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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찬 상영중] 기생충 - 이것은 빈부격차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파이프(로 보이는 물체)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놓음으로써 많은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 <이미지의 반역(배반)>이라는 그림이다. 정말 그럴까? 이 그림을 그린 르네 마그리트의 사유를 차용해 물질적 속성을 따지자면, 이 이미지는 '그림'이라기보다는 <이미지의 반역(배반)>이라는 '그림'을 스캔한 '컴퓨터 파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리는 철학자' 르네 마그리트는 언어와 대상, 대상과 대상을 재현한 이미지, 언어와 이미지의 연결은 자의적이므로 얼마든지 단절되거나 자유롭게 재구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대상이 통념상 있음 직한 공간을 벗어난 생경한 장소에 위치하고, 현실에서라면 한 프레임 안에 있는 것이 불가능한 대상들이 공존하는 그의 그림들은 나태한 사고를 깨부순다. 생각의 한계를 무너뜨린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회화는 당대를 뒤흔들었고, 후대의 다양한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블랙코미디, 스릴러, 가족 드라마 등 하나의 영화 안에서 함께 존재하기 어려운 다양한 장르적 요소가 뒤섞여 장르를 규정하기 힘든 영화 <기생충>을 본 후, 현실의 경계를 파괴하는 파격적 미학을 선보인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반역(배반)>이 떠올랐다. 르네 마그리트가 회화 예술의 관습을 격파했듯이 봉준호 감독은 영화 장르의 틀을 붕괴시켰고, 언뜻 누가 보아도 빈부격차가 핵심인 것 같은 <기생충>에 빈부격차 자체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가정 형편이 극단적으로 차이나는  두 가족이 등장한다. 두 가족은 사는 곳이 정반대다. 잇따른 자영업 실패로 궁지에 몰린 기택(송강호) 가족은 누추한 반지하집에 살고, 성공한 IT기업 CEO인 박사장(이선균) 가족은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대저택에 산다. 햇빛이 잘 들어올 리 없는 기택의 반지하집은 대낮에도 어둑하고, 채광이 끝내주는 박사장의 대저택은 실내에 있어도 비타민D를 합성할 수 있을 만큼 자연광이 풍부하게 들어온다. 기택 가족은 고기는커녕 한끼 제대로 챙겨 먹기도 힘들지만, 박사장의 부인 연교(조여정)는 짜장 라면에 한우 채끝살을 넣어 먹는다. 박사장 집에 사는 강아지들이 기택 가족보다 영양 상태가 훨씬 더 좋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이 두 가족 간의 극심한 격차는 영화 플롯의 변곡점이 되는 비 오는 밤 시퀀스에서 극적으로 표현된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계단을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기택 가족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수직적 계급 사다리가 연상된다. 가난한 자는 달동네처럼 높이 올라가야 하거나, 반지하처럼 깊이 내려가야만 하는 곳에서 자신의 거처를 마련할 수 있다. 물론 부자도 지대가 높은 곳에 사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부자는 가난한 사람처럼 좁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지 않고, 기사가 운전하는 고급 승용차에 앉아 잘 닦인 도로를 따라 집에 도착한다. 이처럼 빈부격차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설정과 상징이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기생충>이 진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빈부격차가 아니라는 생각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기생충>에는 부자와 빈자가 함께 등장하는 영화라면 으레 기대할만한 부자에 대한 부정적 묘사가 없다. 영어를 섞어서 말하는 박사장의 부인 연교와 기택에게서 불쾌한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박사장이 재수없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경제적 계급 격차를 다룬 여느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부자들처럼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 부를 일군 사람들이 아니다.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폭언이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자신들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정당한 돈을 지급하고, 속마음은 다를지 몰라도 최소한 겉으로는 예우한다. 기택의 부인 충숙(장혜진)이 술에 취해 박사장 가족의 인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돈이 다리미야. 돈이 주름살을 쫘악~ 펴줘."라고 말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기생충>은 빈부격차의 '현상' 자체는 실감 나게 보여주지만, 빈부격차를 타파하고 경제적으로 더 평등한 사회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하는 영화는 아니다. 돈을 매개로 엮인 박사장 가족과 기택 가족의 관계는 빈부격차를 문제시하기보다 빈자와 부자 간의 상호의존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박사장 가족은 굳이 자신들이 직접 하지 않아도 될 출퇴근 운전, 집안일, 자녀 교육을 자신들보다 더 잘 처리해주는 사람에게 기꺼이 대가를 지불한다. 박사장 가족에게 귀찮고 시간 낭비에 불과한 일들을 대신해주는 기택 가족은 요긴한 존재다. 한편, 박사장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임금은 기택 가족이 당장 먹고살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돈이다. 박사장 가족과 기택 가족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다.

