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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 원종우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 / 원종우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이 책은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제목만 보고 집어 든 책이다. 공대생으로써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제목이었다.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라니.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과 물리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고 실험인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섞어놓은 제목만으로도 내 지갑을 열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 기대만큼이나 즐겁고 재미있게, 마치 놀이를 하듯이 순식간에 읽어버린 책이다. 이 책은 짧은 SF 소설 여덟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이한 점은 소설의 앞과 뒤에 각각 소설 속에 나오는 과학적 내용과 아이디어에 관한 간단한 설명이 앞설과 뒷설이라는 이름으로 엮여 있다는 사실이다.(+저자의 농담과 유머도 함께 들어있다.) SF 소설 속에 나오는 과학적 내용에 대해 어려움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SF라는 장르에 입문하기에 아주 좋은 구성이다.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SF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던 것 같다. 과학을 모르면 SF 소설을 읽을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오해 말이다. 그러나 SF 소설을 실제로 몇 편 읽어본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스파이가 나오는 소설을 읽을 때 스파이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어야만 소설을 즐길 수 있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저자는 여러 가지 과학적 소재들을 서사와 엮어 풀어놓았다. 제목에 나오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노화, 인공지능과 튜링 테스트, SF라면 빠질 수 없는 광속 우주선과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까지. 현대 과학이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는 과제들이 이루어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미래의 한 단면을 날카롭게 캐치해서 보여준다. 이번에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느꼈지만 SF 소설은 Science Fiction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음에도 흔히 생각하는 Science와는 거리가 먼 어떤 지점들을 건드린다. 무한한 삶이라는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하는가, 혹은 과학의 발전, 문명의 발전을 위해 인류가 아닌 종의 생명을 희생시켜도 되는가 등등. 세상의 작동 원리를 파악한다는 어찌 보면 순수하기까지 한 과학의 의미 자체와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이는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욕망과 윤리와 가치 판단의 기준들을 꺼내 뒤흔든다. 현재는 맞닥뜨릴 일이 없는,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인류가 맞닥뜨리게 될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내려야 할 결단을 미리 경험하고 체험하도록 만든다. 과학계에 종사하고 있지만 가끔 잊어버린다. 과학이 사실 너무나 많은 것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과학은 경제, 정치, 사회, 문화, 윤리, 산업 전반에 걸쳐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이번 코로나 사태만 봐도 생명 과학 기술로 만들어진 키트 하나가 정치, 외교, 경제 곳곳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SF 소설은 바로 그 부분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과학은 인간이 있는 이상 세상의 작동 원리를 파악하는 순수한 학문으로써 남을 수 없다는 부분을 말이다. SF 소설에서 과학이 인간의 다양한 욕망을 드러내는 소재로써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이유다.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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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초상>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 제임스 조이스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책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 <율리시스> 일 것이다. 그 문학성과 더불어 난해함으로도 유명한 그 책은 의식의 흐름 기법에 작가 자신이 창조해낸 새로운 단어와 신화의 서사, 상징, 비유를 버무려 만든 영문학의 최고 걸작 중 하나다. 뿐만 아니라 조이스는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의 대표 작가이기도 하다. 