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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놓친 민족주의의 비극

1.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사관학교에도 '교환학생' 제도가 있다. 다른 말로는 위탁교육/수탁교육이라고 하는데, 한국 생도를 해외로 보내는 것은 위탁이요, 반대로 해외 생도가 한국 사관학교로 파견되는 것은 수탁이라고 한다. 현재 내가 강의를 나가는 공군사관학교에는 태국, 알제리, 베트남, 일본, 터키, 몽골 등에서 온 수탁생도들이 교육을 받고 있다.어제는 이 수탁생도를 대상으로 하는 "한국어" 강좌의 첫 날이었다. 내가 맡은 반에는 알제리, 태국, 베트남, 일본 생도가 들어온다. 일본 생도를 제외한 셋은 4년 풀타임으로 한국에서 학업을 수행하고, 일본의 경우에는 3학년 때 1년 동안만 한국에 머무른다. 어제 만났던 일본 생도도 지난 금요일에 막 한국에 들어왔노라고 했다. 아직 한국어가 많이 서툰 편이라서, 나와 그 생도는 한국어, 영어, 일본어를 마구 뒤섞어가면서 국적불명의 대화를 했다."그런데 왜 한국으로 왔나요?""한국, 일본, 가깝습니다. 그런데, 아... 서로, much trouble, 에... idea가, 생각이, 다릅니다. 달라서, 공부합니다. 한국 사람 생각, 공부합니다."한국과 일본은 가깝다. 하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무척 나쁘다.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의 생각하는 바도 너무나 다르다. 나는 그게 궁금했다, 과연 한국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가? 그것이 알고 싶어서 한국에 오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그러면서 이 생도가 해준 이야기는 나를 일순 부끄럽게 만들었다. 자기가 한국에 와서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먼저 들은 이야기는 이것이었다고 한다. 고작 1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독도는 한국땅이다." 2. 박유하 선생의 <제국의 위안부>가 출판금지 가처분을 당했다. 여기에 대해서 긴 말은 않으련다. 왜냐하면 긴 말을 할 가치도 없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학문적 성과에 대한 판단은 학계가 하는 것이 옳고, 그 과정은 법적 절차가 아니라 토론과 비판이라는 공론장의 절차를 거치는 것이 맞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든 간에 한 학자의 학문적 성과를 법적 잣대로 재단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폭거다. 문제는 이런 폭거를 한국사회가 '아무렇지 않게' 용인하고 있다는 점이다.내가 정말로 놀란 점은, 정작 박유하 선생 자신은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그 어떤 논란에도 자신의 목소리를 낼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점이다. <제국의 위안부>를 주제로 한 각종 토론이나 서평 등에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참고인(?)인 저자는 자신의 입장을 말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말하자면 애초에 건전한 토론이나 비판을 수행할 의지도, 생각도 없었다는 뜻이다.단지 중요했던 것은 <제국의 위안부>가 얼마나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을 건드리고 있는가를 재단하여, 이를 처단하는 일뿐이었다. 한국의 언론과 여론, 나아가서는 사법부까지도 일관되게 이 방향으로 움직여갔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현상인지, 사람들은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다. 인류의 근현대사를 통틀어서 이런 일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된 경우는 많지 않은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1930년대의 나치 독일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가 더 있다.바로 군국주의 시대의 일본이다. 3. 백색테러가 또 하나 터졌다. 이번에는 사태가 좀 크다. 미국 대사가 습격을 당했다. 습격을 행한 범인은 과거 일본 대사에게도 콘크리트 뭉치를 던져서 구속된 전력이 있는 사람이었다.미 대사가 습격을 당한 원인은 뚜렷하다. 얼마 전 미국이 한-일 관계에 대하여 과거사 청산을 언급했던 것 때문이다. 말하자면 과거사 문제에서 미국이 일본의 손을 들어준 셈이 되었다. 실제 의도야 어찌되었든,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런 맥락으로 읽힐 여지가 다분하다.이 사건으로 명확해진 것이 하나 있다. 한국 사회의 민족주의는 이미 제어 불가능한 상태로 폭주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입국한 일본 생도에게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날선 외침이 던져지고, 위안부 문제를 민족 차원보다는 규율권력에 의해 타자화된 여성의 관점에서 보자던 학자의 주장이 출판금지 가처분을 당하고, 일본의 입장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한 국가의 대사가 백주대낮에 습격을 당한다.한때 우리는 민족주의라는 것을 일종의 금과옥조로 여겼다. 근현대사를 돌이켜보면 이것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기도 하다. 36년의 식민지 통치를 견뎌내고, 뒤이은 분단의 현실을 극복하게끔 만든 정신동력으로서 민족주의는 뚜렷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우리에게 민족주의라는 것은 타인(외국인)에 대한 멸시를 합리화하거나, 다양성에 대한 부정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거나, 지성에 대한 멸시를 쿨함으로 여기거나, 혹은 권력자가 시민들의 눈을 가리워 자신의 지지도나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지 오래다. 한국사회를 건실한 방향으로 이끌어나가고자 했던 지난 시절의 동력은 어디론가 소산되어버리고 말았다.