[절찬 상영중] 바이스 - 무법자가 아닌, '무(無)권력의 권력자'

인간이 준수해야 할 합의된 규칙들 중 법(法)은 가장 강제력의 수준이 높다. '뭘 이런 것까지 법대로 해야 해?'라고 푸념하게 되는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만큼 법망은 촘촘한 듯 보이지만, 언제나 그물코를 빠져나가는 물고기는 있다. 법도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완벽할 수 없으므로 법망에 잡히지 않는 사람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완전무결한 법칙일지도 모른다. '나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며 자화자찬하는 사람을 주의해야 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양심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교묘하게 법의 손길을 피하거나 법의 허점을 이용하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법 없이도 양심에 따라 살 사람'이 아니라 '법이 있어도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법을 대놓고 무시하면서 멋대로 행동하는 '무법자'와는 다르다. 무법자가 법과 정면충돌을 불사하는 막무가내라면, '법이 있어도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은 법전을 양손에 올리고 저글링을 하는 곡예사에 가깝다. 영화 <바이스>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샘 록웰)의 부통령이었던 딕 체니(크리스찬 베일)가 어쩌면 법망의 틈과 틈 사이를 자유자재로 노닌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바이스>의 각본가이자 감독인 아담 맥케이는 은밀한 권력자였던 딕 체니라는 인물의 행적을 제대로 묘사하기 위해 정말, 진짜 최선을 다해 조사했지만 한계가 많았다고 실토한다. 결국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후에도 관객은 딕 체니가 부통령 재임 당시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백악관을 좌지우지했는지, 그래서 미국과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명확한 그림을 파악하기 힘들다. 딕 체니는 보통 실질적 권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미국 부통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지만 막강한 권력에 따르는 명시적 책임과는 늘 거리를 유지한 것으로추측될 따름이다. 단일정부론(unitary executive theory)이라는, 어쨌든 나름의 논리를 갖춘 법이론과 그 이론을 주창하는 법학자를 뒷배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딕 체니는 무법자가 아닌, '무(無)권력의 권력자'였다. 만일 정말로 딕 체니가 수많은 무고한 인명을 앗아간 이라크전의 실질적 지휘자였다면, 이 영화의 제목 '바이스(Vice)'는 '부통령'뿐만 아니라 '악(惡)'을 의미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아담 맥케이 감독의 솔직한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딕 체니가 그런 만행의 선장 노릇을 했다는 '확실한 물증'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상당한 심증'이 있을 뿐이다. 딕 체니가 단순히 역대 미국 부통령 중 가장 거대한 권력을 누린 '부통령'에 불과한지, 아니면 정말 그 자신이야말로 '악의 축'이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관객 각자와 후대의 몫으로 남는다. 영화 <빅 쇼트>에서 참신한 표현 방식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촉발한 세계 경제위기를 다뤘던 아담 맥케이 감독의 작품답게 <바이스>도 재치 넘치는 연출이 전기영화의 지루함을 크게 덜어준다. *쿨레쇼프 효과(Kuleshov effect)의 신봉자로 생각될 정도로 아담 맥케이 감독은 도대체 어디서 찾아냈는지 모를 기막힌 인서트를 활용해 몽타주의 향연을 선사한다. 차지고 쫄깃한 내레이션, 해학과 풍자도 <빅 쇼트>에 뒤지지 않는다. 크리스찬 베일과 에이미 아담스(딕 체니의 부인, 린 체니 역)를 비롯한 주조연 배우들의 연기는 그야말로 무(無)연기의 연기다. 자연인으로서의 배우 개개인이 드러나지 않고, 자연스레 캐릭터가 전면에 드러난다. *쿨레쇼프 효과(Kuleshov effect) 구 소련의 영화감독 겸 이론가였던 레프 쿨레쇼프(Lev Kuleshov)가 주창한 쇼트 편집의 효과. 쇼트와 쇼트를 병치시키는 편집에 의해 색다른 의미와 정서적인 효과를 유발할 수 있다고 한 이론이다.