당시의 모더니즘 문학을 주도했으며 현대의 포스트 모더니즘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내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게 된 건 조이스의 작품 중에 그나마 읽어볼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을 대표하는 조이스의 소설을 한 번쯤 읽어보고 싶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단편보다는 장편을 좋아하는지라 단편집인 <더블린 사람들>을 제하고 너무 허들이 높아 보이는 <율리시스>와 <피네간의 경야>를 제하자 남은 게 바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었다. 작품을 읽은 감상은...... 못 읽을 정도는 아니지만 읽기 어려운 건 사실이었다.(<젊은 예술가의 초상>도 이 정도인데 <율리시스>나 <피네간의 경야>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읽는 걸까.) 사실 읽기 어려운 것 치고 소설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주인공인 스티븐 디덜러스의 성장기이다. 주인공의 어린 시절부터 성장한 주인공이 가정에서 떠나는 시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린 시절 명문 쿨롱고우스 학교에 다니던 스티븐은 가세가 기울며 학교를 그만두고 더블린의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러나 그의 안타까운 사정을 딱하게 여긴 한 신부가 또 다른 명문 벨비디어 학교에서 스티븐이 수학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곳에서 종교와 하느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 좋은 수학 태도와 성적을 보여준 스티븐에게 벨비디어의 교장이 성직자의 길을 제안하지만 스티븐은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는다. 어느 순간 자신의 길이 창조적인 예술가가 되는 것임을 깨달은 스티븐은 자기 나름의 이론적 무장과 준비를 마치고 자유로운 예술가의 삶을 살기 위해 가정과 더블린과 조국 아일랜드를 떠난다. 그리 어렵지 않고 간단한 스토리임에도 널뛰기를 하듯 현실과 과거와 미래, 그리고 주인공의 의식을 쉴 새 없이 넘나드는 서술 기법 때문에 읽는 것이 쉽지 않다. 그에 더해 생소한 아일랜드의 역사와 당시의 시대 상황 및 종교적 상황을 모르면 해석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기반 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그나마 수월하게 읽어 나갈 수 있다.(1장을 읽고 나서 책 뒤에 있는 아일랜드 역사 개요와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 아일랜드에서 종교가 가지는 의미를 다 찾아서 머릿속에 집어넣은 뒤에 2장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한 어려움을 상쇄시킬만한 장점이라고 한다면 문장과 묘사,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러운 서술을 들 수 있겠다. 굉장히 탐미적인 문체가 책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상세하고 직관적인 묘사(특히 지옥에 대해 신부의 입을 빌려 묘사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그 부분만은 정말 빠져들듯이 읽었다.)가 매우 뛰어나며 시점과 화자와 시간대와 인물의 내외부 의식이 쉴 새 없이 바뀌면서도 끊기는 부분 없이 자연스럽게 서술되는 글의 흐름은 감탄을 자아낸다.(읽는 독자조차도 언제 시간이나 시점이 바뀐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과거 얘기인 줄 알고 읽고 있는데 이상해서 앞으로 돌아가 보면 이미 한 페이지 전부터 현재 얘기로 다시 돌아와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사람의 생각의 흐름을 이토록 자연스럽고 어색하지 않게 서술하는 것 자체가 매우, 엄청나게 힘든 일이다. 개인적으로 소설의 초반부와 후반부는 나름 재미를 느끼며 읽었다. 어린 스티븐이 어린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어른들의 세계와 종교적인 관점들은 흥미로웠고, 청소년이 되어 처음으로 창녀촌에 가서 여성과 관계를 맺은 스티븐이 하느님의 규율을 어겼다는 죄책감을 느껴 지옥에 갈 것을 두려워하며 고해성사를 하는 모습은 꽤나 귀여운(?) 구석도 있었다. 후반부에 예술가로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스티븐이 여러 철학자와 종교인들의 사상을 공부해 자신만의 이론을 정립하고 꿈과 자유를 위해 집과 조국을 떠나는 장면은 스티븐의 정신적 성장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특히 스티븐이 말하는 자신의 생각과 그가 중점적으로 다루는 아퀴나스의 사상은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던 영역을 건드려 지식과 생각의 영역을 확장시켜 주기도 했다.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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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김영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 김영하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죽은 걸까? 아니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을까? 아니면 어딘가 다른 엘리베이터에 끼어서, 텅텅거리며 남자의 몸을 치고 튕겨 나오기를 반복하는 엘리베이터가 주는 통증을 감내하면서, 아직도 육층과 오층 사이에서 자신을 구해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이 소설집에서 가장 재미있게, 빠져들듯이 읽었던 건 단연 표제작인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이다. 