정직하게만은 살지 말거라

1. 임진왜란 당시 왜적의 세력이 거세지자 선조는 황급히 경복궁을 떠나 북으로 도주했다. 경성의 민심은 흉흉했고, 일각에서는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실제로 선조는 도망가는 것이었고, 여차하면 압록강을 넘어서 명나라 땅으로 망명할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남도지역 곳곳에서는 진작에 지리멸렬해진 관군들 대신 의병이 일어나서 왜군에 맞서 싸웠다. 누구나 한번쯤 이름은 들어보았을 법한 곽재우, 김덕령, 조헌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왜군을 상대로 용감하게 싸웠고, 그 중 조헌과 같은 이들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왜군의 보급로를 끊는 데 일조하여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하지만 전황이 안정되고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선조는 이 의병들이 혹시나 자신을 상대로 '거병'하지 않을까 하는 의혹에 시달렸다. 마침 김덕령이 역모에 가담했다는 혐의가 제기되었고, 조정은 올타꾸나 하고 김덕령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하여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곽재우 역시 이 역모에 연루된 혐의가 있다 하여 투옥되었으나 대신들의 간청으로 간신히 목숨만은 건진 채 석방되었다. 반면 선조를 따라서 '도망'갔던 대신들은 왕을 끝까지 옆에서 모셨다면서 전후에 '호종공신'이라는 이름으로 공신 반열에 오른다. 목숨 걸고 싸웠던 의병들이 역적 혐의를 뒤집어썼던 것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기가 막힌 일이다. 이런 조정의 태도 덕분에, 정유년 왜군의 재침 때에는 의병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나라를 위해서 자신을 버리고 싸워봐야, 왜군에게 죽든지, 아니면 살아남더라도 자기 임금 손에 죽게 되리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2.

NeoValley #1 (창작소설)