[절찬 상영중] 언더독 - 개들이 꽃보다 아름다워

우리말에는 유독 개(dog)와 관련된 관용어가 많다. 한국인이 가장 자주 쓰는 욕설, 비속어의 집합은 개를 포함한 표현을 제외하면 굉장히 홀쭉해질 것이다. 증오의 대상에게 침을 튀기며 '개xx'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을 볼 때면 '과연 저 인간이 개보다 나은 동물이라는 증거는 무엇인가?'라고 묻게 된다. 아주 어지럽고 정리가 안 된 상황을 접하면 누구나 쉽게 '개x'이라고 말한다. 아마 수많은 개들이 제각기 짖어대는 소음으로 가득한 현장만큼 혼란스럽다는 뜻 이리라. 비록 주로 거친 말이긴 하지만 우리말에 개 관련 표현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개가 오랜 시간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 한국에서 개를 반려동물로 여기고 개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1천만 명을 넘어선 지도 제법 오래되었다. 예전에는 주로 마당에 살면서 도둑으로부터 집을 지킨 개들이 이제는 사람만으로 데울 수 없는 외로움의 자리가 얼어붙지 않게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개가 준 위로와 헌신은 결국 개는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쉽게 잊히곤 한다. 개만도 못한 사람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개들은 개만도 못한 사람들보다 더 많이 버림받는다. 애니메이션 영화 <언더독>의 주인공은 사람에게 버림받은 개들이다. 주인이 자신을 버렸을 리 없다며 현실을 부정하던 뭉치(디오)는 짱아(박철민)가 이끄는 유기견 무리에 합류해 살아남는 법을 배워간다. 개 사냥꾼(이준혁)이 시시각각 무리를 위협하고, 재개발 지역 안에 어렵게 마련한 보금자리가 파괴되자 짱아 무리는 평화가 일상인 이상적 거처를 찾아 함께 떠난다. 뭉치의 마음을 사로잡은 밤이(박소담)도 여정에 동참한다. 이후 이야기는 누구나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흐른다. <언더독>은 동물권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다소 진지한 주제의 '전체 관람가' 애니메이션이다. <언더독>에서 '전체 관람가'는 '어린아이가 타깃인 애니메이션'을 암시하기보다는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전 연령대가 음미해볼 만한 영화'를 뜻한다. 다양한 견종을 토대로 정성 들여 창조한 귀여운 캐릭터들과 아름답게 그려낸 한국의 청정한 산수는 애니메이션만의 매력을 배가한다. 박철민을 비롯해 디오와 박소담 등 준수한 연기력을 보유한 배우들은 낯설었을 법한 목소리 연기도 무리 없이 해냈다. 특히 짱아의 목소리를 연기한 박철민의 중얼거림은 웃음의 방아쇠다. 애니메이션은 실사영화 이상으로 만들기 어렵고, 제작에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고생 끝에 훌륭한 애니메이션이 탄생한다고 해도 들인 노력에 비해 관객의 사랑을 받을 확률은 크지 않다. 자연스레 애니메이션에 대한 투자는 박하다. 한국영화 시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오성윤, 이춘백 감독의 전작 <마당을 나온 암탉> 개봉일이 2011년 7월 28일이었고, <언더독>의 개봉 예정일이 2019년 1월 16일이니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의 혹한기는 제법 길었다고 할 수 있다. 개들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언더독>이 때로는 잘 만든 애니메이션이 실사영화보다 아름답다는 사실도 알게 해 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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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찬 상영중] 로마 -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거품들

