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오늘도 푸른 생명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세상과의 불화 때문에 그랬다. 세상과 나의 불화는 어쨌든 그리하여 내가 죽어서도 이 세상을 떠날 수 없으며, 설령 제까짓 몸이 여기를 떠났다한들 나의 뼈라든가 영혼 따위도 이곳 말고는 딴 데를 아는 바 전혀 없으므로,
나는 또 떠나지지 않는 이 빙충맞은 물리로 하여금 세상 어느 구석에서든지 숨어서 똥을 눌 수 있고 오줌도 쌀 수 있으며, 그리고 벌떡 일어나 바지 올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세상 나대다가, 똥 뭍은 개로써 겨 뭍은 개를 욕할 수 있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화 속에서는 그런 지속적인 결례를 세상에 범해놓고도 이토록 뻔뻔할 수 있어지는 것이며, 양심의 가책이란 것이란 것은 아예 책 안에나 존재하는 거지, 집 없는 거지처럼 바깥으로 나올 일 없는 것이다. 진정 이 더운 팔월이라도 깊은 밤엔 오만 뼈가 다 시리는, 이 추운 세상 바깥으로 나올 일 전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야 그래지는 것이다, 그래짐으로써 그래지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세상의 불화는 어쨌든 그것이 우리들 겉눈으로는 그렇게 비천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래도 그것은 궁극의 내가 일용할 양식이며, 내 생명의 감로수인 동시에 그 감로수를 배출할 똥이며 오줌인 것을, 내가 어쩌다 그 외의 다른 무엇을 깜박 잠시 잊었다한들, 그게 무슨 쥐꼬랑지만한 죄로 환산될 계산기가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세상 위에서 그 무엇이 잘못되는 경우란 것이 과연 여기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지, 세상 위에 사는 생명 치고 죄 없다할 그 무엇이 있는지, 그러므로 오늘 허섭스레기에 불과한 한 인간이, 결국은 편치 않을 부유와 안락을 자신 인생의 지고지순한 가치로 삼아버린, 모래보다 더 버석거리는 그 가시방석 위에서의 안온함과 편안함으로, 결국은 내일을 버리고 오직 오늘만을 머리터지게 묵상하는 꼴을 나는 목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불화는, 내가 이 세상 위에서 무엇을 투영해 볼 수 있다고 장담하는 눈이며, 이 세상에 무엇을 창출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손이며, 그것도 자유라고 세상 밖 어디로 나아가 진보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발이므로, 그것은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오히려 그 눈이 있어 나를 세상 어둡게 보게 만드는 그늘이 될 수밖에 없어지는 것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