한밤중에 출동 통보를 받았을 때, T형사는 경찰서 옥상 한켠에 숨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는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불법이 된지 제법 되었다. 도시 곳곳에는 다양한 드론들이 불법 흡연자를 잡아 내지만, 정작 경찰서 주변은 형사들의 개인 정보가 유출된다는 이유로 드론 사용이 제한되어 있었다. 덕분에 T 형사는 가끔 경찰서 옥상으 로 올라와 몰래 담배를 피우곤 하는데, 오늘도 막 불을 붙이고 첫모금을 깊게 빠는 순 간, 그의 손목과 바지속 호주머니속 스마트폰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폭발 사고 신 고 접수. 네오밸리(NeoValley) 28번가 퓨처넥스트(FutureNext) 본사 사옥 M블럭 5층. 특수수사대 소속 현장수색팀 파견 중. 긴급 출동 할 것. - 반장" 메시지를 확인 하고도T는 한동안 옥상에서 움직이지 않았다.그는 담배를 끝까지 다 피운 후 구두 밑 바닥에 담배를 비벼 끈 후,작은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고 담배꽁초를 집어넣었다.그 리고 자리로 내려가 책상 옆에서 단단하게 생긴 금속 가방을 챙겨 들고 차에 올랐다. 자동차문 손잡이를 잡는 순간 운전자 인증을 마친 자동차는 곧바로 자동운전으로 전환되 어 사고 현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퓨처넥스트는 첨단기업들이 모인 이곳 네오밸리에서도 손에 꼽히는 기업이다. 네오 밸리는 너무나 비대해진 실리콘밸리를 떠난 기업들이 하나 둘씩 모이고, 그 주변으로 또 다른 벤쳐 기업들이 생겨나면서 지난 20년 동안 급격하게 팽창했다. 워낙 철저하게 치 안을 유지하는 도시 중 하나여서 주로 마약이나 불법 매춘, 아니면 산업스파이나 금융, 특허 사기 등의 범죄들이 일어나는 곳이라 폭발 사고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T는 이미 수색 중인 자료들을 보려고 했지만 업로드된 정보는 접수된 사건 기록 뿐이었다. 어느새 1층 주차장에 도착한 T는 가방을 들고 M블럭으로 갔다. 이미 1층에는 다 른 경찰들이 모여 있었다. T는 예의바르게 중정모를 벗어 손에 들고, 손목에 찬 퓨처웨 어를 통해 신원 확인을 한 후 건물로 들어갔다. 퓨처넥스트는 경찰청에도 손목에 차는 스마트기기 퓨처웨어를 공급하고 있었다. 폭발로 인해 엘리베이터는 운행이 정지되어 있 었다.할 수 없이 그는 무거운 가방을 들고5층까지 걸어서 올라갔다.폭발 사고는5 층 한 켠에 유리로 된 방에서 일어난 듯 했다.T는 수색팀 팀장을 찾아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가방을 열었다. 가방 속에는 검은색 드론 '팔콘아이(FalconEye)' FX-3가 들어있었다. 수색팀이 쓰는 것보다는 한참 구형 모델이다. 수색 팀장은 그의 드론을 힐 끗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중절모를 쓰고 옅은 카키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덩치 큰 형사가 낡은 드론 하나를 들고 나타난 모습을 보고는 그의 경계심도 풀려 버린 것이다. 수색팀장은 자기들은 이미 1차 수색을 마쳤으니, T에게 현장을 어지르지 나 말라며 T의 출입을 허락했다. T는 드론을 가동시키고 폭발 사고가 일어난 방으로 움직였다. 폭발이 일어난 유리 방은 피해자 J의 집무실이었다. T의 발밑에 무언가 찌그덕 소리가 나며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퓨처넥스트 M본부 글로벌 마케팅 리서치 3팀, J'라는 명패가 T의 발밑에 찌 그러져 있었다. T는 주변을 둘러봤지만 수색팀은 이미 팀장과 함께 수색 결과를 놓고 무언가 논의 중이었다. 급히 나온 퓨처넥스트 직원인 사람도 두엇 보였다. 폭발은 방 한 쪽 구석에 있는 J의 책상에서 일어난 듯 했다. 책상은 넘어져 있었고 방은 온통 컴 퓨터와 각종 자료들의 파편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폭발의 충격으로 방을 둘러싼 유리 는 모두 깨져있었다.