙은 안개에 갇혀 살인마에 의해 차례차례 살해되는 영화였다. 여느 b급 스플래터 무비(Splatter Movie)처럼 어색한 특수분장과 무식한 살인방법이 러닝타임의 반 이상을 차지했다. 영화 속에서 사람의 몸은 폭력에 의해 철저히 분해되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기억에 남는 것은 금발 미녀의 커다란 가슴 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온다. 손으로 창문에 낀 서리를 닦아내자 선두에서 반짝이는 희미한 불빛이 보인다. 입구에 앉은 단발머리의 여자도 저 불빛을 보고 있는 것일까? 10분정도 지나자 누군가는 기다렸을 법한 안내방송이 흘러 나왔다. "저희 열차는 다음 역인 XX역에서 발생한 갑작스런 사고로 인해 잠시 정차하도록 하겠습니다. 손님 여러분들께 많은 심려와 불편을 끼쳐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젠장!’

서른 다섯 잔. 기차는 고양이 왕국으로 - 1

"현실(現實)은 상상(想像)과 상상(想像)의 경계에 존재한다네. 그 경계를 벗어났을 때, 마침내 이야기는 시작되는 걸세. 어쩌면 자네도 경계를 벗어난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네. 기억은 못하겠지만...... " - 제럴드와 나누었던 대화들 中에서 - 기차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커브를 돌았다. 싸늘한 냉기가 열차 안을 맴돈다. 걸어두었던 코트를 몸에 걸쳐보았지만 냉기는 발 아래부터 확실히 기어올라왔다. 참다못해 '목도리라도 두를까?' 생각했을 무렵, 차장이 들어왔다. 그는 주위를 한번 둘러본 후 몇 번이나 연습했을 법한 맨트를 낭독했다. "현재 기계적 결함으로 인해 난방장치가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조속히 수리를 할 예정이오니 불편하시더라도 많은 양해 부탁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사를 마친 그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은 채 다음 칸으로 이동했다. 그와 함께 들어온 냉기만이 홀로 남아 객실을 뛰놀았다. 코트를 당겨 여미고 머리를 창가에 기댔다. 뿌연 서리 탓에 창 밖의 풍경은 아련히 멀게만 느껴졌다. 손으로 살며시 창문을 닦아 보았다. 손바닥만한 틈 사이로 새까만 나무들이 기차의 불빛을 받아 기괴하게 반짝였다. 잠시나마 투명했던 작은 틈은 다시 뿌옇게 물들기 시작했고, 그 사이로 보이는 나무는 더 이상 나무가 아니었다. 그저 희뿌연 무언가……. 실루엣만이 옅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