당신에게 '로마'하면 떠오르는 영화는 무엇인가? 오드리 헵번, 그레고리 팩 주연의 1953년 작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일 것 같다. 그야말로 찬란했던 로마 문명의 상징물들이 도심 곳곳에 잔존한 로마를 배경으로, 인체의 황금 비례를 구현한 고대 문명의 조각상보다 더 아름다운 미녀와 미남이 펼치는 사랑 이야기는 로맨틱 코미디의 모범이 되었다. 로마는 낭만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신작 <로마(Roma)>의 공간적 배경은 이탈리아 로마가 아니다.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의 일부분인 '로마' 구역이다. 전 세계 여행자가 사랑하는 이탈리아 로마와 달리 멕시코시티의 '로마'에는 낭만이 끼어들 미세한 틈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 곳은 1970년대 멕시코의 서릿발 같은 현실이 지배하는 곳이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자신의 성장기를 반영해 만든 이 영화는 중산층 백인 가정의 입주 가정부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가 주인공이다. 클레오라는 개인과 그녀의 주변 사람들이 겪는 사건들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1970년대 멕시코의 계급, 차별, 폭력, 가정의 붕괴 등 사회상을 직시하게 된다. 당시는 멕시코에서 민주화 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이기도 하므로 한국 관객은 남다른 감정적 유대를 가질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로마>는 개인적으로 언젠가는 꼭 만들고 싶은 작품이었고, 꼭 해야만 하는 작업이었다."라고 밝힌 만큼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각본, 감독, 촬영, 제작, 편집까지 도맡았다. 형식과 내용을 모두 자신이 틀어쥐었다. 지금까지 그가 쌓아온 영화적 자산과 개인적 인생을 이 영화에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덕분인지 언뜻 뻔해 보이기도 하는 영화 <로마>는 절묘한 영화적 기교를 실현해 형식과 내용의 하모니를 성취했다. 범박하게 말해 영화는 형식과 내용의 앙상블이 좌우한다. 영화의 형식미를 대표하는 용어로 가장 널리 알려진 단어는 '미장센(mise-en-scène)'일 것이다. '미장센'은 원래 연극 용어로서 "무대 위에서의 등장인물의 배치나 역할, 무대장치, 조명 따위에 관한 총체적인 계획"이다. '미장센'은 연극의 사촌인 영화의 품에도 편안히 안겼다. 연극과 달리 영화의 미장센을 구성할 때에는 반드시 촬영 방식을 심사숙고해야 한다. 카메라의 심도(depth of field), 초점의 이동, 움직임에 따라 특정한 장면이 주는 감흥은 사뭇 달라진다. 카메라뿐만 아니라 화면비, 조명, 인물의 동선 등 촬영 시 고려해야 할 요소는 정말 많다. 똑같은 시나리오라고 할지라도 어떤 촬영감독(DOP, Director of Photograhpy)을 만나느냐에 따라 영화의 운명이 엇갈릴 수 있다. 촬영감독에게 괜히 '감독' 칭호를 붙여주는 게 아니다. 촬영감독을 자임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치밀하게 조율된 카메라 움직임을 선보인다. 다양한 카메라 움직임 중에서 패닝(카메라가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유독 많이 사용된다. 흔히 보기 힘든 360도 패닝까지 등장한다. 이처럼 잦은 패닝은 계급과 출신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한 공간에 살면서 서로 지지해주는 클레오와 집주인 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라), 아이들, 아이들의 외할머니를 한데 묶어주는 시각적 표현이다. 또한 패닝은 이 영화의 종반부에 등장하는 핵심 메타포인 '파도치는 바다'를 지속적으로 떠오르게 한다. '카메라 트랙(궤도 화면 따위의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설치하는 레일)'을 활용하여 카메라가 인물과 나란히 이동하면서 인물의 프로필(옆모습)을 찍는 장면들도 파도의 움직임을 닮았다. 파도는 쉴 새 없이 주인공을 때리는 인생 역경을 직관적으로 환기시킨다. 영화 <로마>는 극의 전개상 중요한 순간에 인물의 정면이 아니라 유독 프로필만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특징을 피사체의 색상이 제거된 흑백영화라는 사실과 결합해보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관객에게 최대한 많은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보다 관객이 스스로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려고 한 것 같다.

[절찬 상영중] 부탁 하나만 들어줘 - 막장이란 무엇인가?