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J의 시신이었다. J는 폭발로 인해 몸이 두 동강 나 있었다. 허리부분이 끊어져 상반신는 천장에 부딪힌 후 바닥에 유리파편과 함께 떨어져 있었고, 하반신은 의자와 책장 더미에 깔려 있었다. 현장 곳곳이 피칠갑이 되어 있었다. 바닥에 엎드려 한 쪽 뺨을 바닥에 댄 채 고개를 돌린 형체로 누워있는 J의 얼 굴 역시 이마에서 빰까지 피로 얼룩져 있었다.J는 눈은 똑바로 뜨고,입은 굳게 다문 채였다. T는 드론에게 현장의 피를 검사하게 했다. 공중에서 비디오로 현장을 기록하던 드론은 무작위로 현장의 피를 채취해 즉석에서 성분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바로 나왔다. T는 반장에게 결과를 첨부하여 메시지를 보냈다. "피해자 J 혈액검사 결과, 휴머노이드로 판단. 혈액은 퓨처넥스트의 인공 혈액으로 판정. 식별 코 드 없음.J의 모델명 불명.내일 다시 퓨처넥스트 탐문 수사 진행하겠음.-T"T는 메 시지를 보내고 다시 J의 부서진 바디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얼굴이나 몸을 보아서는 영락없는 인간이다. 휴머노이드는 목뒤나 왼손 손등에 자신의 모델명과 식별 코드를 명시 해야 함에도 그런 표식이 없었다. 명백한 불법이다. 끊어져 버린 신체 단면을 자세히 살피자 그제서야 혈관처럼 보이게 만든 미세한 괌섬유들과, 인공 척추가 눈에 띄였다. T는 드론을 다시 가방 속에 넣고 현장을 나왔다. 다음날 아침 T는 다시 M블럭을 찾았다. 1층 안내데스크에서 T는 중정모를 벗고, 자기 신분을 밝힌 후, HR담당자를 불러 달라고 했다. 잠시 기다려달라는 말에 중절모를 들고 소파에 앉으려는 찰라 누군가 T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T형사님, M블 럭 홍보담당 B입니다. 궁금하신 사항은 저를 통해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나는 HR담당과 얘기를 하고 싶은데요." 그러나 B는 폭발과 같은 큰 사고가 일어난 터라 언 론을 포함해서 모든 대외적인 내용은 홍보팀에서 전담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기사를 쓰려고 온게 아니라 폭발 사고를 수사하려고 온겁니다. 한밤중이지만 사상자가 나 온 걸로 보아 테러일 가능성도 있고, 또." T가 말을 이어나가는데 B가 중간에 말을 자 르고 사상자는 없었으며 휴머노이드의 결함으로 추정되는 폭발 사고라고 다시 말했다. 한 밤중에 J가 무언가 놓고 온 것을 가져가려고 사무실에 들렀는데 갑작스런 결함으로 폭발 사고가 난 것 같다는 것이다. 현재 퓨처넥스트 연구소에서 바디를 수거해 폭발의 원인을 찾고 있으며, 워낙 정교하게 만들어진 바디여서 자신들도 처음 겪는 일이지만 곧 원인을 규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 J는 퓨처넥스트에서 만든 휴머노이드가 맞군요? 모델명 이 어떻게 되나요? 왜 자사의 휴머노이드를 직원으로 채용해서 쓰고 있는거죠?" 그러나 B는 더이상은 기밀 사항이어서 말씀 드릴 수 없으며 이미 이번 사건은 어젯밤 J의 바디 를 수거하면서 자연폭발사고로 처리되었으며, 수색팀도 모두 철수하고 5층 역시 이미 정 리를 마쳤다는 말을 전했다. "그럴수가." 결국 T는 아무런 수확도 없이 건물을 나와 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반장 역시T에게 사건은 종결 되었으니 그만 손을 떼고 서로 돌아오라고 했다. 반장은 다소 누그러진 말투였지만 완고했다. 폭발이 있었다고는 하나 인명사고도 없었고, 별다른 테러의 징후도 없는 이상, 퓨처넥스트가 폭발 원인만 밝히면 끝이라는 것이다. "내 말 들어, T 형사. 아마도 퓨처넥스트는 실험용 휴머노이드를 만 들어 직원으로까지 고용해서는 뭔가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던거 같아. 왜 휴머노이드라는 걸 숨겼는지까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그것까지 알 필요도 없지. 퓨처넥스트도 더 이상 수 사를 원치 않고,아무런 보상도 원하지 않아.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더이상 없어. 그만 들아와."