주인공은 회사에 출근하려다 엘리베이터에 끼어 육층과 오층 사이에 걸쳐진 사람을 발견한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를 본체만체 지나치는 사이 갈등하던 주인공은 엘리베이터 밖으로 튀어나온 남자의 발을 건드려본다. 남자는 아직 살아 있었다. 주인공은 자신도 회사에 늦었기에 내려가면서 경비에게 말하거나 119에 신고해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곳을 떠난다. 그러나 계속해서 평범한 일상에 생기기 힘든 일들이 겹친다. 핸드폰이 없는 주인공이 119에 신고하기 위해 핸드폰을 빌리려 하지만 아무도 빌려주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끼었다는 남자의 말은 더더욱 믿어주지 않는다. 체념하고 회사에 가서 119에 신고하기 위해 버스를 탄 주인공. 그러나 버스는 사고가 나고 다음으로 탄 버스에서는 주인공이 치한으로 몰린다. 결국 중간에 버스에서 내려 30분을 달려 회사에 도착한 주인공. 그러나 아침에 면도기가 부러질 때부터 느꼈던 불운은 주인공이 다른 여직원과 함께 탄 엘리베이터가 멈추게 만들고 만다. 회사에 늦고, 멈춘 엘리베이터에 갇히고, 겨우 탈출했지만 구두를 잃어버리고, 부서 회의에 늦은 데다 신랄하게 까이고. 하루 종일 온갖 불운을 겪은 주인공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엘리베이터를 확인하지만 육층과 오층 사이에 끼어있던 남자는 사라져 있었다. 남자는 궁금해한다. 도대체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기묘한 현실의 판타지는 시작부터 책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김영하 작가는 이런 작품을 참 잘 쓴다. 현실에 무언가 핀트가 어긋난 비현실을 툭 던져 넣고는 나는 비현실이나 판타지 따위 생각도 해본 적 없다는 듯이 뻔뻔하게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데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현실과 비현실의 뒤섞임이 매력적인 서사를 만들어낸다. 표제작인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는 누가 봐도 비현실적인 일들을 그럴듯한 현실로 포장한다. 누군가 엘리베이터에 끼어 있어 목숨이 위험하다면 119에 신고하는 게 당연하지만 출근에 바쁜 사람들은 아무도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나마 관심을 보이는 주인공도 자신의 출근 시간이 바빠 119에 신고해주겠다는 말만 남기고 엘리베이터를 떠난다. 그 뒤에 나오는 다른 인물들도 주인공의 난처한 상황이나 불운한 사정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다.(한 명쯤은 관심을 보일 법도 한데 말이다.) 엘리베이터에 함께 갇혔던 여직원은 주인공의 희생으로 탈출하고도 엘리베이터에 갇혀 있는 주인공의 사정을 경비에게 알리는 간단한 일조차 하지 않는다. 온갖 불운으로 거지꼴이 된 주인공의 행색을 본 부서 사람들은 그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미팅에 늦은 주인공의 시간관념과 부족한 주인공의 발표 내용을 질책한다. 현대인도 이런 현대인들이 없다. 자신의 일이 아니면 철저히 신경 쓰지 않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안온함만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극단을 달리는 사람들만이 출현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 정도는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과 함께 묘한 불안감이 들었다. 이미 우리의 세상은 이 지경까지 가버린 것이 아닐까. 내가 알지 못하는 시야 밖에서는 이런 일들이 이미 팽배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가슴 한편에 의문들과 함께 생겨나는 불안감이 씁쓸했다.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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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최근 읽은 세계 고전 중에, 아니 지금까지 읽은 모든 고전 중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다. 환상과 허구, 현실과 진리에 대한 탐구가 엿보이는 깊은 사고와 아이디어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데 그 하나하나가 경탄스럽다. 왜 그동안 보르헤스의 소설을 읽지 않았었는지 시간이 아까울 정도다. <픽션들>을 읽으면서 과학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에 이번 리뷰에서는 과학에 대한 나의 생각과 엮어서 글을 써보려고 한다.(배운 게 과학밖에 없기도 하고 말이다.) 먼 과거,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발생설을 주장했다. 적절한 환경만 주어지면 무(無)에서 생명체가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자연발생설은 당시 정설이자 진리로 여겨졌다. 제대로 된 자연과학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과학적 실험이란 당연히 없었던 시대, 썩은 고기에서 구더기가 생기고 쓰레기에 벌레가 생겨나는 것을 본 사람들에게 자연발생설은 너무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결과였다. 자연발생설은 몇 백 년간 진리로 받아들여지다 루이 파스퇴르의 백조목 플라스크 실험(두 플라스크를 잇는 아래로 볼록한 관에 물을 채워 완전히 밀폐된 공간을 만들어내 생명체는 자연발생하는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이 진행되고 나서야 비로소 무너진다. 과학은 자연발생설의 성립과 쇠퇴와 같은 과정을 계속 반복한다. 지금 우리가 진리로 받아들이는 모든 과학적 사실들은 언젠가 사실이 아님이 밝혀질 것이다. 