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Following
0
Follower
0
Boost

가을 주말, Old Black Joe

새벽부터 인간 따위는 애초에 고려하지 않은 듯한 찬바람이 휘이잉 현장을 휘몰아치며 오늘도 세상은 이러니 너는 어쩔거냐고 언성을 높인다. 주말이라고 세상이 다르지 않아 오늘도 나의 의견 따위는 진즉부터 고려되지 않는 변화무쌍한 금일의 작업내용이 내 앞에 놓이고, 그런 변이에 대하여 갑측에 이런 무분별하고 독단적인 작업지시가 얼마나 큰 불합리가 되어 이 공사의 투입대비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나도 한참동안 저 쪽으로 언성을 높이고, 거기에 따른 예상하지 못했던, 알아서 하슈. 따위 때문에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현실적인 괴리가 오늘 새벽 찬바람만큼의 통증으로 지나간 후, 쓴 입맛 다시고 의자에 앉으면 방금 쓰디쓰던 모닝커피가 문득 달게 느껴진다. 그제서야 나는 사무실 창가에 시드는 나뭇잎에서 이 세상의 조간신문을 읽는다. 가을이 깊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오늘 신새벽 출근길에서 만난 찬바람 한 자락이 그저 찬바람 한 자락이었을 뿐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통하여 가을이 깊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것은 찬바람 한 자락이 가진 서사(敍事 : 어떤 줄거리를 가진 사건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거나 설명함)가 어느 정도인지 내가 이미 부지기수로 경험하였기에 잘 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주가 그렇고 세상이 그렇고 삶이 그렇듯이 나의 의견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매번 매순간 저들끼리의 관계와 관계 사이에 놓인 조건들로 인하여 변화무쌍하게 요동친다. 나도 가만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것을 다 알고 포용할 수 없기에, 무심코 그저 내 뜻대로의 순리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한다. 그리고 멈칫거리지 않고 가차없이 일을 밀어붙인다. 이게 옳은 일이다 저것은 그른 일이다. 이 세상은 순간을 사는 사람이 그런 한가로운 잣대를 들고 오랫동안 서 있을 만한 곳이 아니다.

조울증 대처법

우선 유념해 둘 게 하나 있는데, 이 풍경은 지금 두 마리의 눈 먼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있다는 거야. 알았지? 다음은 좀 더 디테일한 지정학적 상황인데, 어려운 얘기는 아냐. 그 수레가 절벽 위를 굴러가고 있다는 거지. 비관적인 생각은 하지 마. 결과론이지만 어쨌든 심심하지는 않다는 거잖아? 그리고 그것을 인지한 순간, 거주할 공간은 조증(躁症)과 울증(鬱症) 사이로 국한되는데, 선가(禪家)에서는 이것을 희마(喜魔)와 비마(悲魔)라고 한다더군. 이것도 그러고 보니 하는 말이지만 결국 기쁨도 악마고 슬픔도 악마란 이야기인데, 무슨 괜찮은 해결방법이 있지 않겠느냐고? 잘 알아둬. 이럴 때는 그 소가 흰 소든 검은 소든, 다정하게 생긴 소든 험상궂게 생긴 소든, 정결한 소든 더러운 소든, 혹은 소가 아니라 해도 다 마찬가지란다. 눈 먼 짐승에게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 닿을 수 있는 얘기라니? 문제가 생기면 보험처리 안 되고, 만약 그 자리에 퍼진다면 대책이 아예 없다는 거지. 측면 에어백 있냐고? 진짜 측면 에어백 터지는 소리 하고 있네. 그렇게 너무 겁먹은 표정일랑 짓지 마. 그런 표정 같으면 그게 죽은 표정 보다 더하니까 차후 가장 치욕적인 일이 죽을 일 밖에 더 있겠어? 그러나 반드시 소리를 지를 수 있게 목청은 좀 틔우고 있어야 한단다. 이거 안 되면 진짜 갑갑한 일이 되거든. 아득한 절벽 위에서 눈 먼 소 두 마리가 가끔 한 번씩 필 받아 무작정 우두두두 내달릴 때면, 내달려도 전후 좌우 상하 구분없이 마구 내달릴 때면, 할 말은 그저, 주여 이것들이 미쳤나이다, 미쳐도 진짜 단단히 미쳤나이다, 하며 어금니 꽉 깨물고 냅다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참, 잊어버린 말이 하나 방금 생각났는데 말이지. 소들이 필 받아 우두두두 무작정 내달릴 때는 눈을 항상 꼭 감고 있어야 한단다. 그래야 거길 지나왔어도 지나온 거고, 거길 못 지나 왔어도 결국은 지나온 것이 되는 것이니까 말이야