세 번째 군사 쿠데타

1990년 10월, 국군 보안사령부에 근무하던 한 이등병이 탈영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탈영 사건인 것처럼 보였지만, 이 이등병의 탈영은 한국 근현대사의 지형도를 크게 - 그것도 비극적으로 - 바꿔놓았을지도 모를 사건을 막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대통령 직선제가 선포되었고, 비록 3당 합당이라는 야합으로 인해 다소 빛이 바래기는 했어도, 최초로 국민의 직접투표를 통해서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하지만 노태우는 전두환과 함께 12.12 쿠데타를 일으켰던 주역이었고, 설령 국민투표에 의한 결과라 해도 쿠데타의 주인공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문제가 많았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집권 3년차인 1989년, 12.12 당시 쿠데타의 핵심세력었던 국군 보안사령부는 제2의 쿠데타를 기획하게 되었다. 다만 이번 쿠데타는 정권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의 정권을 더욱 공고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의 '친위쿠데타'였다. 즉 1987년의 직선제 개헌을 무효화하고, 다시금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여 전두환 정권 당시의 정치적 장악력을 확보하려는 것이 이 친위쿠데타의 기본 골자였다. 하지만 쿠데타를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먼저 '잠재적인' 방해세력들을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1987년의 6월 항쟁에서도 증명된 바지만, 야당 정치세력과 종교계, 학술계가 연합하여 대응할 경우 제아무리 친위쿠데타를 일으킨다 하더라도 무위로 돌아갈 확률이 컸다. 이를 위해서 각종 재야인사를 비롯, 쿠데타에 잠정적인 위협이 되리라 예상되는 이들을 쿠데타 이전에 전격 검속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청명계획'이었다. 이 '청명계획'을 발동시키기 위해, 재야 계열의 민간인들에 대하여 보안사령부는 본격적인 사찰을 개시했다. 그 중에는 훗날 대통령이 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의 정치인이나, 김수환 추기경이나 문익환 목사와 같은 종교인들, 그 외의 여타 여러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보안사에서 근무하고 있던 윤석양 이병은 이와 같은 쿠데타 기도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청명계획'에서 검속 대상으로 지목된 447명에 대한 자료(디스켓 30장)를 들고 탈영했다. 그는 이 자료를 폭로했으며, 이로 인해서 도상 훈련까지 마친 상태였던 친위쿠데타는 실행 직전에 저지당하고 말았다. 검속 대상으로 지목된 김대중 등의 정치인들은 보안사령부 해체와 관련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단식에 들어갔고, 야당과 대학생들은 노태우 정권 퇴진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서평] 가장 인간적인 노동을 위하여, <굿 워크(Good Work)>

직장인들에게 노동이란 무엇일까? 아마 우리나라 대다수의 직장인들은 노동이란 그저 생계 수단일 뿐이라고 답할 것이다. 쉽게 말하면 돈 벌이, 밥 벌이인 것이다. 반복적인 업무, 권한은 없고 책임만 있는 업무,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상사와 부하직원, 위에서는 누르고 밑에서는 치고 올라온다는 중간 간부, 매년 얼토당토 않게 떨어지는 목표, 달성해도 제대로 올라가지 않는 임금, 계속해서 적체되는 진급, 동료인지 경쟁 상대 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 끊임 없는 부서간의 알력다툼 등 직장인의 애환은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다. 한편으론 이런 노동에 대한 질문조차 사치인 사람들도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청년 실업자와 비정규직, 그리고 시간제 근무를 하는 사람들이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직장이 힘든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니 어디든 날 필요로 한다면 빨리 일을 구했으면 하고, 비정규직이나 시간제 근무직은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모르는 불안감에 노동의 의미를 따질 겨를 조차 없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다들 먹고 살기 위해 발벗고 있는 힘껏 일하는데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그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서만 일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현대 사회는 노동의 피로로 인해 사람들이 삶을 보살피고 되돌아볼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이것은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를 가리지 않는다. 그러면 질문을 조금 달리해 보자. 현대사회의 노동이 삶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노동자는 누구나 노동의 댓가로 많든 적든 급여를 받는다. 급여를 많이 받으면 그만큼 삶의 질이 높고 삶에 대한 만족이 커질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현재 한국사회에서 급여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자신의 업무에 만족하는 직장인은 그리 많지 않다. 이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가리지 않는다. 독일에서 태어난 경제학자 E. F. 슈마허(Ernst Friedrich "Fritz" Schumacher, 1911 - 1977)는 그 이유를 합리성에 기반한 비인간적인 노동, 더 나아가 비인간적인 산업, 경제 체계 때문이라고 보았다. 흔히 경제학자라고 한다면 인간의 합리성에 기반해 수 많은 통계와 그래프를 통해 경제가 돌아가는 원리를 설명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슈마허는 숫자보다는 인간성과 도덕에 기반하여 경제 원리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었다. 슈마허는 개개인의 특성에 맞추지 못하고 정해진 표준대로 일해야만 하는 비인간적인 노동이 바로 경제성에 기반한 대규모화 때문이라고 보았다. 기술의 발달과 값 싼 화석 연료의 등장은 인류에게 전에 없던 폭발적인 생산량의 증가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슈마허의 눈에 그 것은 결코 축복이 아니었다.