희곡, 소설, 영화처럼 등장인물, 내러티브, 스토리를 갖춘 예술에서 소위 '막장'이란 무엇인가? 먼저 '막장'의 사전적 의미부터 살펴보자. 녹색창에 물어본 결과, 흔히 우리가 '막장' 드라마라고 할 때의 '막장'은 '막장(-場)'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즉, "1. 마지막 장을 뜻하는 말로, 특정한 상황의 마지막 장에 다다른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2. 인생을 갈 때까지 간 사람 또는 그러한 행위를 꾸며 주는 말"이다. 행위자인 사람에 초점을 맞춘 해석이다. 이에 따르면 '막장' 인물이 '막장' 짓을 하는 극이 '막장극'이다. 물론 '막장'의 의미는 "갱도의 막다른 곳"일 수도 있겠다. 이런 풀이도 의미가 통한다. '인물의 처참한 끝'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캐릭터, 소재, 설정의 '파격성'을 막장의 핵심 기준으로 삼는다면, 막장극의 원조를 찾기 위해 역사를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기원전 429년,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중 한 명인 소포클레스(Sophocles)의 <오이디푸스 왕(Oedipus Rex)>이 처음 무대에 올랐을 때, 초연을 본 관객들은 얼마나 경악했을까? 잘 알려진 대로 <오이디푸스 왕>의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면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니까. 하지만 우리는 <오이디푸스 왕>을 '명작'이라고 일컫지, '막장'이라고 폄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 인류가 향유할 이야기의 고전으로 칭송한다. <오이디푸스 왕>은 여타 다른 막장들, 이를테면 드라마 <아내의 유혹>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 것일까? <오이디푸스 왕>에는 있고, <아내의 유혹>과 같은 막장에는 없는 것을 네 가지 꼽을 수 있을 듯하다. 어처구니 없는 전개를 배척하는 '치밀한 개연성', 휘발되지 않고 오래 지속되는 '진한 카타르시스',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형상화하는 정말 '매력적인 등장인물'. 이 네 가지를 다 갖춘 이야기는 매우 희소하다. 사실 넷 중 하나만 설득력 있게 표현해도 훌륭한 이야기라고 할만하다. 그렇다면 캐릭터, 소재, 설정이 매우 파격적인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막장인가?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의 이드(id)는 막춤을 춘다. 'fxxx'이 하는 말의 절반에 가까운 에밀리(블레이크 라이블리)는 '병적인 거짓말쟁이(pathological liar)'다. 얌전해 보이는 스테파니(안나 켄드릭)는 본능적 욕망을 제어하려 노력하긴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두 여자 주인공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숀(헨리 골딩)은 착한 것 같지만 여자의 유혹 앞에서 늘 속수무책이다. 이 영화의 미스터리 플롯을 지탱하는 중요한 변곡점마다 어김없이 살인이 기거한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단순 막장극으로 치부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이 여성 캐릭터를 능수능란하게 조율할 줄 아는 폴 페이그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전작 중 멜리사 맥카시가 스파이로 출연한 영화 <스파이>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에서 에밀리와 스테파니는 비록 막장 짓을 많이 하긴 하지만 입체적이고 매력적인 캐릭터다. 이야기 전개는 일견 황당무계하지만 캐릭터의 특성을 함께 고려해보면 개연성에 아주 박한 점수를 주긴 어렵다. 인간 본성에 대한 '웃픈' 해설과 유머는 영화에 세련미를 더했다. 이 정도면 명작은 아니더라도 '웰메이드 막장극'이라고 불러줘도 괜찮지 않을까?