사랑, 그 영원한 착각에 대하여

우리가 구태여 사랑에 관한한 이 세상의 모든 경우를 총합한 최고의 원칙을 찾아보자면, 사랑은 원래 상대에게 마음을 비우는 것이며. 따라서 상대에게 아무 것도 원하지 않으며, 상대적으로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것으로 해도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자주 착각하는 것은, 이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조건 손 놓고 가만 있는 것으로 인식을 하는 일이다. 그러나 사랑에 있어 실제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일은, 실은 그 전에는 없던 어떤 '빈자리'를 만드는 일이며, 내 안에 ‘빈자리’를 만드는 일은, 말이 좋아서 그렇지 내 마음에 전에는 없던 커다란 빈 구멍을 뚫어 만들어야 하는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 전에 듣도보도 못했고 자신이 만난 적이 없는 제 자신의 마음 속 이 빈구멍을 어찌하면 좋은가? 사랑에 관해 무엇이라도 해서 그 빈 구멍을 채워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하는, 사랑의 그 무위를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다시 역설적으로 사랑을 망치는 한이 있더라도, 구태여 사랑에 관해 무언가를 하려는 사족의 노력을 할 수 밖에 없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에 관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천박한 오해와 실수는 ‘사랑에 관해 무언가를 하는 것’ 자체는 아니다. 사랑을 망치는 가장 큰 원인은, 그 ‘무언가를 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과 혼동하는 일이다. 예컨대 ‘사랑’이라는 단서를 걸고 이러저러한 기대와 요구를 하거나, 의무나 권리 등을 내세우는 어리석은 짓들이다. 이러한 인간의 인간답지 못한 유감스런 사태에 대하여, 시몬 베유는 이렇게 말했다.

불화에 대하여

내가 오늘도 푸른 생명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세상과의 불화 때문에 그랬다. 세상과 나의 불화는 어쨌든 그리하여 내가 죽어서도 이 세상을 떠날 수 없으며, 설령 제까짓 몸이 여기를 떠났다한들 나의 뼈라든가 영혼 따위도 이곳 말고는 딴 데를 아는 바 전혀 없으므로, 나는 또 떠나지지 않는 이 빙충맞은 물리로 하여금 세상 어느 구석에서든지 숨어서 똥을 눌 수 있고 오줌도 쌀 수 있으며, 그리고 벌떡 일어나 바지 올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세상 나대다가, 똥 뭍은 개로써 겨 뭍은 개를 욕할 수 있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화 속에서는 그런 지속적인 결례를 세상에 범해놓고도 이토록 뻔뻔할 수 있어지는 것이며, 양심의 가책이란 것이란 것은 아예 책 안에나 존재하는 거지, 집 없는 거지처럼 바깥으로 나올 일 없는 것이다. 진정 이 더운 팔월이라도 깊은 밤엔 오만 뼈가 다 시리는, 이 추운 세상 바깥으로 나올 일 전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야 그래지는 것이다, 그래짐으로써 그래지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세상의 불화는 어쨌든 그것이 우리들 겉눈으로는 그렇게 비천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래도 그것은 궁극의 내가 일용할 양식이며, 내 생명의 감로수인 동시에 그 감로수를 배출할 똥이며 오줌인 것을, 내가 어쩌다 그 외의 다른 무엇을 깜박 잠시 잊었다한들, 그게 무슨 쥐꼬랑지만한 죄로 환산될 계산기가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세상 위에서 그 무엇이 잘못되는 경우란 것이 과연 여기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지, 세상 위에 사는 생명 치고 죄 없다할 그 무엇이 있는지, 그러므로 오늘 허섭스레기에 불과한 한 인간이, 결국은 편치 않을 부유와 안락을 자신 인생의 지고지순한 가치로 삼아버린, 모래보다 더 버석거리는 그 가시방석 위에서의 안온함과 편안함으로, 결국은 내일을 버리고 오직 오늘만을 머리터지게 묵상하는 꼴을 나는 목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불화는, 내가 이 세상 위에서 무엇을 투영해 볼 수 있다고 장담하는 눈이며, 이 세상에 무엇을 창출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손이며, 그것도 자유라고 세상 밖 어디로 나아가 진보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발이므로, 그것은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오히려 그 눈이 있어 나를 세상 어둡게 보게 만드는 그늘이 될 수밖에 없어지는 것이며,

사람 죽어 될 만한 것

세상 사는 일이 아무리 하답답하더라도, 내가 죽어 개망초꽃 한 송이라도 된다면... 이라는 부류의 말은, 설령 그것이 빈말이라고 해도 개망초꽃이 들을 만한 큰소리로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절대 개망초꽃이 될 수 없으며, 그 말을 하기 전에 우선 개망초꽃이 자신을 다시 한번 이 세상에 꽃 피우기 위해, 저 추운 들판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무엇을 감내하고 있는지부터 알아보라. 사람의 능력으로 그것은 몇 번을 거듭 죽어도 결코 이룰 수 없는 그런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매미 한 마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는 더욱 세상에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아예 7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동안 몇 번의 우여곡절 환골탈태를 거친 후에라야, 딱 한 달 동안만 울 수 있고 그 후로는 영원히 폐기 처분을 해야 하는 날개를 가진다 하지 않던가? 그것은 환골탈태라는 것이 고작 머리카락 몇 개 검다가 희어지는 동안 이 세상에 호의호식하며 사는 것을 고통이라 여기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한 고통 너머의 고통일 뿐, 사람 죽어 이 세상에 될 만한 그 무엇은 아무 것도  없으며, 그저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될 확률이 가장 높다. 그게 그러니 거기 틀림없이 적중할 말 한 마디가 문득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