인간은 그 시대의 지식수준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만큼만 현실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에서 빛은 입자이자 파동이라고 말한다. 두 성질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몇십 년 혹은 몇 백 년 뒤면 빛이 입자이자 파동이라는 사실조차 잘못된 해석이었음이 밝혀질지도 모른다. 가장 최신의 과학적 진리조차 언젠가는 그것이 환상이었다고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과학적 해석들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당시의 지식수준으로는 그것이 진리였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멀리서는 사람처럼 보이던 형체가 가까이서 봤을 때는 그저 나무 한 그루일 수도 있는 것처럼 우리가 빛을 입자이자 파동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지금의 수준으로는 나무를 10 km 떨어진 거리에서 볼 수밖에 없기에 내린 결론일 수도 있다. 인간은 진실을 추구하고자 한다.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본능이 존재한다. 그 때문에 인간은 과학을 통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해석하고 그 원리를 알아내려고 하지만 사실 우리가 살고 있고 존재하고 있는 이 우주의 작동 원리, 진리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우주의 원리를 알아내려고 하는 것은 영원히 열 수 없는 상자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맞추는 것과 다름없다. 흔들어보고, 소리가 나나 들어보고, 음파를 쏴서 되돌아오는 반향을 통해 내부를 추측해보기도 하고, 과학을 이용해 상자 안을 어느 정도 꿰뚫어 볼 수 있는 기구를 만들어 내부에 들어있는 것을 목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온갖 방법으로 상자 내부를 추측하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과정을 통해 내부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결론 내리겠지만 우리는 우리가 내린 결론이 맞는지 영원히 알 수 없다. 상자는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다른 말로 하자면 답을 영원히 알려주지 않는 문제를 푸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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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밀란 쿤데라

<농담> / 밀란 쿤데라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농담>은 말 그대로 한 농담으로 시작된다. 이 소설은 하나의 농담이 단순한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누군가의 별 뜻 없던 말 한 마디에 프레임과 이념의 시각이 씌일 때, 한 인간의 삶 전체가 어떻게 역사의 잔인한 농담 속으로 끌려들어가는지 보여준다. 1948년 2월(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가 일어난 시기다.) 이후의 첫 해, 체코의 청년인 루드비크 얀은 모범적인 사회주의자였다. 자신도, 주위의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개인주의자 같다거나 지식인 냄새가 난다거나 하는 모두의 평가에 한 줄 쯤은 들어가는 비판은 있었지만 말이다.) 루드비크는 젊었고 당연히 아름답고 순진했던 마르케타라는 여학생과 사랑에 빠진다. 루드비크는 방학 기간 중 마르케타와의 연애 사업을 진전시켜보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지만 마르케타는 그 기간 동안 당 교육 연수에 참가해버린다. 마르케타로부터 당 교육 연수가 너무나 기대되고 신난다는 편지를 받은 루드비크는 연수 때문에 훼방받은 연애사업과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마냥 신나 있는 마르케타로 인해 삐지다 못해 질투심에 활활 타오른다. 결국 마르케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 루드비크.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질투심으로 별 생각 없이 보낸 이 농담 한 줄은 이후 15년이 넘는 세월 동안 루드비크의 인생을 삼켜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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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사적인 초능력> 장강명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 / 장강명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은 이전에 리뷰했던 <산 자들>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판된 책이다. <산 자들>과는 전혀 다른 결의 소설집인데 주로 SF 혹은 판타지로 분류될 법한 중단편 소설 10편이 실려있다. 분량은 몇 페이지짜리 아주 짧은 엽편부터 100 페이지가 넘는 중편도 실려 있는데 각 소설들의 다양한 주제, 서사, 소재 등을 보는 맛이 있는 소설집이었다.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건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이었다. 유대인들이 통치하는 알래스카에서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이 재판을 받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체험공유장치'라는 기계가 등장한다. 