[절찬 상영중] 저니스 엔드 - 전쟁의 끝을 잡고

'감(感)' 살면서 나도 모르게 많이 쓰는 단어 중 하나다. 예를 들어, 통화 중 상대방의 목소리가 잘 들릴 때 '감이 좋다'라고 하고,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결과를 미리 예상해보면서 '이번엔 감이 좋다'라고 하기도 한다. 문제 해결의 기미가 보이면 '감 잡았어!'라고 외친다. 불길함이 엄습하는 순간에는 '감이 안 좋아...'라며 말끝을 흐리게 된다. 영화 <저니스 엔드>는 '감이 안 좋아...'라는 독백을 억누르고 있는 듯한 인물들의 표정으로 시작한다. 1918년, 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의 어느 최전방 참호를 사수해야 했던 영국군에겐 불타는 용맹과 승리를 향한 강철 같은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야전에서 몸을 숨기면서 적과 싸우기 위하여 방어선을 따라 판 구덩이'를 뜻하는 '참호'는 진퇴양난에 빠진 군인들의 안절부절을 극대화하는 공간이다. 참호에서 나가는 즉시 적군의 총알이 빗발칠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쉽사리 참호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지루한 눈치 싸움이 이어지게 되고, 교착 상태에 빠진 전장은 총성 대신 병사들의 한숨소리로 가득 찬다. 지척에 적이 있고 당장이라고 교전이 시작될 듯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곳에서는 참담한 대립의 끝이 도대체 언제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겨울 빙판길에서 차바퀴가 헛돌듯이 교전 전의 고요가 헛도는 참호에 몸을 의탁해야만 했던 군인들의 내면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전쟁터였을 것이다. 그들은 질척질척한 참호를 벗어나는 순간에 펼쳐질 생지옥을 하루에도 수백 번씩 상상해봤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결국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언젠가 온다는 것. '참호전'은 전쟁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술일지도 모른다. 영화 <저니스 엔드>는 승자의 역사를 칭송하거나, 전투의 스펙터클을 과시하거나, 전쟁의 폭력성을 부각하거나, 전쟁을 희대의 러브스토리를 위한 도구로 활용하지 않는다. 다만 참호에 처박힌 인물들의 표정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그들의 정신이 시들어 가는지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전쟁의 끝을 잡고 있는 인간의 불안한 표정이 제일 절실한 전쟁 반대 구호가 될 수 있다. 영화 <저니스 엔드>는 전쟁의 잔인함을 직접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반전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들과 다른 길을 가면서도 반전이라는 동일한 목적지에 당도했다.

[절찬 상영중] 보헤미안 랩소디 - 프레디,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인류의 역사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악기들이 존재한다. 그 악기들을 다루는 사람은 저마다 자신이 그리는 연주가의 청사진을 안고 잠이 들었거나, 들 것이다. 무수한 가수들이 저마다 고유한 음색으로 세상을 칠하고자 성대(聲帶)의 고난을 견뎠거나, 견딜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꿈'이 그러하듯이 뮤지션이라는 꿈의 표면도 미끄덩하다. 꿈의 토대 위에 바로 서고자 아무리 치열하게 노력해도 번번이 넘어지기 일쑤다. 이카루스의 날개는 녹아내리기 십상이다. 마침내 누구나 인정할만한, 혹은 최소한 해당 분야 종사자들은 엄지를 치켜세울 결과물을 얻었다고 해도 세속적 성공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예술성과 대중성이 모두 뛰어난 뮤지션은 그만큼 희귀한 보석이다. 하물며 자신의 유산에 안주하지 않고, 자기 복제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며, 꾸준히 음악적 실험을 추구하는 뮤지션이라면? '인피니트 스톤'이라고 할만하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밴드 퀸(Queen)과 밴드의 리드 싱어였던 프레디 머큐리의 일대기를 '재현(representation)'한다. 음악영화이자 전기영화인 셈이다. 음악영화로서 <보헤미안 랩소디>는 오리지널리티(독창성)를 추구했던 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냉소적인 영국식 유머를 주고받고, 때로는 음악적 견해의 차이 때문에 티격태격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엔 늘 '퀸'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작품을 만들어내는 멤버들의 모습이 웃음과 희열을 선사한다. 퀸의 수많은 히트곡 중 하필 '보헤미안 랩소디'가 이 영화의 제목으로 채택된 이유는 '보헤미안 랩소디'가 다른 어떤 노래보다도 당대의 조류를 거슬렀기 때문일 것이다. 라디오를 활용한 곡 프로모션이 성공의 절대 반지였던 당시에 누구도 쉽게 도전하지 않았던 6분짜리 대곡, '보헤미안 랩소디'. 영화에도 나오듯이 이 곡은 발매 초기 평론가들의 뭇매를 맞았다. 