비평이란 무엇인가? (속)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아는 불세출의 뮤지션이 있다. 그들은 한때 전설적인 밴드 ‘비틀즈’의 멤버로서 함께 활동했고, 비틀즈가 해체한 후에도 각자 자신의 음악세계를 펼치면서 세계 대중음악사에 그 이름을 길이 남겼다. 바로 폴 메카트와 존 레논이다. 두 사람은 같은 비틀즈 멤버였지만, 비틀즈 해체 이후 걸었던 길은 사뭇 달랐다. 폴 메카트니가 대중들의 감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수많은 히트 넘버들을 발표했던 반면, 존 레논은 뮤지션이라기보다는 한 명의 ‘행동가’로 활동하면서 음악을 통해 반전과 평화의 정신을 퍼뜨리고자 했다. 당시 존 레논의 행보는 눈에 띄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입국을 거부하자 캐나다와의 국경지대에 커다란 가설무대를 만들어놓고 수만 명을 모아서 공연을 벌이는가 하면, 국가라는 명목 하에 청년을 전쟁터로 내모는 세태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대중적으로도 많은 인기를 얻었던 곡 <Imagine>은 그러한 존 레논의 생각을 가감없이 드러낸 노래이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폴 매카트니에게로 쏠렸다. 같은 비틀즈 멤버였던 존 레논이 저렇게 반전과 평화를 위해서 전위에 나서고 있는데, 어째서 폴 메카트니는 유치한 사랑 노래 따위나 만들면서 여전히 상업적인 음악만 추구하고 있는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누구든 고개를 주억거릴 만한 비판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당시 폴 매카트니의 행보는 존 레논의 그것에 비하면 ‘초라했다’. 존 레논처럼 자신의 삶 전체를 내던지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 또한 전 비틀즈의 멤버이자 여전히 세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뮤지션으로서, 존 레논과 마찬가지로 뭔가 세계에 기여할 수 있을 만한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하게 된다.

비평이란 무엇인가(미생 그리고 송곳)

# 지난번 학기 중에 있었던 일이다. 수업시간에 1학년 학생들을 상대로 '비평문 쓰기'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여러분들도 잘 아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두고 이야기해볼게요. 개인적인 의견이라는 전제를 먼저 깔고 말합니다. 아프면 청춘이 아니라 환자죠. 제 개인적은 판단은, 오늘날의 청년계층이 겪고 있는 어려움들에 대해서 구조적인 문제는 도외시한 채, 그저 개인이 잘하면 된다, 열심히 하면 잘 될거다, 라는 식의 자기계발서는 마약과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측면도 생각해봐야 해요. 이런 <아프니까 청춘이다> 따위의 책을 보고서도 위로를 받는 사람은 분명히 존재하거든요. 그럼 그 사람들이 잘못된 경험을 한 것이냐? 그건 아니죠. 누군가에게는 똥덩어리일지라도 누군가에겐 따스한 손길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부류의 자기계발서들은 또 나름대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죠.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마약도 마약 나름대로 쓸모가 있어요. 진통제로 쓰이는 모르핀도, 사실은 마약 성분입니다. 그래서 일정량 이상을 투약할 수 없게 되어있어요. 모르핀 중독에 걸리거든요. 하지만 마약 성분이라고 해서 모르핀 자체를 못쓰게 하면, 환자들은 가혹한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겠죠. 잠시 고통을 잊게 만들어주고, 그 동안에 재빨리 치료를 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의료잖아요. 그런데 우리 사회의 문제는 이런 거에요. 마약이 싫은 사람은 모르핀도 안된다고 그래요. 모르핀을 맞는 사람은 진통제만으로는 치료가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아요. 한쪽은 그저 고통을 직시하라고 하고, 다른 한쪽은 무작정 고통을 외면하려고만 해요. 그리고 서로 절대 상대방의 말은 듣지 않죠. 그게 여러분이 비평문을 쓰는 게 어려운 이유에요."