이 기계는 사람의 체험을 다른 사람과 연동시켜 직접 타인의 경험을 겪어볼 수 있게 해 주는 기계다. 그 당시 자신의 위치에 있던 사람은 그 누구라도 자신과 같이 행동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아이히만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에밀 벤야민과 아이히만이 각자의 체험을 '체험공유장치'를 통해 2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끝난 이후의 몇 년 동안까지 서로 공유하기로 한다. 유대인들은 체험을 공유한 이후, 벤야민이 당당히 일어서 아이히만의 경험을 나도 모두 겪어보았으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는 그저 비열한 악인일 뿐이다 라고 말하리라 믿지만 과연 결과는 어땠을까? 사람 간의 완전한 소통과 이해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요즘 들어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의 의미를 상대방이 인지하고 이해하리라고 믿지만 과연 그것이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을 옮긴 문장을 읽는 사람이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나는 인간의 소통은 불완전하다고 믿는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말과 글과 행동을 받아들이기 마련이며 상대방이 하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인간은 자신의 육체에 갇혀 있고 상대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나 인간은 다른 인간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고 우리는 그 불완전한 소통을 조금 더 완전하고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에 대한 완전한 공감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조금씩 더 나은 인간이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공감성이 높은 사회라면 뉴스에 나오는 온갖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은 정반대의 질문을 내놓았고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은 인간이 인간을 완전히 이해하는 일이 일어날 때 그것이 온전히 좋은 일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내 가족이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교통사고를 낸 가해자가 느끼고 있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커다란 죄책감과 절망을 내가 온전히 체험할 수 있다면, 그래서 도저히 그 가해자를 비난할 수 없게 되고 만다면 내 슬픔과 적의와 분노는 어디로 향해야만 하는 것일까. 향할 곳을 찾지 못한 그 어두운 감정들이 결국 내 안에 쌓이고 쌓여 나를 절벽 밑으로 떠밀어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심지어 가해자에게 가해질 법적 처벌조차 그가 겪는 죄책감과 절망을 겪은 내가 보기에 너무나 크고 부당한 처사라고 생각되어 버린다면, 법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어진다. 절대적인 선악과 법이 사라지고 모든 일들에 대해 서로의 감정과 경험의 비율을 통해 상대적으로 적용되는 새로운 규칙이 생겨나야 하는 걸까?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을 읽고, 나는 인간이란 존재가 불완전한 소통과 완전한 소통 사이의 어느 부분에서 균형을 잡아야 할 것인지 고민하게 되고 말았다.(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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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떡볶이> 요조

<아무튼, 떡볶이> / 요조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저번에 읽은 <아무튼, 망원동>에 이어 두 번째로 아무튼 시리즈를 읽게 되었다. 제목은 <아무튼, 떡볶이>. <아무튼, 떡볶이>에 실린 글에 대해 설명하자면 '아무튼 떡볶이에 관한 글이다'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부모님과의 희한한 외식 이야기나 부산 여행, 혹은 한가로운 동네 마실기로 시작한 글은 요상한 루트를 통해 떡볶이로 아무튼간에 도달하고 마는데 그 희한하고 신기한 루트가 전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그러니 <아무튼, 떡볶이>라는 제목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글은 찾기 힘들지 않을까. 아무튼 각설하고, 이 책은 가수이자 책방 주인이자 팟캐스트 진행자이자 작가인 요조가 떡볶이라는 음식과 얽힌 자신의 이야기와 경험, 생각들을 짧은 글들로 풀어낸 책이다. 몇몇 글은 도대체 여기서 어떻게 떡볶이 이야기가 나온다는 거야?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읽다 보면 어느새 구렁이 담 넘어가듯 떡볶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다. 책에 실린 글들에서 가장 먼저 느껴지는 건 저자의 떡볶이에 관한 애정이다. 떡볶이가 등장할 때마다 애정을 듬뿍 담아 그 맛과 자태와 특징과 색과 식감과 그 외의 모든 요소들을 조목조목 묘사하는 문장을 보고 있노라면 저자가 좋아한다는 어슷 썰지 않은, 동그랗게 썰린 밀떡이 떡볶이 양념에 푹 절여진 채 눈 앞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는 듯하다.(덕분에 나는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떡볶이를 책을 읽는 동안 두 번이나 먹었다. 