하지만 대중의 평가는 사뭇 달랐다. "프레디 머큐리가 작사/작곡한 이 곡은 아카펠라, 발라드, 오페라, 하드 록 등 전혀 다른 장르들을 조합한 실험적 구성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퀸이 세계적인 밴드의 반열에 오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위키백과 'Bohemian Rhapsody' 항목에서 인용) 전기영화로서 <보헤미안 랩소디>가 묘사한 퀸과 프레디 머큐리의 이야기는 실제와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영화 자체의 기승전결을 위해 허구의 사건과 인물을 추가하고, 실제 일어난 사건의 시간적 순서를 영화적 흐름에 맞게 재구성하기도 했다. '재현'은 있는 그대로의 '복제'가 아니므로 과하지 않은 수준의 각색이라면 납득할만하다. 특정 인물의 전기영화는 주연배우가 실존 인물의 외양과 행동을 얼마나 잘 따라 했는지로 주목받는 경우가 많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프레디 머큐리 역을 맡은 레미 말렉만 소위 '싱크로율 대박'인 것이 아니다. 퀸의 메인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로 착각할 정도로 비슷한 귈림 리, 드러머였던 로저 테일러로 분한 벤 하디, 그리고 베이시스트 존 디콘(디키)을 연기한 조셉 마젤로 등 모든 주연 배우들이 퀸을 충실히 재현했다. 이 영화는 결말부에 등장하는 'LIVE AID' 공연의 벅찬 감동을 위해 수미상관의 구조를 채택했다. 긴장한 채 'LIVE AID' 무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프레디 머큐리의 모습으로 시작된 영화는 'LIVE AID' 공연이 끝나는 동시에 마무리된다. 'LIVE AID' 무대에 오르는 순간을 맞이하기까지 퀸의 멤버들이, 특히 프레디 머큐리가 공연장 안과 밖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몰랐다면 마지막 공연의 감흥은 훨씬 덜했을 것이다.

[절찬 상영중] 완벽한 타인 - 나는 의심한다, 고로...

누구나 비밀은 있다. 비밀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비밀이 있을 수도 있다.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에게도 공개하지 못할 비밀을 누구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타인을 완벽히 알거나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심지어 우리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지 않는가? 그렇게 본다면 인간관계의 연결망은 온갖 불확실한 추측과 의심이 난무하는, 무용한 정보의 집합소와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완벽한 타인'으로만 가득한 곳일지도 모른다. 영화 <완벽한 타인(Intimate Strangers)>은 영화 '퍼펙트 스트레인저스(Perfect Strangers)'를 각색해 한국의 상황에 맞게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원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완벽(해 보이는 듯)한 반쪽'을 순식간에 생판 모르는 '완벽한 타인'으로 바꾸는 불씨는 스마트폰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분신이 되어 버린 스마트폰은 수많은 비밀을 간직한 화약고다. 메시지, 이메일, 전화 등 스마트폰의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공개하는 것은 발가벗은 채로 남 앞에 서는 일과 같을 것이다. 스마트폰은 예측이 가능하거나 불가능한 극적 장치들을 무작위로 내놓는 판도라의 상자가 된다. 대다수 사람들이 손에 쥐고 있는 스마트폰 덕분에 이 영화는 빌라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월식이 있는 하루 저녁 동안 펼쳐지는 눈치 싸움과 입씨름만으로도 관객의 공감과 몰입을 이끌어 낸다. 시공간의 제약으로 인해 연극적인 영화로 각인될 가능성도 컸지만, 촬영과 편집이 돋보이는 몇몇 장면들을 배치해 영화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영화 <완벽한 타인> 원작의 영어 제목은 'Perfect Strangers'다. 반면에 <완벽한 타인>의 영어 제목은 'Intimate Strangers'다. 영단어 'intimate'의 사전적 의미 중 하나는 '(흔히 성생활과 관련된) 사적인[은밀한]'이다. 영화 초반, 섹스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장면들은 뒤에 일어날 사건들의 복선이나 원인이 되며 실제로 '스마트폰 공개 게임'이 시작된 후 발생하는 오해와 언쟁은 모두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성생활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인간의 본능을 계속 자극하면서, 이야기를 얽히고설키게 만들어 긴장과 이완을 유도한다. 누구나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면서,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도 속인다. 타인도 나처럼 다른 사람과 자신을 속이며 살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니 타인을 항상 의심하게 된다. 의심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정도가 심각하지 않다면, 의심은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호복이 될 수 있다. 나와 타인 사이에 필요한 간격을 형성한다. '나는 의심한다, 고로 평범한 인간이다.' 영화 <완벽한 타인>의 부제로 떠오른 문장이다.