땅콩리턴과 오자병법

대한항공의 땅콩리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뉴욕 JFK 공항에서 출발하는 대한항공 비행기 1등석에 타고 있다가 마카다미아 너츠를 봉지째 내 놓았다는 이유로 승무원을 큰 소리로 나무라고, 사무장에게 비행기에서 내리라고 지시해 이미 비행을 위해 게이트를 닫았던 비행기가 되돌아가 사무장을 하선시켰다. 항공사 오너라고 할 지라도 비행기에 탄 이상 한 명의 승객일 뿐인데 서비스를 과도하게 질책하고, 심지어 비행기를 되돌려 사무장을 내리게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월권 행위다. 승객들을 안전하게 이송해야 할 책임이 있는 기장은 운항 내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이것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조현아 전 부사장은 온갖 비난의 화살을 맞았다. 그런데 일이 점점 더 커졌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물론 조현아 본인도 언론에 나와 사과를 했지만, 짜여진 각본대로 진행한 사과 따위로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항공법 위반에 대한 수사가 이루어지면서 증거를 인멸하려 한 시도가 계속 포착되었다. 각 신문 1면에 사과문을 개재했지만 스스로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면서 더 큰 비난을 들었다. 여기에 조현아 전 부사장의 동생인 조현민 전무는 이번 사건이 어느 누구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대한항공 임직원 모두의 잘못이라며 불난 집에 스스로 부채질을 하고 있다. 밖에서 이 사건을 보고 있으면 도대체 대한항공이 왜 이렇게 악수를 계속해서 두고 있는지 의아할 만 하다. 애초에 매뉴얼대로 서비스한 직원에게 막말을 하고, 사무장을 하선시키고자 비행기를 되돌리고, 사무장과 승무원의 존엄성을 짓밟은 것은 물론 동승한 모든 고객들의 시간을 빼앗았고, 기장에게 불필요한 부담과 스트레스를 주어 안전운전을 위협한 것 등 항공사 부사장으로써는 할 수 없는 행패를 부려 당사자와 이용객들에게 죄송하다고 자신의 잘못을 확실하게 짚어가며 진정성 있는 사과 한 번이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대한항공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아마 조현아 전 부사장은 여전히 자신이 무엇을 잘못 했는지 전혀 모르고, 자기가 왜 수사를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자기가 왜 이렇게 비난을 받고 있는지도 전혀 모를 것이다. 그 사람에게 대한항공은 자기 가문의 소유물이며 자신이 이어받을 집안의 재산이며, 당연히 대한항공에서 일하는 임직원들이란 자기네들의 경영활동에 필요해서 아깝지만 어쩔 수 없이 고용하는 머슴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 대한항공은 자신의 왕국이고, 한진그룹은 아버지와 가문의 제국일 것이다. 왕인 내가 내 왕국에서 머슴들을 벌 주고, 비행기를 좀 돌렸다 한들 무엇이 잘못인가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비단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영자가 노동자와 고객을 하찮게 대했기 때문에 잘못이 아니라, 그것이 정말 왕조 시대에 자기 왕국이라고 할 지라도 자기 나라의 근간인 백성을 혹독하게 대해선 안되기 때문에 잘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