책의 중간쯤에 나오는 <소림사를 향해 걸었다>라는 글을 읽고 자정이 넘어가는 한밤중에 한 번,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한 번.) 이 책은 떡볶이를 통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건넨다. 비건 떡볶이에서 출발해 동물 보호의 이야기로 넘어가기도 하고 단골 떡볶이집에서 시작해 주변인에 대한 관심, 도시화된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변하기도 하며 맛없으리라고 지레 무시했던 떡볶이집에서 겪은 완벽한 떡볶이에 관한 일화는 편견과 선입견에 대한 일침이 되어 양심을 푹 찌르기도 한다. 나는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얇은 책이 던지는 질문들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은 채 떡볶이를 먹으며 고민했다. '사람은 누구나 먹고 싶은 걸 선택할 권리가 있지. 그런데 왜 비건들은 누군가와 식사를 할 때마다 눈치를 봐야 할까? 동물들에 대한 폭력적인 사육 방식과 인간의 편익 추구는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걸까? 동물권과 인간의 편익을 함께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내 옆집에 누가 사는지, 매주 가는 식당의 아주머니는 몇 살인지 알고 있나? 고독사와 같은 안타까운 일들을 막으려면 주변에 조금 관심을 가지는 게 좋겠네. 간판으로 떡볶이 맛을 판단하는 것처럼 인간도 인간을 외모로 판단하는 세상이야. 어떻게 하면 외모에 대한 편견을 없앨 수 있지? 아니지, 나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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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 로버트 A. 하인라인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 / 로버트 A. 하인라인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이제 한국에서도 SF 소설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요즘 주목받고 있는 한국 SF 소설들의 힘 덕분일 수도 있고 자연스러운 유행의 변화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과학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기쁠 따름이다.(어린아이들에게 SF 소설은 과학자의 꿈을 길러주기 마련이니까.) 점점 발전해가는 한국 SF 소설계의 흐름에 발맞춰 오랜만에 SF 소설을 한 번 읽어볼까 하고 집어 든 책이 바로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이었다. 이 소설의 저자인 로버트 A. 하인라인은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C. 클라크와 함께 SF 문학의 3대 거장으로 불린다. 이 소설의 가장 뒷부분에 나오는 작품 해설 및 역자 후기 부분을 보면 아시모프는 SF를 통해 박학다식과 위트를, 클라크는 SF에 과학적 엄밀성과 철학적 깊이를 더했고 하인라인은 뛰어난 스토리텔링으로 SF의 재미가 무엇인지 보여줬다고 한다.(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자젤>이란 작품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박학다식은 몰라도 위트 하나는 확실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하인라인의 대표작인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을 읽고 가장 먼저 남은 감상은 아쉬움이었다. 그것도 과학적 깊이나 오류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SF의 '재미' 부분에서 다가오는 아쉬움이라 안타까웠다. 소설의 주인공은 킵이라는 남학생이다. 이제 곧 대학을 가야 할 나이의 킵은 달에 가겠다는 꿈을 가지고 달 여행을 상품으로 건 비누 회사의 표어 선발 이벤트에 5,000 여장의 표어를 보내지만 중복 당첨이 발생할 경우 가장 먼저 표어가 도착한 사람에게 달 여행 기회를 준다는 규칙에 의해 달 여행의 기회가 아니라 중고 우주복(실제로 우주인이 우주에서 입었던)을 받게 된다. 언젠가 달에 가겠다는 의지로 우주복을 고치고 닦아 새것처럼 만든 킵은 대학에 갈 돈을 벌기 위해 우주복을 팔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만 입어보자는 생각으로 동네 들판에서 우주복을 입고 교신 장치를 건드리며 논다. 그때 갑자기 잡힌 신호에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응답을 보낸 킵. (이런 소설에서는 으레) 당연하게도 우주선이 착륙하고 킵은 납치당한다. 지구를 지배하려는 외계인 벌레 머리에게. 끔찍하게 생긴 벌레 머리는 엄마 생물이라는 외계인(킵에게 우호적이며 엄마 생물이라는 명칭처럼 가까이 가기만 해도 마음이 포근해지는 생명체다.)과 피위라는 여자 아이도 함께 납치한 상태였다. 킵과 피위 그리고 엄마 생물이 힘을 합쳐 벌레 머리에게서 탈출하는 우주 활극이 소설의 주 내용이다. 벌레 머리에게서 킵과 피위, 엄마 생물이 힘을 합쳐 탈출하는 내용이 소설의 중후반까지 쭉 이어진다. 탈출과 좌절의 반복이 계속되는데 솔직히 말하면 이 부분에서 그리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보통 재밌다고 느끼는 장르 소설들의 경우 서사에 이끌려 쉴 새 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되곤 하는데 이 소설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자야 되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못 덮겠어!"가 아니라 "자야 되니까 덮고 내일 보지 뭐." 하는 느낌이랄까. SF 3대 거장이라 불리는 작가의 대표작이라 너무 기대를 한 탓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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